제165화
태양 빛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 나른한 오후. 강렬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여전히 뜨거운 빛이 은후 일행을 마중 나왔다.
“와아!”
하지만 고래 라온의 등에 타고 있던 그 누구도 햇살에 눈이 부시거나 뜨겁다고 느끼지 않았다.
“바다다!”
“바다는 오랜만이네요.”
딱 적절한.
그건 은후를 제외하면 사람이 없었던 점도 있었으며, 고래 라온이 자신의 주위를 적절한 온도로 조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후 형은 바다에 와 본 적 있어?”
“그럼. 있지.”
“나는 두 번째!”
“성호 씨는 처음인가 봐요?”
성호가 중얼거렸다.
“아마……도?”
“처음이면 처음이고 아니면 아닌 거지. 대답이 뭐 그래요?”
“기억이 애매해서.”
“하여간 칠칠맞기는.”
말투와 다르게 눈빛에서 묻어나는 건 걱정스러움. 어느 순간부터 두 사람은 퍽 친해졌다. 내심 서로를 인정한다고 해야 할지. 이해한다고 해야 할지. 그래서 성호는 연후에게 딱히 화가 나지 않았다.
“그게 뭐 나 때문인가? 아니지, 나 때문인가. 귀신이 되어 버려서 말이야.”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성호에게 은후가 답했다.
“그렇다면 제 책임도 있겠네요.”
“아니요, 은후 씨는. 음.”
은후가 픽 웃었다.
“면박을 주려는 건 아니었어요. 혹시라도 애매한 기억을 확실하게 찾고 싶으면 말해요.”
“그게 가능해요?”
“가능하죠. 하지만 세상에 이런 말이 있죠. 모르는 게 약이라고. 알아서 좋을 게 없다고.”
“…….”
“선택은 성호 씨 몫입니다.”
잠깐의 침묵 후.
“고민해 보겠습니다.”
“그래요.”
성호가 자신 때문에 가라앉은 분위기를 풀기 위하여 기타를 켰다. 평소와 다르게 밝은. 여느 때라면 잔잔하고 아련한 느낌의 음률을 자아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흐흥.”
콧노래를 부르던 령이 개구리를 대뜸 끌어안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에잇!”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다에서 솟구치는 물줄기.
이윽고.
“라온아!”
령의 의사에 따라 라온이 바다로 질주했다. 조금 전과 다르게 비산하는 물방울들이 많아서였을까. 고래 라온으로부터 비롯된 물방울들이 서로 부딪히며 거대한 포말을 만들어 냈고.
“무지개다!”
태양이 무지개를 만들어 냈다.
‘정확히는 라온이 힘을 좀 쓴 것 같은데.’
무지개란 수증기 반대쪽의 태양광이 대기 중의 수증기를 만남으로써 굴절, 반사, 분산되어 나타나는 자연 현상. 하나 지금처럼 즉시 선명한 무지개가 나타나는 건.
‘뭐.’
아무렴 되었나.
은후는 마법사로서 분석하는 자신을 내려놓았다.
그래.
지금은 나들이였고.
“앗! 개구리 너!”
생각을 비우고 즐기는 게 맞겠지.
“거기 서!”
“내가 서라고 서는 바보는 아니거든!”
개구리가 폴짝거리며 바다 위를 뛰었고. 그 뒤를 령이 뒤쫓기 시작했다.
“임자는 여전히 예쁘구만.”
“예쁘다는 소리 오랜만에 듣네요?”
어느새 도깨비와 구미호 부부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꽁냥거리고 있었다. 언제 준비한 지도 모를 커다란 튜브 보트 위에서.
“거 성호 씨도 오늘은 기타 내려놓고 놀자고요. 이게 다 음악의 영감이 될 줄 누가 압니까?”
연후는 성호를 능숙하게 설득한 뒤 물놀이를 시작했다.
‘그나저나 라온도 놀고 싶어 하는 것 같기는 한데.’
커다란 덩치 때문에 혹시 몰라 가만히 있는 라온을 바라보며 은후가 고민했다.
‘어떻게 놀아 줘야 하나.’
고양이나 강아지와 놀아 주는 것처럼 하면 되려나.
‘좀 아닌가?’
뭐.
이럴 때는 직접 물어보면 되지.
* * *
잠시 후.
실컷 물놀이를 하던 령이 중얼거렸다.
“우우. 배고파아. 탐험도 해야 하는데.”
“거 물놀이가 힘을 많이 빼는 것이제.”
“삼촌! 나 라면 먹고 싶어!”
“그려, 그려.”
물놀이에는 라면이 진리라고.
어떤 예능 다큐멘터리를 보고 난 후 물놀이를 가면. 그 이후에 꼭 라면을 먹고 싶다고 말한 령의 희망에 따라서 도깨비가 라면을 끓이기 시작했다.
“저는 됐습니다!”
“배 안 고픈감?!”
“이게 더 급해서요!”
“하여간. 쯔쯧.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디.”
낙원의 주민 중 밥을 안 먹겠다고 한 이는 연후였다.
이유는 조각에 있었다.
뜬금없이 바다 위에서 조각인가 싶겠지만.
- 령아.
- 응?
- 바닷물로 조각놀이 해 볼래?
- 조각!
- 모래를 가지고 노는 것보다는 이게 재밌을걸.
개구리가 령을 꼬셨다.
해변에서 모래를 만지작거리는 것보다 물을 가지고 노는 게 더 재밌을 거라면서.
‘모래가 있는 장소보다는 물이 가득한 여기가 낫지. 바닷물이라는 게 좀 마음에 안 들지만.’
마나를 이용한 간단한 응용이랄까. 현재 낙원의 주민은 모두가 나름대로 마나를 다룰 수 있었다.
은후 외에 낙원의 주민은 모두 정령이나 다름없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물론 은후만큼 전문적이면서도 깊이 있고 계산적으로 하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연후 씨가 조각을 저렇게 즐거워할 줄은 몰랐네요.”
“연후는 요새 나한테 조각을 배우고 있는디 말여.”
“그랬어요?”
“그체.”
“심심해하는 거 같길래 내 추천해 줬제. 시간 때우기에 조각만 한 것도 없으. 근디 바닷물로 조각하는 게 무슨 재민지 모르겠단 말여.”
은후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조각도 조각이지만 마나를 움직이는 데에 재미를 붙인 모양이네요.”
“마나? 거 도력 말여?”
“삼촌 식으로 따지면 그렇겠죠.”
“흐흠. 뭐 도력도 글체. 연후 실력이 많이 늘긴 했으.”
연후가 바닷물로 만드는 건 커다란 장수풍뎅이였다. 그 옆에 개구리가 만든 코끼리와 령이 만든 공룡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그런데 조각도 할 줄 아셨군요.”
“우연히 연이 닿았거던.”
정말로 우연히.
“예전에 떠돌아다니다가 사람을 한 명 구해 줬는디. 꽤 유명한 조각가드라고.”
굶주림에 시달려 죽기 일보 직전의.
“당시 참 백성들이 참 어려웠으.”
구해 준 이유는 아니었다.
변덕.
그 무렵 굶어 죽는 이들을 한둘 본 게 아니었다.
“죽기 직전에도 눈빛이 참 형형한 게 아직도 기억이 나드란 말이제.”
그 뒤로 그냥 갈 길 가려 했으나 목숨값은 갚아야 한다면서 자신의 기술을 알려 주었다. 다른 건 주고 싶어도 가진 게 없고 평생 해 온 게 돌을 깎는 일이라면서 말이다.
“몇 년 같이 지냈으.”
“그 사람 솜씨가 좋긴 했죠? 당신 실력도 나쁘지는 않지만요.”
“흐. 뭐 조각에 미친 사람하고 날 어떻게 비하나. 그래서 인간이 참 신기혀.”
도깨비나 구미호와 비하자면 참으로 짧은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 아마도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얼마 없으니까.
살아갈 나날이.
그 시간을 충실하게.
뭐라도 남기기 위하여.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지만.
“이름이 뭐였드라. 임자는 기억나는감?”
“글쎄요. 기억나는 건 김하정의 후손이라는 거?”
김하정은 조선 시대 이름을 날린 유명한 조각가였다.
그렇게 한동안 식사하며 조각에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었고.
“슬슬 보물을 찾으러 가보는 게 어뗘?”
“보물!”
보물찾기.
노는 것도 노는 것이지만 오늘의 본 목적.
그리고 령만큼이나 기대를 품고 있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도깨비였다. 기대감에 가득 찬 눈동자를 하고 있는 도깨비에게 은후가 물었다.
“그렇게 좋으세요?”
“고럼. 거 도깨비라고 다 보물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말여. 대체적으로 좋아한단 말이지. 나도 좋아혀.”
옆에 있던 구미호가 빙그레 웃으며 맞장구쳤다.
“그쵸. 근데 당신은 좀 심해요?”
“허어. 심하기는?”
“요새야 좀 괜찮아졌다지만 예전에는요. 아니에요?”
“거 큼. 보물 좀 좋아하면 안 되나?”
“당연히 되죠.”
* * *
사실 보물찾기라고는 했지만 거창하지 않았다. 평범한 이들과 다르게 낙원의 주민은 정령이었고, 은후는 마법사였으니까. 하물며 고래 라온의 기억이 있었으니.
은후가 마음만 먹는다면 마나를 퍼뜨려 주위를 훑는 것만으로도 간단하게 끝날 문제였다. 하지만 그래서야 재미가 없는 법. 은후는 대략적인 범위만 지정해 준 뒤 한 발자국 떨어져서 그냥 지켜봤다.
“여기는 없어!”
은후를 제외하고 다들 잠수해서 직접 바다 아래를 훑었다.
“여기도!”
개구리도 자신의 능력을 쓰지 않고 눈으로만 찾았다.
“은후 도령은 안 찾으세요?”
“제가 찾으면 너무 금방 끝나서 재미없을걸요. 다들 그렇잖아요? 삼촌만 해도 마음만 먹으면 바로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호호. 거야 그렇죠. 위치도 어느 정도 알고. 도자기라고도 했으니까요.”
“이모는요?”
“나야 뭐. 솔직히 궁금은 하지만 크게 관심은 없어요. 그리고 지켜보는 게 좋네요.”
은후와 대화하면서도 구미호의 눈은 도깨비를 좇고 있었다.
“항상 느끼지만 금슬이 참 좋으세요.”
구미호가 가늘게 웃으며 답했다.
“도령도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진담이니까요?”
“압니다.”
이윽고.
“찾았으!”
도깨비가 외쳤다.
“오! 삼촌이 찾았대!”
령이 뒤따라 외쳤다.
‘어디 볼까.’
위치는 고군산군도.
바다 아래 묻힌 고려청자와 분청사기, 백자 등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내가 찾았……어라?”
어디론가 슥 사라졌던 개구리가 나타나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뭐야?”
“뭐기는! 보물이지!”
“그, 어. 그치. 보물은 보물이지. 근데 나도 보물을 찾은 거 같은데. 그것도 정말로 제대로 된.”
“보물이 보물이지. 제대로 된 보물이 뭐야?”
개구리가 씩 웃었다.
“따라와 봐.”
* * *
보물선.
군산 앞바다에 전해지는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가 있었다. 지역에서 수십 년 동안 소문으로 떠돌던 보물선. 단순한 소문이 아니었다. 꽤 정확한 날짜까지 전해지고 있었다.
태평양전쟁 말기 1945년 7월 2일.
금괴 10t을 싣고 선유도 인근을 지나가다가 미군의 공군기에 의하여 침몰당한 일본의 시마마루 12호.
“허어.”
수중 속.
어지럽게 널브러진 잔해 속에서 개구리가 가져온 몇 가지 옛 시대의 동전을 바라보며 도깨비가 말했다.
“보물이 두 군데 묻혀 있었구만.”
시대가 달랐을 뿐.
둘 다 군산의 고군산군도의 선유도 인근이었다.
“멋지고 쓸쓸혀.”
거대한 배의 선수와 선미의 신체가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 외의 몸체는 전부 묻혀있었고. 은후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시간을 거스르기 전 봤던 뉴스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 그런 기사가 났었지.’
지금은 아니지만.
훗날 고려청자도. 지금 우리 앞에 있는 보물선도. 둘 다 결국 사람들은 찾아낸다. 그렇게 은후가 과거를 더듬고 있을 때. 령이 은후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저어.”
“응?”
“보물 말이야.”
“편하게 말해.”
“조금만 챙기구. 나머지는 아이를 위해서 쓰면 안 될까?”
은후가 픽 웃었다.
“조금은?”
“에헤헤. 나는 괜찮지만 개구리나 삼촌이나. 다들 잔뜩 기대하고 왔는데 빈손으로 가면 아쉽잖아.”
그런 령의 말에 개구리가 답했다.
“난 괜찮은데?”
도깨비도 이어서.
“거 보물은 찾는 과정이 중요한 것이고, 더 중요한 건 어떻게 쓸지 정하는 것이제. 령아. 나는 네가 이걸 아이를 위해서 쓴다면 난 빈손도 상관없으.”
은후가 어깨를 으쓱이며 죽 시선을 돌리며 눈빛으로 물었다. 연후나 성호도 딱히 관심이 없는듯했다. 유일하게 구미호만이 이렇게 답했다.
“저는 청자 몇 점만 가져갔으면 좋겠어요. 아까 봤더니 눈에 띄는 게 몇 점 있더라구요. 가게에서 쓰면 좋을 것 같아서요.”
령이 내심 감동을 받은 듯 서글한 눈동자로 은후를 바라보며 말했다.
“은후는?”
“나도 상관없어.”
그렇게 군산 바다에 묻혔던 다른 시대의 두 보물 더미들은 아이들을 위해서 쓰이기로 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