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4화
낙원 주민들의 아침 식사가 끝나고 얼마 후.
툭.
툭.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다.”
령이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옆에 있던 은후가 마나를 끌어 올리며 하늘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 비가 올 줄은 몰랐는데.’
가느다란 비.
이슬비였다.
이슬비는 보통의 비와 다르게 입자가 작았다. 그래서 부슬거리는 느낌이 나며 기상 레이더에 잘 잡히지 않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은후의 감각은 또 다른 이야기였다. 마음만 먹는다면 현대의 과학 기술보다 높은 확률로 알 수 있었으니까. 하물며 이곳은 은후의 손길이 뻗은 장소가 아니던가.
‘왜 오늘 날씨가 맑을 거로 생각했지?’
굳이 따로 마음을 먹지 않아도 예지에 가깝게 날씨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은후는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사고의 흐름을 가속시켰다. 그때 령이 은후에게 말했다.
“라온이.”
“응?”
“라온 때문인 것 같아.”
“그래?”
이제 정식으로 이름을 주고받았기에 은후가 무얼 고민하는지 옆에서 알아차릴 수 있었던 령이 그 고민에 관한 답을 내어 주었다.
‘그런가.’
그래서 국소적으로.
‘덕진 공원 근처에만 내리고 있구나.’
령이 말을 이었다.
“지금 한 아이가 말이야.”
“응.”
“비가 내렸으면 좋겠다고 바란 것 같아.”
“쓸데없는 데에 힘을 낭비했다고 하기는 좀 그렇지만 말야. 령이 잘 단속해야겠네?”
막 지성을 갖춰 나가는 라온이었다. 그렇기에 아직은 그 사고 수준이 어렸다.
“응. 그래도 좋다.”
“뭐가?”
“여유랄까. 예전에는 그런 아이의 바람을 알아차려도 들어줄 수 없었으니까.”
“가끔은 나쁘지 않겠지.”
하지만.
“매번 그래서는 안 돼.”
“응.”
“수호도 잘 관리하고. 내가 보기에 라온 혼자서 그런 건 아닌 거 같은데.”
“아하하. 사실은 수호가 물어봤었어. 비를 좀 내려도 괜찮냐구. 그런데 뭐랄까. 그 아이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이 너무 슬펐거든.”
최근 할머니를 잃었다고 했다.
할머니와 자주 놀러 왔던 곳이 여기.
덕진 공원.
“마지막으로 할머니와 놀러 왔던 날에 비가 왔다고 해. 그때의 추억이 퍽 기억에 남았었나 봐.”
그래서 비가 내리기를 바랐다고.
“아빠랑 오는 건 재미 없다고 하네.”
“아빠가 좀 서운해하겠는데.”
그렇다고 또 너무 서운해할 수도 없는 건 아이가 그리워하는 대상이 할머니였으니까.
“아빠가 되는 사람도 내심 어머니를…… 그러니까 아이의 할머니를 보고 싶어 하고 있는 것 같아.”
얼마 전까지 아이의 안전에만 신경 쓰며 다른 건 그저 지켜만 봐야 했던 령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비가 내리는 정도의 작은 소망이라면 언제든지 이뤄 줄 수 있게 되었다.
‘거기에 힘만 쓰는 건 또 아니지.’
그 과정을 통하여 성장도 할 수 있을 테니까. 아이를 돕고 위하는 과정에서. 은후가 판단컨대 령은 아직 성장의 여지가 무척이나 컸다.
‘애초에 활동한 시기도 짧고.’
탄생한 이래.
하물며 활동 시기도 짧았다.
그로부터 비롯된 결핍이 령의 욕구를 증폭시켰다. 게다가 은후와 만남 이전에는 극심한 좌절을 겪기도 했다.
자신의 부족한 힘.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았더라.
설령 자신의 존재가 사라져도 할 수 있는 만큼은 아이를 위하여. 그 결심은 여전히 확고했고, 지금은 그럴 힘 또한 있었으니. 심지어 은후 외에 천도 복숭아나무와도 계약했다.
“나 말이야.”
“응.”
“이모저모 생각해 봤는데.”
“편하게 말해.”
“다른 건 여전히 쭉 고민 중이지만 최소한 아이라면 죽을 정도로 아프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 싶더라구.”
아무리 아이여도 조금은 아플 수 있겠지.
마음도.
육체도.
하지만 비유가 아닌 문자 그대로 죽을 정도로 심한 아픔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은혁이 말이야. 이제는 한번에는 몰라도 천천히 치료해 줄 수 있을 거 같아.”
김은혁.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던 찰나 덕진 공원에 왔다가 은후에게 도움을 받은 아이. 후에는 수호령으로부터 직접 축제 초대까지 받았고, 지금도 이따금 덕진 공원을 찾았다.
“치료해 주고 우리들은…… 기억 못 하게 해야지.”
“그게 령이가 내린 결론이야?”
약간의 문제라면 은혁이 령의 존재를 제법 확고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것.
“응. 나는 정령이고, 요즘 시대에 보통 사람들이 정령과 어우러져서는 조금 그렇지.”
잠깐 스쳐 지나간다면 모르겠지만.
하지만 쭉 이어지는.
그런 인연은 은혁에게 득이 될 게 없다고 령은 판단했다.
하물며 요즘의 시대에는.
“바보네.”
“그런가?”
“그럼. 게다가 그건 좀 독선적이야. 은혁이 생각은 또 다를 수 있잖아?”
“알지만. 그건 나도 아는데.”
령이 서글프게 웃었다.
“사람은 사람끼리. 은후처럼 좀 특이한 경우라면 모를까.”
그게 령이 내린 결론이었다.
“나중에 생각이 바뀔 수도 있겠지만 당장은 그게 맞는다고 봐.”
“그렇다면야.”
충분히 심사숙고했다면.
은후는 딱히 령에게 무언가 더 말하지 않고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령은 애써 활짝 웃으며 은후에게 말했다.
“그래도 치료하는 기간 동안은 친구로 지낼 수 있으니까 괜찮아.”
마치 자신에게 다짐하듯.
“그거면 돼.”
이별이 예정된.
하물며 한쪽에서는 그 기억이 추억은커녕 희미해져서 결국 꿈결과도 같이 변해 버릴 게 확정된.
“나들이라도 갈까.”
“응? 나들이?”
“그래. 저번에 라온이 때문에 급하게 돌아와야 했잖아?”
“나들이…… 그럼 나 가고 싶은 곳 있어! 바다!”
령이 눈빛을 반짝였다.
“다 같이 가서 보물찾기!”
“보물?”
“응응. 라온이 기억에서 봤는데 우리 갔던 곳에서 좀 더 가면 그 아래에 뭐가 잔뜩 있는 거 같더라구. 도자기 같은 것들.”
“그전에 전주도 한 바퀴 돌자.”
령의 힘이 미칠 수 있는 범위는 덕진 공원을 중심으로 크게 늘어난 상태였다.
“그러면 전북대학교 병원도 들를래. 아픈 아이들이 많이 있다고 들었어.”
“도와줄 수 있는 아이를 도와주려고?”
“전부는 힘들겠지만 적어도 죽는, 죽을 아이는 없었으면 하니까. 겸사겸사 은혁이도 마저 치료해 주고. 또…… 현수도 잠깐 보고.”
서글픔을 덜어내고 굳은 마음으로 채워 넣은 령이 은후에게 잔잔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 괜찮아. 사람은 사람하고 어울려야지. 잠깐이라면 나랑도 괜찮겠지만. 나는 사람은 아니니까. 게다가 은후도 있고. 또 삼촌이랑 이모랑 개구리도 옆에 있고. 연후 형도 나랑 잘 놀아 주고. 성호 형은 좀 아니지만. 아, 그래도 성호 형은 나랑 잘 안 놀아 줘도 기타는 자주 쳐 줘. 기타 소리는…….”
* * *
하늘 고래.
이름 그대로 하늘을 나는 고래로서 상상 속의 동물이었다. 애초에 고래는 바다에서 살아가는 동물로서 하늘을 날 수 없다.
“보통 물고기. 그러니까 어류로 착각하는데 진짜는 포유류야.”
“포유류는 또 뭔데.”
“저번에 설명해 줬잖아.”
“까먹었어.”
전북대학교 병원의 옥상에 만들어진 휴게실에서 은혁과 현수가 여느 때처럼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워 내고 있었다. 대화의 주제는 하늘을 날 수 있는 동물에 관해서였다.
“그럼 고래는 하늘을 날 수 없겠네.”
“바보냐. 애초에 고래가 하늘을 난다는 게 말이 돼?”
“안 되지? 근데 저번에 축제 말이야.”
“축제? 무슨 축제?”
현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덕진 공원. 기억 안 나?”
“축제. 그, 같이 비슷한 꿈을 꿨던 거 말하는 거야?”
은혁이 흠칫했다.
“수호령. 기억 안 나? 은후 형은?”
“수호령은 모르겠고. 은후 형은 기억나. 연후 형도 기억나고.”
“같이 축제에 참여했잖아. 말 타고 날아다니고.”
“응?”
현수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야. 말 타고 날아다닌 건 꿈에서 그랬던 거고. 그때 되게 신기해했잖아. 서로 꿈을 공유한 거 아니냐면서. 은후 형이랑 연후 형은 공원에서 같이 좀 놀고 말았는데. 아, 연후 형 기타 진짜 잘 치더라.”
“…….”
꿈이라고.
‘꿈이었나?’
현실이었는데.
‘근데 기타는 성호 형이 쳤던 거 아녔어?’
은혁은 내심 섭섭했으나 진짜로 의아해하는 현수에게 차마 무어라 더는 말할 수 없었다. 자신도 지금은 긴가민가했으니까.
꿈.
그래, 그 이후 몇 번 찾았던 덕진 공원. 그곳에서 다시 만나길 기대했던 수호령은 볼 수 없었다. 은후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꿈은 절대로 아니었던 것 같은…… 어?’
은혁이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가 화들짝 놀랐다.
“야, 야.”
“뭐?”
“저…… 저거 보여?”
“뭐가?”
은혁이 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고래가 날고 있는데?”
“바보냐. 고래가 하늘을 날기는 무……?”
현수가 은혁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이동시켰다. 그리고 화들짝 놀랐다.
“고, 고래?!”
고래가 하늘을 날고 있었다.
“어?”
두 눈을 몇 번이나 끔뻑이다가 현수가 실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야 씨. 너 때문에 나도 착각했잖아. 구름 모양 고래인데 무슨 진짜 고래처럼 소리치냐. 일부러 나 놀리려고 그랬지?”
그때.
은혁에게 령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 이제는 차츰차츰 괜찮아지다가 완전히 괜찮아질 거야. 아, 그리고 현수는 나 기억 못 할 거야.
령이 무어라 말을 좀 더 하려다가 밝게 자신의 의지를 짤막이 전달했다.
- 안녕. 건강해야 해?
은혁은 직감적으로 알았다.
자신에게 보내는 작별 인사라는 걸. 붙잡고 싶었다.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단이 은혁에게는 없었다. 령은 그런 은혁의 마음을 알아차렸지만 굳이.
‘한동안 더 친구로 지내려고 했지만.’
그냥.
지금 자신을 서서히 잊게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서.
꿈.
그래.
서서히 자신을 잊고.
건강하게 잘 지내길.
물론 은혁이 어떻게 자라서 어떤 사람이 될지는 령은 몰랐다. 먼 훗날 어떠한 이유로 범죄자가 될 수도 있었다. 다른 이들과 비슷한 보통 사람이 될 수도 있었고.
‘또 세상을 바꿀 사람이 될 수도 있겠지.’
그런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 나이.
‘그 가능성을 난 지켜 주고 싶어.’
아이니까.
그래.
아프지 않고 건강하고.
안전하기를.
행복하기를.
행복까지는 자신이 어떻게 해 줄 수는 없겠지만. 병이라거나. 안전이라거나. 그 정도는 조금은 도움을 줄 수 있으니까.
“다시 또 만나고 싶어!”
은혁이 본능적으로 소리쳤다.
- 기회가 닿으면. 또 언젠가.
서서히.
은혁의 눈에서도 하늘을 날던 고래가 구름으로 바뀌어 갔다.
“야.”
“어?”
“뭘?”
“구름 말이야. 진짜 신기하다. 어떻게 고래를 똑 닮을 수가 있냐. 저번에 본 다큐멘터리에서 나온 거랑 엄청 똑같아.”
“그래? 하여간 다큐멘터리 진짜 좋아해. 난 재미 없던데.”
그날 이후.
전북대학교 병원에 신세를 지고 있던 몇몇 아이에게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불치병이라고. 시한부라고. 혹은 극심한 고통으로 차라리 죽고 싶다고 말을 하던 아이들의 몸이 차츰차츰 회복되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에는 은혁과 현수도 포함되어 있었다.
* * *
전북대학교 병원에 들른 후 군산 앞바다로 향하는 길.
은후가 령에게 물었다.
“아까는 잠깐이라도 친구로 지낸다고 했잖아.”
“괜히 미련만 남을 거 같아서.”
“아쉽지 않겠어?”
“뭐어. 좋을 수도 있었겠지만. 아닐 수도 있으니까. 하늘에서 생각해 봤는데.”
령이 말을 잠시 멈췄다.
“그냥 지금이다 싶어 가지구.”
령이 활짝 웃은 뒤 외쳤다.
“가자! 바다로!”
고래 라온이 호응했다.
부우우우우우.
지금까지 조용히 뒤에서 자리를 지키던 도깨비가 일부러 크게 말했다.
“예전에도 비쌌는디 말여. 도자기가 요새도 그렇게 비싼감? 령이가 말하는 게 딱 도자기 같더만.”
도깨비의 말에 옆에 있던 연후가 호응했다.
“비쌀걸요? 특히 옛 물건은 더더욱 비싸죠. 문화재잖아요.”
“근디 도령이 힘만 쪼까 쓰면. 아니, 도령이 아니더라도 개구리나 임자가 힘 좀 쓰면 금방 찾지 않것나.”
“에이. 은후 씨나 이모님이 그렇게 눈치 없게 행동하려구요. 삼촌도 아니고.”
“허어. 나는 그럼 눈치가 없다는 말이구만?”
봄기운이 살랑거리며 겨울을 배웅하던 어느 날. 고래가 낙원의 주민을 싣고 군산 앞바다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