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2화
적당히 떨어져서.
조금씩.
조금씩.
하늘에서 춤을 추던 눈발이 잘게 떨었다. 주위 모두가 적당히 떨어져서일까. 아니면 곧 땅과 마주하면 사라질 자신의 운명을 짐작해서였을까. 눈발마저 춥게 느끼던 마지막 한파가 몰아치던 어느 날.
‘조용하네.’
정말로.
은후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연인인 이하연은 며칠간 집에 머물다가 서울로 올라갔다. 다음에 올 때는 좀 더 길게 있을 거라는 말과 더불어서.
- 다음에 같이 쇼핑가자.
- 쇼핑?
- 응. 그으.
- 그으?
이하연이 머뭇머뭇하다 쑥스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 속옷도 좀 같이 골라 줬으면 좋겠는데.
- 응? 속옷?
- 응.
- 어, 으응.
- 그럼 간다? 기왕이면 나보다는 은후 네 취향으로 입고 싶으니까. 잘 생각해 둬야 해?
다소 돌리기는 했으나 거의 직접적인 의사 표현이었다. 다음에 왔을 때는 정말로 단순히 잠만 자고 가지 않을 거라는. 기쁘면서 다소 무섭기도 했고 미안하기도 했다.
정말로 은후가 20대 초반의 청년이었다면 기쁘기만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신 연령만 따지면 몇 배는 훌쩍이었다. 그래서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들었다. 제일 큰 건 먼저 그런 말을 꺼내게 했다는 미안함.
‘분위기 봐서 적당히 말을 꺼내려고 하기는 했는데.’
너무 그 기간이 길어졌나.
육체관계는 연인이나 부부 관계에 있어서 무척이나 중요한 부분이었다. 즐거운 놀이이기도 했고 동시에 사랑을 확인하는 수단이기도 했으며.
“후우.”
은후가 생각을 멈추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춥네.’
은후가 서 있는 곳은 집의 베란다였다. 여느 때와 다르게 마나를 몸에 돌리고 있지 않았기에 은후로서도 추위를 강하게 느끼고 있는 상태였다. 고민거리가 있어서 몸을 일부러 차갑게 하고 있는 것.
‘하연이에게 아직 말해야 할 게 많은데.’
자신의 과거.
‘어렵네.’
어려워.
‘그나저나 한번 찾아가긴 해야겠어.’
일전 전주 승마장 스타더스트와의 만남을 계기로 연을 맺게 된 이원석. 연예계의 큰손이라는 그는 그 말이 허명이 아니라는 듯 은후의 정보가 알려지지 않도록 손을 쓰고 있다고 했다.
물론 단 한 사람이 적잖이 유명해진 은후의 정보를 언제까지 감춰 줄 수는 없을 터였다. 그러나 그 노력이 쓸모가 없지 않다는 건 지금 은후가 처한 환경이 증명했다. 아직까지 누군가가 찾아오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숨고자 한다면.’
은후에게는 굳이 도움이 없어도 되기는 했지만. 연인인 이하연이 문제였다. 또 어머니의 문제도 있었고. 물론 은후가 직접 나서면 그 문제들도 싹 다 해결할 수야 있겠지만.
‘좀 귀찮지.’
그 귀찮음을 지금 해결해 주고 있는 것이 이원석의 존재였다. 이하연에게 듣길 자신에게도 이모저모 신경을 써 주고 있다고 했다. 그때 전해 들은 말을 근거로 추론해 보자면.
‘아마 적잖이 힘을 쓰고 있는 것 같은데.’
스타더스트를 통하여 맺은 인연으로만 따진다면 이원석에게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은 장사일 터. 한 마디로 이 정도로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와줄 의리가 없었다.
‘다른 꿍꿍이가 있을까.’
잘 모르겠다.
‘일단 색안경을 쓰고 볼 필요는 없지.’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었고. 그 도움을 빌미로 뭔가 자신에게 요구한 적도 없었으니까.
‘만나 보면 알겠지.’
받은 게 있으니 선물이라도 하나 들고 찾아가야겠는데.
‘뭐가 좋을까.’
일단 술 몇 병을 챙기고.
‘그림을 좋아한다고 했었던가.’
몽골을 다녀오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을 때 이원석이 본인의 입으로 직접 그렇게 말했다.
- 취미라면 그림일까요. 아, 직접 그린다는 의미는 아니고 보는 게 취미입니다. 이따금 종종 경매장도 찾죠. 이런저런 작품도 소장하고 있으니 관심 있으면 언제 한번 놀러 오세요.
옆에 있던 전주 유지 이창석도 순수하게 그의 소장품에 관해 칭찬했다.
- 꽤 어렸을 적에 피카소의 그림을 사겠다는 꿈도 있었죠. 악착같이 돈을 벌었던 이유 중 하나였는데.
아직 그 정도까지는 감당하기엔 금액적인 면은 물론, 자신이 가진 이름값으로는 무리라고 말했다.
- 돈이 많아도 아무나 살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요새는 조선 시대의 그림으로 좀 눈을 돌리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역시 선물은 본인이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게 좋으니까.
‘그게 좋겠네.’
조선 시대의 그림.
마침 최근에 은후의 손에 들어온 조선 시대 그림이 있었다.
* * *
얼마 전.
도깨비와 구미호 부부는 낙원의 주민이 되기로 한 뒤에도 한동안 용산의 가게를 유지했다. 하지만 덕진 공원의 뒷골목에 가게를 차린 뒤 아예 그 자리를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 거 자주 가기도 귀찮으니께.
매번 은후나 개구리에게 부탁하는 것도 그랬고.
- 그렇다고 아예 없애는 건 또 아쉬운디. 별장으로 쓰면 어떨까 혀.
- 별장이라. 그거 좋네요.
- 그렇제.
- 아니면 더 좋은 생각 있음 다른 방도로 사용해도 좋고.
은후와 도깨비가 이러한 대화를 나눌 당시. 옆에 있던 구미호가 말했다.
- 이번 기회에 창고도 싹 정리해요.
- 으. 귀찮은디.
- 이때 아니면 언제 하려고요?
- 끙. 거야 그렇제.
그렇게 시작된 대대적인 이사.
- 오. 요게 여기 있었구만.
- 뭔데요?
- 그림 말여.
- 그림요? 어디 봐봐요.
창고에서 발견된 그림들.
- 이거 그때 안 버렸었네요?
- 으잉?
- 여보?
- 아하. 아니. 이게 그래도 좀 많이 귀한 것인디.
- 여보오?
춘화도였다.
- 그, 큼.
야한 그림.
물론 단순히 야한 그림을 가졌다는 거로 구미호가 도깨비에게 무어라 하는 건 아니었다.
- 다른 춘화도는 몰라도 저 춘화도는 제가 버리라고 했던 것 같은데요?
- 거어. 큼큼. 버리긴 아까서 그랬제. 그래도 그 말 이후로 한 번도 안 꺼내 봤당께. 아! 거 도령에게 주면 되것구만!
급하게 그 상황을 모면하고자 도깨비는 은후에게 구미호가 무어라 하는 춘화도와 더불어 몇 점의 그림을 더 얹어서 안겨 주었다. 이사를 도와주는 수고비라면서.
- 그냥 춘화도 하나로는 정이 없잖으.
이런 말과 함께.
나중에 구미호에게 듣기로 그 춘화도의 모델이 된 게 자신의 연적이었다고.
- 저 이가 저래 보여도 구미호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거든요.
알고 보니 그 춘화도를 그린 주인공은 신윤복이었다. 소위 조선 3대 풍속 화가라 불리는 세 사람 중 한 명. 자세한 건 모르지만 은후도. 아니, 대한민국의 정식 교육을 받은 이라면 알 수밖에 없는 이름 석 자.
- 그이가 본인에게 직접 받은 거고, 이제는 그 소유권이 도령에게 넘어갔으니 알아서 하세요. 개인적으로 저 춘화도는 아예 태워 버리고 싶은 마음이 있기는 한데요. 그럴래요?
평소와 다르게 날카롭게 반응하는 구미호에게 은후는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본디 문화재라면 국가에 귀속해야겠지만.’
이 경우는 달랐다.
소유권이 명확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본인에게 직접 받았다, 라.’
신윤복은 조선 영조 시대에 태어난 사람이니까.
‘나이가 몇 살이지?’
도깨비와 구미호가 나이가 많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둘 다 구체적으로 몇 살이라고 들은 적은 없었다. 구미호는 여자의 나이를 묻는 건 실례라며 답하지 않았고, 도깨비는 자신의 나이를 잊었다고 했다. 도깨비의 경우는 말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진짜로 몇 살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정확히는 신경을 아예 안 쓰는 느낌이랄까.
‘굳이 중요한 건 아니지만.’
그런 일이 있었다.
* * *
그렇게 얻게 된 조선 시대의 그림들. 개중 하나를 은후는 선물로 가져가기로 했다. 그래도 선물로 받은 것이어서 혹시 몰라 도깨비와 구미호에게 물었다.
그때 받은 그림 한 점을 선물로 사용해도 되겠냐고. 그러니 도깨비와 구미호는 의아한 목소리로 은후에게 물었다. 이미 준 것인데 어째서 자신들에게 사용처를 묻느냐면서.
- 거 이미 줬으니 어따 쓰는지는 도령 맘이제. 안 그려 임자?
- 그럼요.
확실히 이런 면에서는 보통 사람과의 차이가 있었다. 아무리 선물이라지만. 굳이 선물이 아니더라도 호의로 준 물건을 멋대로 남에게 준다는 건 대개 기분 나쁠 법한 일인데 말이다. 그러지는 않겠지만 은후가 심심하다는 이유로 받은 그림을 불에 태우거나 호수에 던져도.
‘구미호와 도깨비는 그러려니 하고 말 것만 같은데 말이야.’
아마도.
진짜로.
물론 은후는 굳이 직접 실험하고 싶지는 않았다.
“오셨구려.”
오늘 이원석과 만나기로 한 곳은 이창석의 집이었다.
겸사겸사였다.
은후는 술과 관련된 사업에 있어서 이창석에게 많은 도움을 받고 있었기에 이번에 감사를 표하고자 마음먹었다. 물론 사업이 잘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은후의 능력에 있었다.
마법으로 만든 술.
하지만 만드는 것과 판매하는 건 또 다른 일이었다. 은후는 이창석 덕분에 만드는 것 외에는 사업적으로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그건 분명히 도움이었다.
“잘 지내셨나요?”
“나야 잘 지냈지요. 선생께서는요?”
“저도 잘 지냈습니다.”
“그래요? 요새 너무 유명해져서 곤란을 겪을 뻔했다고 하던데요.”
“오늘까지는 별일 없었습니다. 안쪽에 계신 분 덕분에요.”
이창석이 방 안쪽을 흘끔 바라보며 한숨을 푹 내쉰 뒤 소리쳤다.
“거 얼른 안 나오나!”
“왜?!”
“은후 선생 왔네!”
“벌써?!”
방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원석이 나타났다. 옷에 묻어있는 고양이 털과 한 손에 들린 고양이 장난감에 은후는 무심코 웃음이 흘러나왔다.
“고양이랑 놀고 계셨군요.”
“허, 큼.”
“저 친구 보기와 다르게 고양이를 참 좋아합니다. 그렇다고 또 키우지는 않는 게 한 생명을 책임지기는 자신이 없다나요?”
“정확히는 귀찮은 것이지.”
“쯧. 귀찮기는 무슨. 자네 아직도…….”
“거거. 쓰잘데기없는 이야기는 그만하고.”
뭔가 사연이 있는 것일까.
“그나저나 저를 보고자 하셨다고요.”
“네. 빙빙 돌려서 말하는 걸 싫어하시니 단도직입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감사를 표하려고요. 많이 부담되었을 텐데요?”
이원석이 잠깐 고민하다 답했다.
“솔직히 그렇습니다. 저도 돌려 말하지 않겠습니다. 선생도 빙빙 돌리는 거 싫어하시죠?”
“필요하다면 돌려서도 말하지만요.”
이원석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한 마디로 투자였죠.”
“투자요?”
“네, 투자요. 사람에 관한 투자지요. 언젠가 제가 곤란에 처하면. 혹은 어떤 일에 관하여 부탁한다면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이 친구에게 들은 게 이것저것 좀 있거든요.”
“선생께서 오해할까 봐 그러는데 저는 딱히 별말은 안 했습니다.”
“그렇죠. 그러나 그 약간의 이야기만으로도 저에겐 충분한 근거가 되었습니다.”
스타더스트와 관련하여 몽골에서 은후가 가진 비밀의 편린을 아주 살짝이나마 엿본 것까지 더해져서 말이다.
“거기에 개인적으로 가진 호감도 있고요.”
“만약 제가 훗날 부탁을 거절한다면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사람을 잘 못 본 제 눈을 탓해야죠.”
“그렇습니까.”
“투자가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열을 투자하면 한 명 건지기도 힘든 분야니까요.”
옆에 있던 이창석이 한마디 거들었다.
“나는 열이 아니라 백을 투자해서 한둘이라도 건지면 남는 장사라고 보고 있네만.”
“그러니 신중해야지.”
“쯔쯧. 신중을 기해도 그게 마음대로 되나.”
“사람만 한 투자처도 없어. 리스크는 크지만 리턴도 높으니 말이야.”
“그에 관해서는 더는 할 말 없네. 그건 가치관 차이니.”
“자네도 하지 않았나?”
이원석이 눈짓으로 은후를 가리켰다.
“선생은 우연과 우연이 겹쳐서 그런 것이고.”
“그 우연을 필연으로 만드는 게 말이야.”
이어지는 대화에서 은후는 두 사람이 생각보다 퍽 친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은후는 적당한 타이밍을 잡아서 말했다.
“두루뭉술하게 언젠가 제가 도움을 드리겠다. 이런 건 제 성격에 맞지 않아서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선물이라고요.”
두 사람의 눈이 호기심으로 빛났다. 다른 이도 아니고 은후의 선물이라니. 대체 뭘까. 단순히 돈으로 살 수 있는 건 아닐 것 같은데. 그리고 그 예상은 적중했다.
“기, 김홍도의 그림이요?”
은후가 준비한 건 김홍도의 영모화 두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