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9화
한창 준비 중이던 덕진 공원의 축제는 중지되었다.
정확히는 미뤄졌다.
이유는 단순했다.
아픈 동물이 있으니까. 좀 더 정확히는 령이 신경 쓰고 있는 아픈 동물 고래. 령은 그 고래가 신경이 쓰여서 축제를 즐길 기분이 아니었다. 애초에 축제가 령을 위한 것이었으니 잠정적으로 미뤄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이가 아니니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텐데.’
개구리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령도 너무 착하다니까. 그래도 은후와 이름을 교환하기 이전이었다면 굳이 동물까지 신경을 안 썼을 것 같기는 한데.’
나쁜 변화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좋은 변화냐고 물으면 개구리로서는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다만 믿는 건 은후의 존재였다. 은후가 령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것을 내버려 두지는 않을 거리는 신뢰가 있었기에 개구리는 그러려니 했다.
‘게다가 지금은 부정할 수 없는 인간의 시대니까.’
그런 시대였다.
세상을 지배하는 건 인간이었다.
듣자 하니 고래는 인간들이 쳐 두었던 그물 때문에 죽음의 문턱에 다가갔다고 했다. 의도적으로 그런 건 아니었다. 그러니 불행한 사고였다. 재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운이 좋았네.’
저 고래는.
은후와 령을 만나서 목숨을 건졌다. 하기야 그렇게 따지면 자신을 비롯한 낙원의 주민 모두가 운이 좋았다고 할 것이다. 은후를 만나서 좋지 않은 일이라곤 없었으니까.
“그래서 령이는 저 고래를 치료해 주려는 거야?”
“응.”
개구리의 물음에 령이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못 봤다면 모르겠지만. 아, 그렇다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니야. 은후가. 어, 혹시라도 은후에게 부담이라면…….”
“딱히 부담은 아니야. 그리고 노력은 해 보겠지만 장담은 할 수 없어.”
“응. 그러면 어쩔 수 없지.”
“그래.”
은후가 희미하게 웃으며 마나를 움직였다.
‘일단 기초적인 조처부터.’
할 수 있는 만큼.
‘호수를 이용할까.’
오면서 살펴본 바. 마나를 직접 넣어서 뭔가 조처를 하기엔 고래의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처음부터 호수를 중간 다리 삼는 게 좋겠어.’
은후가 호수에 마나를 불어 넣었다. 그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 건 개구리였다. 물과 가장 밀접했으며, 덕진 공원의 호수를 반쯤 자신의 집처럼 이용하고 있던 개구리였기에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만약 은후가 숨기고자 작정했다면 모르겠지만 그것도 아니었으니.
“호수에 치유의 힘을?”
“틀린 말은 아니네.”
“에이. 딱 봐도 치유의 힘인데.”
“비슷한 느낌이지만 달라. 설명해 줄까?”
다소 짓궂은 말투.
반은 장난이었다. 하지만 반은 진심이었다. 개구리는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꼭 알아야 하는 게 아니라면 굳이. 머리만 아플 것 같은데.”
“뭐.”
은후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나저나 고래는 뭘 먹고 살아?”
“글쎄.”
개구리의 질문에 은후는 곧바로 답할 수 없었다.
‘언젠가 다큐를 본 것 같은데.’
은후가 기억을 더듬은 후 말했다.
“플랑크톤, 새우, 물고기, 두족류 정도.”
“두족류?”
은후는 두족류의 정의를 말하려다가 픽 웃은 후 개구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예시를 들어 주었다.
“문어, 오징어, 조개, 낙지 같은 애들.”
“문어랑 오징어가 애들이야?”
“하여간.”
“내가 좀 잡아 와야 하려나.”
“령이랑 나들이라도 다녀오던가.”
“그럴까?”
입을 꾹 다문 채 호수 위에 둥둥 뜬 채로 잠들어 있는 고래를 바라보던 령이 답했다.
“아냐, 다음에. 고래가 좀 회복되면.”
“그렇다면야.”
“그, 너무 서운해하지 말고.”
“으흠.”
개구리가 머쓱하게 웃으며 물었다.
“티 났어?”
“쫌. 오늘만 날이 아니잖아. 이제는 수호 때문에 멀리도 나갈 수 있으니까.”
옆에서 잠자코 귀를 기울이고 있던 도깨비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개구리에게 말했다.
“거 나이 차이가 얼마인데 령이 더 어른이여?”
“으.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는디요.”
“내 말투를 따라 하는 건감?”
“뭐어.”
“하여간. 쯧쯧. 거 정 심심하면 나랑?”
“좋죠.”
“좋기는 무슨. 낚시는 한가할 때 같이 가는 거로 하고. 힘을 좀 써서 적당히 가져오는 게 좋것어. 저 덩치도 덩치고. 아프면 양껏 먹어야제.”
개구리가 아리송한 표정으로 물었다.
“얼마나 가져와야?”
“크흠. 낸들 아나? 근디 내 궁금해서 그러는디. 언제는 반말이고 언제는 존댓말이여? 계속 그래도 딱히 상관은 없는디.”
개구리가 도깨비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공원 호수로 폴짝 뛰어들었다.
“저저 아무 말 없이 사라지는 싸가지는.”
“너무 그러지 마세요. 개구리만큼 당신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죠.”
구미호가 오른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가볍게 웃었다. 도깨비가 콧방귀를 뀌며 답했다.
“사람은 당연히 아니제.”
“하여간 개구리가 당신 적잖이 많이 신경 쓴다고요?”
“허어. 그려?”
“네. 티를 안 내서 그렇죠.”
“큼. 거 그나저나 도령하고 령이 배는 안 고픈감? 멀리 나갔다 왔는데 뭐 안 먹었으면 식사라도 해야제.”
은후가 핸드폰의 문자를 확인한 다음 말했다.
“저는 여자 친구가 기다리고 있어서요.”
“애인 말이제. 저번에 같이 왔던?”
“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제. 령이는?”
“나는 먹을래. 그런데 여기서 먹어도 돼? 좀 더 지켜보고 싶어.”
령의 시선은 여전히 고래에 닿아 있었다. 도깨비는 고래를 잠깐 바라본 다음 은후에게 눈짓하며 답했다.
“안 될 건 없제?”
은후가 픽 웃으며 맞장구쳤다.
“그럼요. 뭘 그런 걸 신경 써. 그리고 일단 이대로 내버려 두면 될 거야.”
일단 해야 할 조처는 끝냈다.
‘다만 모르겠네.’
살아날 수 있을지.
단순히 시간만 끄는 것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회복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고. 참으로 애매했다.
‘패밀리어로 삼는다면 확실해지겠지만.’
굳이.
‘아.’
패밀리어라.
‘흐음.’
그런 방향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공원을 수호하는 존재를 하나 더 늘린다, 라. 천도 복숭아나무인 수호가 있기는 하지만.’
고래라.
고래.
‘나쁘지 않겠는데?’
물론 중요한 건 령과 수호의 의사.
더불어 고래의 의향이겠지만.
‘당장 계약을 하지 않으면 고래가 죽을 것도 아니니까. 일단 의사만 물어봐 둘까.’
은후가 천도 복숭아나무 수호에게 마나를 통해 의지를 전달했다.
‘령에게는 내일 즈음에 물으면 되겠어.’
구체적으로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머릿속이 복잡한 것 같으니. 일단 내버려 두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 * *
은후가 자리를 비운 사이. 이하연은 최종적으로 뮤직비디오를 검토한 후 자신의 브이튜브 채널에 업로드했다. 그리고 바로 잠에 들었다. 누가 업어 가도 모를 만큼.
“어우.”
몇 시지.
‘진짜 푹 잤네.’
오랜만이었다.
이토록 편안하고 깊게 잠을 잔 건. 그간 부담감 때문에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아니었다. 전부 은후 덕분이었다.
‘내 편. 내 편.’
세상이 등을 돌려도.
‘언제나 내 편일 거라고 그랬어.’
사람이라면 자신을 진지하게 지지해 주며 믿는 이가 있다는 건 큰 힘이 되는 법. 하물며 그게 연인이라면 더더욱. 그래서 이하연은 부담감을 떨칠 수 있었다.
물론 완전히 부담감을 없앨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전처럼 부담감에 짓눌려 죽을 정도가 아니었다. 적당하달까. 적당한 긴장감이나 부담감은 오히려 도움이 되는 법.
‘으. 그래도 긴장되네.’
댓글 반응은.
사람들은 무어라 말하고 있을까.
‘이따 은후랑 같이 확인해야지.’
댓글을 확인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은후였다.
‘저녁은 같이 먹기로 했으니까.’
이하연은 얼마 전부터 요리를 연습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이하연은 요리를 거의 해 본 적이 없었다. 해 봤던 거나 할 수 있는 요리라고는 라면이나 간장 계란밥 정도. 사실 그런 걸 요리라고 할 수나 있는지 의문이었다.
굳이 요리를 해야 할 환경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밥을 해 주거나 사 먹으면 그만이었으니까. 딱히 요리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없었고.
그러다가 처음으로 요리를 하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일전 은후에게 요리를 대접받았을 때. 나도 연인인 은후에게 요리를 해 주고 싶다고.
‘냉장고에 재료가 딱히 뭐가 없네.’
그런 생각을 자연스레 가지게 된 이후 열심히 연습했다. 요리라는 게 보는 것과 다르게 막상 직접 하게 되니 너무 어려웠다. 그래도 하다 보면 익숙해지는 법.
부단히 연습한 결과 몇 가지 요리는 가족은 물론, 친구들에게서도 합격점을 받아 낼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갑자기 왜 요리를 시작했냐는 질문을 받고.
‘으.’
딱히 숨길 이유는 없어서 솔직하게 답한 다음 묘한 눈초리를 받기는 했지만 말이다.
‘근처에 분명히 대형 마트가 있었지.’
이하연은 씻은 뒤 가볍게 차려입고 L 마트로 향했다.
‘버섯이…… 아, 저기다.’
그렇게 이하연이 된장찌개를 끓일 재료를 고르고 있을 때.
“누구……?!”
뒤에서 갑자기 뻗어 온 손길에 이하연이 깜짝 놀랐다. 하지만 이내 당황스러운 감정은 반가움으로 바뀌었다.
“미안.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했는데 너무 놀랐나 보네.”
은후였다.
“진짜로 놀랄 뻔했잖아.”
“안 놀랐단 소리네?”
놀람보다는.
“바보.”
반가운 감정이 컸다.
“그런데 여기에 나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감……은 아니고.”
은후가 잠깐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반지.”
“반지?”
이하연이 자신의 왼손 약지에 껴 있는 커플링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반지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거든.”
“그게 무슨…….”
농담이라기엔 퍽 진지한 말.
“……정말로?”
“정말로.”
“그, 내게 말해 주겠다던 비밀 중 하나야?”
“관련이 있지.”
상식적으로 믿을 수 없는 말.
하지만 이미 상식으로 재단할 수 없는 일을 이하연은 실제로 겪었다. 지금도 떠올리면 꿈이라도 꾼 게 아닐까. 누군가에게 털어놓는다면 분명히 말도 안 된다고 치부할 말하는 개구리.
“믿을게. 더 할 말은?”
“나중에. 차근차근.”
“좋아. 그럼 일단 쇼핑부터.”
“음식 재료 사고 있었던 것 같은데.”
“응. 된장찌개 끓여 주려고.”
“하연이 네가?”
은후는 이하연이 요리에 관심이 없다는 것도, 할 줄 모른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과거의 이야기였다.
“연습 많이 했으니까?”
“하면 한 거지 왜 의문형이야.”
“하여간 된장찌개는 이제 잘 끓일 줄 알아.”
“기대해도 되겠네?”
“아마도?”
이후 은후와 이하연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마저 쇼핑을 마쳤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이하연이 된장찌개를 끓였다. 다른 요리는 해 주고 싶어도 아직 실력이 부족해서 적당히 마트 내에 있는 반찬 가게에서 사 왔다.
“열심히 연습했어. 은후 너한테 요리해 주려고. 잘했지?”
“잘했네.”
은후가 빙긋 웃었다.
보글보글.
식탁 위에서 끓어오르고 있는 찌개의 하얀 연기처럼 이하연의 마음도 그랬다. 처음으로 연인에게 대접하는 요리였으니까. 긴장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다.
“맛있다.”
“정말로?”
“응. 빈말 아니야. 만약에 맛이 없다면 없다고 했을걸?”
“그럴 때는 빈말이라도 해 줘야지.”
“평생 먹을 건데. 그럴 수는 없지.”
“…….”
태연하게 내뱉는 말의 내용에 이하연이 쑥스럽게 웃었다. 이제는 조금은 적응이 된 은후의 설레는 말. 하지만 적응이 되었어도 가슴은 세차게 뛰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이하연의 뛰는 가슴만큼 인터넷의 한쪽에선 난리가 난 상태였다. 이번에 이하연이 공개한 뮤직비디오가 적잖은 사람들의 마음을 진동시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