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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의 인생 룰루랄라-157화 (157/170)

제157화

덕진 공원에 달빛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벽진 폭포 근처에 있는 천도 복숭아나무에.

수호령이 말했다.

- 나는 아이들을 돕고 싶지만 그걸 드러내고 싶지 않아. 아니, 안 그러고 싶어. 결국 나는 사람이 아니니까.

본격적으로 이름을 주고받기 전.

수호령은 끊임없이 고민했다.

아이를 위한 존재인데.

어떻게 존재를 해야 할까.

이전에는 돌이켜보지 않았던 자신의 본질에 관하여. 은후가 근래에 던진 이런저런 물음으로부터 촉발된 자아 성찰.

- 은후가 물었었지.

- 아이를 위하는 건 좋은데, 어떠한 아이를 돕다가 주위의 미움과 원망을 산다면?

- 그 아이를 돕는 게 정말로 올바른 걸까?

- 아이는.

- 어떤 아이는.

- 아이도 개인마다 너무 다르니까.

아이라고 하여도 그 기준은 또 어떻게 둬야 할까. 지금까지는 그저 마음 가는 대로. 적당히 내키는 느낌에 따라서.

- 그런데 굳이 명확한 기준을 내가 세워야 하나.

거듭된 고민 속에서 수호령은 결국 결론을 내지는 않았다.

- 그냥.

마음 가는 대로.

굳이 결론이라면 그랬다.

- 돕고 싶으면 돕고. 혹여 그 도움이 주위의 원망을 사더라도 내가 감내해야지. 그 원망 또한. 그 원망을 풀 수 있다면 좋겠지만 설령 그럴 수 없더라도.

어느 정도는 은후도 수호령의 가치관에 관하여 알고 있었다. 그거야 당연했다. 모를 수가 없는 게 현대로 돌아와 수호령과 알게 된 이후 짧다면 짧은 시간이나 그건 매우 짙은 기간이었으니. 그리하여 달을 선택했다. 되도록 드러내지 않고서.

- 왜냐하면 난 사람이 아니니까. 인간 사회에서 동떨어져 있는 건 사실이니까.

그래서 달이었다.

어둠 속에서 환히 빛나지만 결국 태양에 가려져 있는.

- 나는.

천도 복숭아나무가 달의 기운을 흡수하여 은후의 인도에 따라 수호령에게 전했고. 그 사이 수호령의 머리에는 그간 했던 고민과 더불어 자신이 살아왔던 삶이 솟구쳤다.

“령.”

은후가 짧게 말했다.

마나에 계약의 의미를 담아.

“령(寜).”

수호령의 령(靈)이 아니라.

편안할 령(寜)이었다.

은후는 고민했다. 수호령에게 어떤 이름을 지어 주어야 할지.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령이라는 단어 외에 생각나는 게 없었다. 저 하늘의 빛나는 별의 이름도. 이세계에서 유명하거나 역사가 깊고 의미가 가득한 이름들도. 전부 아닌 것 같았다.

령이라는 애칭이 너무 굳어진 탓일까. 잘은 모르겠지만 령이는 령이어야 할 것 같아서. 하지만 기존의 수호령에서 비롯된 신령이란 의미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령(寜).

편안하게 한다는 의미를 담아서.

“아.”

이름을 받았다.

그로써 은후와 수호령 사이에 연결 고리가 생겨났다. 간접적으로 낙원이라는 땅으로 연결되어 있던 고리가 더욱 단단해졌다. 그 사이에 천도 복숭아나무가 자리 잡았다.

그 순간 천도 복숭아나무에 정체성이 깃들었다. 지금까지는 그저 나무로. 존재하는 것만으로 족했다면 이제부터는 수호령을 위해서 존재하게 된 것이다.

천도 복숭아나무도 이전까진 수호령과 간접적으로 연결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자신의 존재가 있었다. 그저 존재하는 것. 그게 목적이었다면 지금은 반대가 되었다.

수호령이 먼저이고.

다음이 자신.

굳이 따지자면 수호령을 위한 수호목이 된 것.

“령아.”

“응.”

“네가 이름 지어 줄래?”

“천도 나무에게?”

“그래.”

수호령이 고민했다.

“그러면 수호가 좋겠어. 수호령이란 거. 이름이면서 이름은 아니었어도 뜻은 마음에 들었었거든. 지금 내가 령이니까. 편안하게 할 수 있을 테니까. 나무는 아이를 지켜 주고. 어, 나도 은후도 개구리도. 도깨비 삼촌이랑 구미호 이모하고…….”

천도 복숭아나무가 스스로 흔들렸다.

동시에 달빛이 퍼져나갔다.

덕진 공원 사이 사이에.

공원에 심어진 나무.

공원에 지어진 다리.

공원의 폭포.

그러다가 공원 전체에.

당연히 호수에도.

호수에 내려앉은 달빛이 흔들렸다. 비유가 아닌 그대로 호수에 떠 있는 달빛은 물결에 반사되어 허공으로 흩어졌다.

“아.”

환상적이었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감탄이 나오는 광경.

허나 은후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은 이유는 다른 데에 있었다.

‘마나가.’

얽히고설킨 마나가 스스로 규칙을 띄우고 있었다.

‘중심은 천도 복숭아나무 수호.’

의미대로 지키고 보호하는 것.

그 대상은 령이가 바랐던 존재들.

은후를 비롯한 낙원의 주민들과 앞으로 이곳에 올 아이.

‘그런가.’

정령은.

‘…….’

은후의 마나가 들썩였다.

지금까지 은후가 현대로 돌아와 쌓아 왔던 깨달음이 토대가 되어서.

몇 번인가 기회가 있었다. 깨달음을 얻어 마법사로서 다음 단계로 나아갈. 하지만 근래에 운명의 장난인지 아니면 우연인지 몇 번이나 그 기회를 놓쳤다.

아쉽지 않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었다. 여전히 마법사로서 성장하고 싶은 욕구는 남아 있었으니까. 그러나 딱히 미련은 없었다. 굳이 애를 쓰지 않아도 언젠가는.

노력하다 보면 결국.

‘노력이 항상 보답하는 건 아니니 그럴 수 없다면 어쩔 수 없는 것이고.’

버리면 얻는다고 했다.

미련을 버렸고.

오늘도 딱히 기대하지는 않았다.

술자가 아닌 정령의 본질과 의지를 존중하며 이름으로 계약하는 과정에서 무언가 얻는 건 있겠지만 그걸 통하여 경지의 상승을 노리진 않았다. 그런데 계기가 되었다. 이미 바탕은 충분했으니.

‘한층 성장하는가.’

마법사로서.

‘그럼에도 끝이 아니라는 게 놀랍네.’

그래도.

‘끝을 바라볼 수는 있겠어.’

마법사로서.

은후에게 중요한 순간이란 걸 알아차린 령이 소망했다.

아무런 일이 없길.

어떠한 방해도 없길.

나에게 소중한 존재에게.

천도 복숭아나무 수호가 수호령의 바람에 응답했다.

* * *

아침이 밝았다.

“으음.”

은후의 후배 임서혁은 한 달 전부터 운동을 시작했다. 이유는 별거 없었다. 살이 찐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놈의 술이 문제지.’

처음에는 별 신경을 안 썼다. 애초에 마른 타입이기도 했다. 하지만 한 달 전 자주 입던 청바지가 꽉 끼는 걸 느낀 뒤 심각함을 인지했다. 그래서 매일 아침 달리기를 시작했다.

장소는 그때그때 달랐다. 어떨 때는 대학교 운동장. 또 언제는 대학교에 학생을 위해 마련된 헬스장의 러닝머신. 오늘 같은 경우엔 덕진 공원으로 코스를 짰다.

‘그런데 뭐지.’

왠지 모르게 덕진 공원 안으로 들어가기가 꺼려졌다.

‘오늘은 동물원으로 갈까.’

그렇게 덕진 공원을 목적으로 하려던 사람들이 전부 발길을 돌렸다. 심지어 덕진 공원을 일터로 삼고 있는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갖은 핑계를 대면서라도.

천도 복숭아나무 수호가 행한 조치였다. 은후가 깨달음을 얻고 경지를 높이는 과정에서 사소한 방해라도 받지 않게끔. 그 조치가 해제된 건 해가 중천에 떠오를 무렵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은후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꽤 지난 것 같은데.’

망부석처럼 서 있던 은후가 기지개를 켰다. 그에 조용히 자리를 지키던 령이가 물었다.

“정신 차렸어?”

“계속 옆에 있었어?”

“그럼. 수호하고 같이 지키고 있었어.”

“고마워.”

이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 둘. 그 광경에 멀찍이 떨어져 숨을 죽이고 있던 낙원의 주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

개구리가 말했다.

“그래서 우리 령이 이름은 뭐로 지어 줬어?”

“령.”

“응?”

“대신에 신령이 아닌 편안하다는 의미에서.”

“아하. 편안할 령이라. 앞으로도 령이라고 부르면 되겠네?”

“의미가 다르다는 걸 확실히 인지한다면.”

개구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도 복숭아나무의 이름은 수호고.”

“나무에도 이름을?”

“내가 지어준 게 아니라 령이가.”

“오호.”

개구리가 눈빛을 빛냈다.

“도령이 아니라 령이와 말이지.”

“그래. 그러니까 미래에 내가 죽는다고 해도 낙원에 별문제가 없을 거야.”

“으잉? 거 갑자기?”

“갑자기라니.”

“도령이라면 앞으로 몇백 년은 살 텐데? 그런 걱정은 너무 이른 거 아닌가.”

옆에 있던 도깨비가 맞장구쳤다.

“거 고렇치. 도령이라면 충분히 가능할턴디?”

“가능이야 하겠죠. 마음만 먹는다면 말입니다.”

은후의 말에 순간적으로 분위기가 싸해졌다.

“거 그런 마음이 아니란 소리로 들리는디 말여.”

“잘 모르겠습니다. 그럴 마음을 먹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다만 사람 일은 모르는 거 아니겠습니까. 어떤 사고로 제가 죽을 수도 있고요. 대비는 해 놓아야죠.”

“무서운 소리를 하는구먼. 근디 도령이 사고로 죽을 사람은 절대 아녀.”

은후가 어깨를 으쓱였다.

“은후야.”

“응?”

“빨리 죽으면 안 돼.”

“…….”

심각하게 말하는 령이의 모습에 은후가 쓰게 웃었다.

“그래.”

이래서야 원.

‘수명이라.’

그래.

마음만 먹는다면 몇백 년이야 대수일까. 하물며 이번에 얻은 깨달음 덕분에 살아갈 날은 더더욱 늘어났다. 하지만 이은후라는 인물로서 사회에 존재할 수 있는 기간은 칠팔십 년이 한계일 터.

‘그즈음에 죽을까도 했었는데.’

확정은 아니었고 고민만.

그런데.

‘이래서야 안 되겠네.’

은후가 쓰게 웃었다.

‘하연이는.’

어찌한다.

다행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한 명 정도라면 자신과 비슷하게 수명을 늘리는 일 정도는 이제는 가능할 것 같았다. 이번에 높아진 경지 때문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힘들었을 것이다.

“그나저나 오늘은 축제여!”

“축제요?”

“고럼. 도령에게도 좋은 일이 생겼고. 령이도 정식으로 편안하다는 의미에서의 이름을 받았고. 이만큼 기쁜 날이 어디에 있것어? 임자도 그렇게 생각하제?”

“어머. 그럼요. 아예 오늘을 매년 기념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요. 몇 번인가 축제를 열었지만 우리만을 위한 축제는 없었잖아요? 령이는 어떻게 생각하니?”

“나는 좋아!”

은후가 픽 웃었다.

축제라.

“이따가 저녁에 돌아오겠습니다. 그때까지 축제 준비는 맡겨 놓아도 되겠죠?”

“으잉?”

“연인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서요.”

“흐. 거 참. 연인이라니 뭐라고 할 수도 없구마.”

“축제에 불참하겠다는 건 아니니까요.”

“거 연인이라는 규수도?”

“아마도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

“그래도 그 전에. 령아.”

“응?”

“바다. 보러 갈까? 잠깐이라도.”

“지금?”

“약속했잖아. 게다가 지금이라면 알겠지?”

“으응.”

자신이 자리를 비워도.

덕진 공원에 오는 아이라면 수호가 지켜 줄 것이란 걸.

“어떻게 할래?”

“갈래.”

“같이 가실 분?”

“거 눈치 없게 우리가 끼어들면 안 되제. 우리는 축제나 준비하고 있을랑게.”

은후가 피식 웃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은후가 이하연에게 문자를 남긴 뒤 령이와 함께 하늘을 날았다.

목적지는 익산에서 가까운 바다였다.

“생각해 보니 내 고향은 익산이라고 그랬잖아.”

“그랬지?”

“거기에는 바다가 없어.”

“그러면?”

“가까운 곳이 군산인데. 그쪽에 가야 바다를 볼 수 있거든. 아까 이름을 주고받으면서 잘못 말한 거 같아서 말해 주는 거야.”

“은후도 실수할 때가 있었구나?”

령이 해맑게 웃었다.

“나도 사람인데.”

“사람인 건 아는데 그래도 실수하지 않은 사람인 줄 알았는걸.”

은후가 피식 웃었다.

“나도 실수해. 가끔은.”

“가끔이라기엔 거의 안 하던데.”

“말꼬리 잡기는.”

“잡을 수도 있지.”

이름을 주고받고 연결되어 좀 더 친밀해진 탓일까. 령의 말엔 이전보다 더 친근감이 깔려 있었다. 그렇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은후와 령은 군산 앞바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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