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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의 인생 룰루랄라-156화 (156/170)

제156화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고 잠깐 남는 시간 동안. 이하연은 해외로 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다. 앞으로 공무원이 된 이후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 긴 시간 여행을 떠나기는 무척 힘들 테니까.

그래서 그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모아 놓았던 돈을 탈탈 털어서 유럽으로 떠났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서 싱가포르나 홍콩 등. 가까운 데를 여행했었다.

그 시기 잔뜩 해외에 관한 관심이 생겼다. 그 와중에 이하연이 가장 눈여겨봤던 곳 중 하나는 볼리비아의 유우니 사막이었다. 세계 최대의 소금 사막.

우기에 비가 내린 후 바닥에 깔린 빗방울에 하늘이 비친 풍경. 그 풍경을 꼭 보고 싶었으나 시간과 안전 등.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사진으로만 만족했던 곳.

‘……꼭 유우니 사막이 이랬을까.’

아니.

‘좀 더 멋진 거 같은데.’

적어도 사진으로만 봤던 유우니 사막보다는.

아침 햇살과 하늘은 비슷했을지 몰라도 거대한 천도 복숭아나무의 존재감은 누구라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풍경을 준비한 건 개구리의 아이디어였다.

일전 은후가 이하연과 덕진 공원에서 데이트하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을 때 유우니 사막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는데 그걸 기억해 내고선.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개구리가 물을 다루는 데에 많은 재주가 있었다는 것. 더불어 덕진 공원에 있는 호수의 존재와 호랑이 신선의 능력이 있었기에 즉석으로 준비할 수 있었다.

“꿈……은 아니겠지?”

“꿈 같아?”

“응. 뭔가 기나긴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야.”

“아까 손등 꼬집던데.”

“으. 봤어?”

“그럼.”

이하연이 부끄럽게 웃었다. 은후가 피식 웃으며 이하연의 손을 자신의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가볍게 손등에 입맞춤한 뒤에 말했다.

“촉감이 살아 있잖아. 꿈은 아니라는 거지.”

“……알거든.”

그래도 기왕이면.

‘입술에.’

손등에 하는 키스도 물론 좋지만. 그래서 이번엔 이하연이 용기를 내어 은후에게 다가갔다.

* * *

덕진 공원에서의 환상적인 경험을 한 뒤 은후는 이하연과 함께 용산으로 차를 몰려고 했다. 힘들고 귀찮으니까 굳이 용산으로 같이 가지 않아도 된다며, 기차를 타면 된다고 하는 이하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면서.

“조금 더 같이 함께 있고 싶으니까. 안 돼?”

이하연도 그건 같은 심정이라서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은후와 조금 더 시간을 보내고 싶은 건 이하연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러지 말고 집으로 가자.”

“우리 집?”

“응. 안…… 될까?”

“안 될 건 없지. 처음도 아니잖아?”

“으응.”

“그래도 이번에 용산 올라갈 때는 내가 데려다줄 거야.”

“……바보.”

은후의 집으로 온 뒤 이하연은 쓰러지듯 잠들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흠칫했다.

‘어라?’

여기는 어디지.

진부한 말이었지만 눈을 떠 보니 낯선 천장이었더라. 하지만 처음 보는 천장은 아니었다. 왠지 모르게 벽지도 마음에도 들었고. 그렇게 잠시 이하연은 잠에 취해 멍하니 시간을 흘려보냈다.

‘……아.’

여기는 은후의 집이지.

‘내…… 방.’

은후의 집은 평수가 작지 않았다. 개중에 방 하나를 이하연의 방으로 꾸며 놓았다. 언제든지 마음만 내키면 놀러 오라며. 몇 번 오지 않았기에 여전히 낯설지만 그래도 친근하다는 느낌을 받은 건 그래서였다. 방을 이하연의 취향으로 꾸며 놓아서.

‘어제? 아니, 오늘 아침?’

이하연의 뇌리에 잠들기 전에 겪었던 일이 새록새록 재생되었다.

‘꿈이 아니었네.’

아니었어.

“으으으으으으.”

이하연이 기지개를 켠 뒤에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어제 씻지도 못하고 잔 거 같은데.’

은후는 어디에.

‘그런데 지금 몇 시야?’

꼬르륵.

배에서 소리가 났다.

‘우.’

무작정 은후를 만나러 가서. 동화 속 이야기와 같은 일을 겪은 뒤에 은후의 집에서 쓰러지듯 잠에 들었다. 배가 고팠지만 잠이 먼저였다. 그건 이하연의 마음이 안정되었기 때문이다.

그간 차곡차곡 쌓여 왔던 부담감이 뮤직비디오 건에서 폭발한 뒤 은후를 만났고, 안심했다. 그래서 피로가 순간적으로 덮쳤다. 요 근래 거의 뭘 못 먹었기에 너무도 배가 고팠다.

‘맛있는 냄새.’

배가 고프기도 했고 씻기도 해야 할 것 같아서 문을 슬며시 열고 나갔을 때 이하연의 코에 음식 냄새가 다가왔다. 더불어 익숙하면서도 설레는 목소리 또한.

“일어났어?”

“……응.”

조그맣게 이하연이 대답했음에도 은후는 알아들었다.

“저기 소파에 갈아입을 옷이랑 일회용 세면도구 놓았으니까 씻고 와. 아니면 먹고 씻을래?”

“아니! 씻고 먹을래!”

“목소리가 우렁찬 거 보니까 이제 좀 살아났나 보네.”

“윽.”

이하연이 볼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소파의 옷가지와 세면도구를 들고 화장실로 도망쳤다.

‘다행히 머리는 안 감아도…… 되겠지?’

어제 은후를 만나러 오기 직전에 감았으니까.

‘배고프다.’

씻고 나간 이하연의 눈 앞에 펼쳐진 건 식탁에 차려진 음식이었다.

베이컨 앤 에그.

이름 그대로 베이컨을 얇게 썰어 구운 뒤 계란프라이를 올려놓은 요리였다.

“맛있겠다.”

“얼른 먹어.”

“고마워. 그런데 지금 몇 시야?”

“새벽 한 시.”

“우. 시간 금방 지나간다.”

정말로 정신없이 잤구나.

‘하루가 지났네.’

그건 그렇고.

무척이나 맛있었다.

시장이 반찬인 이유도 있었으나 은후의 마음 씀씀이가 너무 고마워서.

‘결혼하면 항상 이럴까?’

물론 매번 이렇게 은후가 식사를 차려 주는 걸 바라는 건 아니었다.

이렇게 준비된 식사 자리에 앉는 것도 좋지만.

‘나도.’

은후가 힘들고 지칠 때.

이렇게 배려해 주고 보듬어 주고 싶었다.

“오늘 하루는 좀 더 쉬고 있어.”

“응?”

“좀 나가야 할 데가 있어서.”

“이 시간에?”

“덕진 공원에. 그, 개구리 친구랑 관련이 좀 있는 일이라. 마음 같아서는 좀 더 같이 있어 주고 싶은데 미룰 수 없는 일이 있거든.”

“아.”

이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히 다녀와.”

“응. 미안. 좀 더 같이 있어 줘야 하는데.”

“미안하기는 뭘. 그런 거로 미안하다고 하지 마. 그러면 내가 더 미안하잖아.”

“그런가.”

“그럼! 그러니까 맘 편히 다녀오구. 난 노트북 챙겨 왔으니까 일 좀 하다가 영화라도 한 편 보면서 놀고 있을게.”

“그래.”

은후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 * *

은후가 덕진 공원에 도착하자 마중 나온 건 개구리였다. 언제나처럼 수호령이 아니라.

“왔구만.”

은후가 마나를 덕진 공원에 퍼트리며 물었다.

“와야지. 령이는?”

“쉬는 중. 이제 좀 정신 차리고 말도 제대로 하더라고.”

은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움직였다.

‘사람이 꽤 있네.’

오늘은 드디어 이름을 주고받는 날. 원래 계획대로라면 달이 자신을 가장 많이 드러낸 날에 하려고 했지만.

‘인생이 계획대로만 진행되는 건 아니지.’

상황이 바뀌었다.

천도 복숭아나무의 힘을 수호령이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은후의 예측이 살짝 어긋났다.

‘이유는 상시로 열게 된 축제.’

처음 열었던 축제를 기점으로 계속해서 아이들에게 행복과 즐거움을 제공하고자 열었던 행사가 수호령의 그릇을 넓혔다. 문제는 천도 복숭아나무도 그 영향을 진하게 받았던 것. 그리하여 천도 복숭아나무와 수호령의 연결 고리가 더 단단하게 되었다.

‘뭐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니.’

은후가 발걸음을 옮기며 사람들을 덕진 공원에서 빠져나가게끔 유도했다. 혹여라도 수호령과 이름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어떤 영향을 받을까 봐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 영향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렇지 않든. 무언가 변화가 생기는 게 이름을 주고받는 과정에 있다면 수호령은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을 터. 특히 아이가 있다면 더더욱.

‘시간이 시간이라서 아이가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그런 사소함마저 지금은 조심해야만 했다. 수호령의 성향이 그런 걸 어찌하겠는가. 수호령이 조금만 더 무던했다면. 혹은 아이 외의 사람에게 아무런 신경을 안 쓰는 존재라면 또 모르겠지만.

‘참 여리단 말이야.’

은후가 속으로 중얼거리며 덕진 공원을 한 바퀴 쭉 돌았다. 그 뒤를 개구리가 조용히 뒤따랐다. 이윽고 덕진 공원에서 은후 외에 사람은 전부 자취를 감추었다.

“은후다!”

낙원이 자리 잡은 곳.

벽진 폭포 앞에서 호랑이 신선과 물장구를 치며 놀고 있던 수호령이 반색하며 다시 한번 외쳤다.

“은후야!”

“그래.”

은후가 수호령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뭔가 오랜만이네.”

“나도! 날짜로 따지면, 음.”

수호령이 양손을 활짝 편 뒤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으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오래 안 된 것 같은데.”

“그치. 날짜로 따지면 며칠 안 되지.”

하지만 체감상으로는 꽤 긴 시간 동안 만나지 못한 느낌이었다.

은후도, 수호령도.

“컨디션은?”

“나쁘지 않은 거 같아. 쪼오금 힘든 것 같기는 한데.”

“정말로 조금이야?”

“에이. 그럼! 정말로 조금! 몸에 힘이 잘 안 들어가는 느낌이랄까. 그래도 괜찮아!”

수호령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은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을 수 있었다.

“잠깐 걸을까.”

“좋아.”

은후는 가볍게.

수호령은 발을 멀찍멀찍 떼어 놓으며.

징검징검.

작은 몸으로 보폭을 크게 넓히는 모습이 귀여워서. 누구라도 그 모습을 보면 절로 흐뭇한 미소를 짓게 만드는 발걸음이었다. 이윽고 도착한 곳은 천도 복숭아나무가 자리 잡은 곳이었다.

은후와 수호령은 잠시 천도 복숭아나무 앞에서 침묵했다. 침묵 이후 찾아온 건 고요함이었다. 평소라면 들려올 법한 풀벌레 소리도 없었다. 짙은 먹먹함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수호령이 말했다.

“뭔가, 뭔가 친근한 느낌이야. 예전에는 그냥 멋지게만 보였는데.”

“그냥 멋지게만?”

“대단하고 신기하고 놀랍다?”

“지금은 아니란 말이네.”

“응. 가까워진 것 같아. 은후 같아.”

“나?”

“응. 그래도 은후보다는 아닌 것 같구.”

원래라면.

예상대로라면.

‘나보다 더.’

친근감을 느껴야 하는데.

왜냐하면 서로가 연결되어 있으니까.

마법적으로.

묘사하자면 직접과 간접 사이의 어딘가. 그 보다 덜 간접적으로 낙원이란 매개체로 연결된 은후보다는 더 가까웠다. 그렇기에 수호령의 말은 은후의 예상외였다. 하지만 그건 기분 좋은 오산이었다.

그만큼 수호령이 은후 자신을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증거였으니까. 그것도 보통 마음으로는 되지 않을. 그래서 은후는 웃었다.

“예전에 말이야.”

“응?”

“바다가 보고 싶다고 했었지.”

“응.”

“오늘 이름을 주고받으면 바다를 보러 가자. 여기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이 내 고향인데 거기 바다도 나쁘지 않거든.”

수호령이 웃으며 중얼거렸다.

“바다. 좋네. 보고 싶었거든.”

“또 모악산도. 같이 등산해 보고 싶다며?”

언젠가 어떤 아이가 부모님과 함께 산에 올라가는 게 그리 좋았다며 자랑하는 일을 듣고 수호령이 바랐던 소망. 하지만 수호령은 당시만 해도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은후가 수호령의 말을 끊었다.

“괜찮아.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야. 오늘 이름을 주고받으면. 절로 알게 될걸?”

“오늘이야?”

“정확히는 지금이지. 알고 있지 않았어?”

“짐작은 했지만.”

수호령이 샐쭉하게 웃으며 답했다.

“확신은 못 했으니까.”

시간이 되었다.

이름을 주고받을 시간이.

천도 복숭아나무가 은후의 인도에 따라 달빛을 머금으며 빛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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