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5화
이하연은 알았다.
은후에게 적잖은 비밀이 있음을.
사실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었다.
어디 대기업 재벌가의 자제도 아니고 평범한 대학생. 그런 대학생이 사업이라. 사업까지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성공에 관해서는 어떨까. 물론 운이 좋아서 성공할 수도 있겠지.
그런데 시간까지 널널하게 가져갈 수 있을까. 사업을 운영하느라 바빠야 정상인데. 상식적으로도, 케이스가 하나밖에 없기는 하지만 이하연의 친인척 중 은후와 비슷하게 젊은 나이로 사업을 시작한 사촌이 있기에 비교해 보면 차이가 명확했다.
게다가 연줄도 그랬다.
일전 몽골에서 봤던 전주 유지의 이창석. 어떻게 연을 맺었느냐고 물었더니 은후는 그저 웃었고 이창석은 도움을 받은 뒤 사업 파트너가 되었다고 했다. 대체 무슨 도움이었기에.
‘스타더스트도.’
말과의 교류나 승마 실력도.
기타 연주도.
이런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멋지고 잘 생기고 또 완벽에 가까운 그런 남자였다. 그런 남자가 제 남자 친구라는 게 지금도 이따금 믿기 어려웠다.
‘단순히 재능으로만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너무 많아.’
은후가 몇 번 직접 언급한 적도 있었다.
- 언젠가.
말해 줄 날이 올 거라고.
그래서 믿었다.
언제나 신뢰를 주고자 은후는 노력했으니까. 결정적으로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애매하거나 모호한 상황에서 침묵은 해도 변명으로 그 상황을 모면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 점 때문에 이하연은 궁금증을 애써 내리눌렀다. 그런데 오늘 은후의 비밀을 하나 직접 엿 볼 수 있었다. 조금은 더 친해져서 그런 것일까 싶어서.
‘좋다.’
이번에 하나.
다음에 하나.
그렇게 차츰차츰.
“여긴 어디야?”
“덕진 공원.”
이하연이 차창 바깥으로 시선을 던지며 은후에 관하여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은후가 차를 몰고 도착한 곳은 덕진 공원이었다. 일전 은후와 데이트한 적도 있었기에 이하연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집으로 갈 줄 알았는데.’
뭐어.
산책도 나쁘지 않지.
하지만.
“어?”
뭔가.
예전 기억과 다르게 덕진 공원이 보이는 건 착각일까.
‘응?’
거대한 나무가 이하연의 눈에 들어왔다.
“저 나무 원래 있었던가?”
“원래라는 기준이 좀 애매한데. 그리 오래 안 되었거든. 저 나무가 심어진 지.”
없던 나무가 생기는 것.
현대 기술로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다 자란 나무의 위치를 바꾸는 건 요새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이내 이어지는 은후의 말에 이하연의 눈이 커다래졌다.
“저번에 하연이 네가 왔을 때도 있었는걸.”
“왜 나는 못 본 거 같지.”
“그때는 못 봤을 테니까. 지금도 내가 도움을 주지 않고 있으면 못 봐.”
“도움이라니?”
갑자기 이하연의 시야에서 천도 복숭아나무가 슥 사라졌다. 이하연은 눈을 몇 번이나 깜빡였다.
“일단 좀 걸을까?”
“으, 으응.”
차에서 내린 뒤 둘은 걷기 시작했다. 이윽고 자박이는 발걸음 소리가 묻혔다. 아직도 추운 날씨이건만 산책이나 운동하러 나온 동네 주민들에 의해서.
“많이 지친 것 같던데.”
“응. 그게 뮤직비디오 말이야. 그거 때문에 내가 좀 스트레스받고 있나 봐. 전주에 내려오는 길에 기차 안에서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예기치 못한 방송과 브이튜브의 성장에 따라오는 많은 이들의 기대가.
“특히 이번에 음원이랑 앨범 말이야.”
“어.”
“엄청 처음에 기대했다?”
“그랬어?”
“그럼. 은후 넌 안 그랬어?”
“조금은 기대했지. 그런데 너무 크게 기대는 안 했어.”
왜냐하면.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니까.”
더불어 지금 은후가 세상에 공개한 음악의 근원이 자신이 아닌 성호의 것이기도 했고 말이다.
“……나는 좀 많이 기대했나 봐. 그런데 처음에 반응이 기대 이하라서 좀 우울했거든. 그러다가 갑자기 빵 터지더니.”
“응.”
“지금 반응 엄청 좋잖아. 메일도 엄청나게 쏟아지더라. 방송에서 막 몇백만 원씩 후원하면서 은후 널 찾는 사람도 있었고. 또 나한테 직접 만나자고 한 사람도 있었거든. 전부 거절하기는 했지만.”
그렇게 실감하니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그래서 뮤직비디오에 관해서도 사람들 잔뜩 기대하고 있던데.”
차라리 전문가에게 맡길걸.
괜히 내가 고집을 피웠나.
내가 안 했다면 더 좋은 결과물이 나오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부담감이네.”
“응. 맞아.”
“내가 부담감을 느끼지 말라고 해도 그게 안 되겠지.”
“그렇겠지?”
은후가 잡고 있던 이하연의 손을 당기며 말했다.
“내가 옆에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해도 걱정이 될 거야.”
“응.”
“힘껏 노력해. 아니, 이미 엄청 열심히 최선을 다하지 않았어?”
“했다고는…… 생각해.”
“그러면 결과를 기다리자. 그래서 잘 되면 같이 기뻐하고 웃자. 만약에 잘 안 풀렸을 때는 같이 슬퍼하고 개선 방향성을 찾아보자. 혼자만 있는 건 아니잖아?”
함께.
그래, 함께.
혼자가 아니었구나.
‘그렇지. 옆에 있으면서도 몰랐네.’
알면서도 잘 몰랐다.
뭔가 새삼스러웠고 안심이 되었다.
“바보. 이번에 사람들의 기대가 얼마나 큰데.”
“그런 사람들의 기대보다 하연이 네 기분이 나한테는 더 중요한걸. 정 두려우면 엎어 버릴까? 사실 뮤직비디오 그거 공개 안 해도 돼.”
“욕먹을 텐데.”
“좀 먹으면 어때.”
“그래도 그건 좀 싫을지도. 많이 노력했으니까.”
은후가 이하연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힘들었겠네.”
“응.”
“그래도 마냥 힘들기만 한 건 아니었을 거야. 재미도 있었지? 편집하는 게 재미있어서 굳이 편집자도 따로 안 구하고 있잖아.”
“그거야 뭐.”
“완성 뒤에 뿌듯하기도 했을 거고.”
“……응.”
“노력이 항상 결과에 보답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우리에겐 다음이 있잖아. 이번에 실패해도 길거리에 나앉는 건 아니니까. 빚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환경이 받쳐 주고 있었다.
“저기 한번 봐 볼래?”
“어디?”
“저기.”
“어?”
추운 날씨에도 힘껏 힘을 내어 물줄기를 쏟아 내는 폭포.
그리고.
“나무…… 나무다.”
아까 봤던.
시야에서 사라졌었던 거대한 나무가 이하연의 눈에 비쳤다.
“복숭아나무야.”
“복숭아…….”
“정확히는 천도 복숭아나무.”
“천도? 그, 손오공?”
“그래. 그 이야기에서 나오는 나무지. 친구한테 씨앗을 받아서 내가 심었어.”
뭔가 터무니없는 말을 들은 것 같았다.
“그. 단순한 비유가 아닌 것 같은데. 맞아?”
“맞아. 그 진짜 천도 복숭아나무야.”
은후가 손짓했다.
“안녕?”
그리고.
“개, 개구리?”
말하는 개구리에.
“말하는 개구리 처음 봐?”
“처음 보겠지. 하연이는 보통 사람이니까.”
개구리가 울었다.
개굴개굴.
“거 그런데 도령이 우리를 소개해 줄 줄은 몰랐는데.”
“언젠가 소개해 주려고 했어. 일단 개구리 너부터.”
“으흠. 내가 첫 번째군. 령이가 아니라.”
“원래는 령이를 소개해 주려고 했는데. 알잖아? 지금 중요한 시기인 거.”
“거, 씁. 그건 그렇지. 조금 서운한데?”
“서운하면 뭐?”
“어허. 사람. 아니, 개구리가 좀 서운할 수도 있지. 그래도 령이가 첫 번째라는 건 이해하지만. 이럴 때라도 선의의 거짓말을 해 줄 수 있는 거 아녀?”
“거짓말했으면 그거대로 속으로 꿍했을 거면서.”
처음에 착각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어지는 개구리와 은후의 만담에 이하연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어, 어어.’
꿈인가 싶어서.
‘윽.’
손가락으로 손등을 꼬집었더니 아픔이 느껴졌다.
‘꿈은 아닌 거 같고.’
은후가 말했다.
“최근에 하연이와 어쩌다 보니 결혼에 관한 이야기를 가볍게 나누었거든.”
“오호. 결혼.”
“하연아 기억하지?”
“어, 으응. 기억하지.”
“그때 그러더라고.”
처음에는 나쁘지 않다고.
“그러다가 좋다고. 또 그러다가 하연이 너 아니면 평생 혼자 지내지 않을까 싶기도 하더라.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고 장담은 못 한다지만 왠지 그럴 거 같아서.”
놓치기 싫어졌다.
“생각도 해 봤지. 말하는 개구리라니. 내가 말 해도 믿을 수 있었을까?”
“……못 믿었을걸.”
사실 지금도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비밀로 하고 숨겨도 상관은 없었을 거야. 그런데 내 과거 이야기를 하자니 좀.”
은후가 쓰게 웃었다.
“굳이 숨기고 싶지도 않았고. 프러포즈하기 전에 어느 정도는 내 비밀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거든.”
“어느 정도라면?”
“할 말이 좀 많아. 그런데 한꺼번에 말하면 하연이 네가 혼란스러울 거야. 그러니까 하나씩. 천천히.”
“하나씩.”
“응. 애초에 속이려고 했으면 여기 개구리 친구를 소개하지도 않았을 거고.”
“그거야 뭐어.”
“사실 그냥 천도 복숭아나무만 보여 주고 말려고 했는데. 하도 주위에서 시끄러워서.”
가만히 옆에 있던 개구리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허. 딱히 시끄럽게 하지 않았는데?”
“시끄러웠어. 조용히 해 달라고 내가 분명히 말했는데도. 하연이랑 여기서 데이트한 게 처음도 아니었잖아?”
“에이. 그때는 이렇게까지 진지한 관계인지 다들 몰랐지.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다는 말에 다들 얼마나 놀랐는데.”
“눈이 옹이구멍인가? 내가 아무나 만날 사람으로 보였어?”
“건 또 아니지만.”
은후가 개구리에게 가벼운 딱밤을 날린 후 이하연에게 말했다.
“여하튼 내 친구야. 말하는 개구리랄까.”
“말하는 개구리랄까, 가 아니라 말하는 개구리지.”
“천년 묵은 개구리이기도 하고.”
“큼.”
개구리가 씩 웃었다.
“내 나이가 좀 많기는 하지.”
“뭘 뿌듯해해?”
“에이. 나 같은 영물이 나이가 많다는 건 자랑할 만한 증거라니까? 아무리 영물이어도 천년 넘게 산 영물은 얼마 없어. 게다가 개구리 중에는 내가 최초일 텐데.”
“정말로? 전 세계에서?”
“적어도 한반도 내에선.”
* * *
“어때. 조금 괜찮아졌어?”
“…….”
은후의 위로.
그리고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말 하는 개구리와의 만남에서 비롯된 놀람.
또.
은후의 비밀을 조금이라도 듣고 접했다는.
‘분명히 어머니도 모른다고.’
그런 만족감이 이하연을 기쁘게 했다.
게다가 결혼이라고 했다.
‘어?’
결혼.
‘분명 이거.’
반쯤은.
아니, 거의 프러포즈에 가까운 말을 들은 거 같은데.
‘응?’
정식 프러포즈는 아니었어도.
‘어어어어어어?!’
이하연의 머리가 새하얗게 변했다.
“하연아?”
“어, 어어.”
“괜찮은 거 맞지?”
“어! 응! 나 괜찮아!”
개구리가 아까처럼 울었다.
개굴개굴.
“우리가 도령의 여자 친구를 위해서 준비한 것이 있는데.”
“뭘?”
개구리가 씩 웃었다.
“아름다운 거. 데이트 잘 즐기라구. 연인을 방해하고 싶어 하는 주민은 없으니까. 근데 다들 보고 있는 건 알지?”
“뭐.”
은후가 어깨를 으쓱였다.
“하연…… 씨라고 했나.”
“네, 네에.”
“담에 또 봅시다.”
“네?”
개구리가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사람의 형태로 변했다. 그리고 손을 흔들며 어디론가 쓱 하니 사라졌다. 이윽고 주위 환경이 변하기 시작했다.
‘눈이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은후와 이하연이 딛고 있는 발아래에 물이 차기 시작했다. 이내 주변을 가득 메운 물결. 그리고 그 물결에 비치는 하늘 풍경. 우뚝 서 있는 거대한 천도 복숭아나무.
물을 움직이는 건 개구리가. 눈의 경우엔 호랑이 신선이 힘을 써서 실제 눈을 하늘로 올려놓았다.
“와아.”
여러 가지 감정이 뒤얽힌 상황에서도 이하연의 입에서는 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