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9화
다음 날 아침.
“딸 일어났어?”
“네에.”
평소와 다르게 다소 일찍 시작하여 평소보다 이르게 끝낸 방송.
이하연은 오늘 있을 데이트를 위하여 스케줄 조정을 했다. 그렇지만 너무 늦게 잠에 들었다. 몇 시간 후에 있을 데이트에 너무 설레서. 첫 데이트 때처럼 그랬다.
“못 일어나면 꼭 깨워달라고 하더니만. 잘도 일어났네?”
“약속 있으니까 일어나야지. 깨워달라고 한 건 혹시 몰라서.”
“그래?”
“응. 그런데 왜 그렇게 쳐다봐?”
“데이트?”
“아니, 뭐.”
어머니의 질문에 이하연이 멋쩍게 웃었다.
“티 나?”
“그럼 왜 안 나겠어. 벌써 들뜬 게 보이는데. 그런 건 안 변했네.”
“뭐가?”
“뭔가 설레는 일이 있으면 잘 못 자는 거. 그러면서도 꾸역꾸역 잠은 어떻게든 잔 다음에 일어나잖아.”
“내가 그랬나?”
“그랬어.”
“그. 뭐.”
하기야 같이 산 세월이 얼마인데. 시청자들도 들뜬 자신의 목소리를 알아차렸건만 어머니가 모를 수가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유독 더 그런 것 같다?”
“…….”
“무슨 일 있었어? 좋은 일 같아서 물어보는 거다만.”
“어제 통화하다가.”
“어.”
“결…… 킁. 결혼 이야기가 갑자기 나와서 말야.”
“결혼?”
연애야 그렇다지만 결혼은 또 다른 문제였다. 이하연 어머니의 눈이 커다래졌다.
“결혼, 결혼 말이지.”
“응. 뭐 진지하게 나온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아니, 진지했나?”
“마음은 없진 않은 모양이네.”
“그렇지.”
“으이구. 그래도 잘 생각해.”
“엄마는 찬성이야 반대야?”
“글쎄다. 그건 나중에 진지하게 둘이 결정이 나면 말하렴. 원래 식장 전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모르는 법이다?”
이하연의 뺨이 부루퉁해졌다.
‘그거야 엄마 말이 맞기는 하지만.’
너무 섣부른 생각일까.
‘결혼…… 하면 좋을까.’
좋을 것 같기는 하지만.
“하여간 결혼 그거 좋기는 하다만 안 좋기도 하니까.”
“엄마는 별로였어?”
“글쎄다. 확실한 건 어제는 별로였지. 평소에는 좋았던 것 같다만.”
“어제? 왜?”
순간적으로 이하연 어머니의 눈동자가 싸늘해졌다.
“네 아빠가 일 년에 한 번 있는 기념일을 까먹었으니까.”
“기념일? 아. 혹시 어제가 결혼기념일이었어?”
“그래.”
“우리 아빠 큰일 났네.”
* * *
하늘에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은후는 운전을 하면서 왠지 모르게 사르락거리는 소리가 눈에 밟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진눈깨비인가.’
눈이 녹아서 비와 섞여 내리는 현상을 뜻하는 진눈깨비. 그래서 그런지 도로가 찐득한 것 같기도 했다.
‘평소보다는 확실히.’
타이어로부터 타고 올라오는 진동에서 느껴지는 질감이 실제로 그러했다.
‘괜히 의식했나.’
은후가 빨간불을 확인하고 서서히 속도를 줄이면서 쓰게 웃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느낄 수 없는 감각. 하지만 은후는 자연스럽게 그런 감각을 인지하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그저 무의식중에 흘려넘겼을 인식. 하지만 오늘은 왠지 모르게 의식되었다.
‘결혼이라.’
어제의 대화 때문에.
괜스레 결혼이란 단어를 꺼냈나 싶기도 했다. 그래서 몸이 다소 긴장해서 벌어진 일이라 은후는 결론을 내렸다.
‘결혼.’
하게 된다면 두 번째.
‘……굳이 말해야 할 건 아닌데.’
또 말하지 않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아닐까 싶었다. 그저 자신만 입을 다문다면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일. 허나 그렇기에 미리 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렵네.’
이건 결국 신뢰의 문제였다.
게다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본인 스스로는 알고 있지 않은가. 없앨 수 없는 과거도 아니었고, 설령 그럴 수 있다고 하여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 만약 이하연이 자신의 과거 때문에 결혼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감수해야지.’
이별.
‘쓰네.’
헤어짐.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마음이 아렸다.
‘연인의 헤어짐이라.’
위로.
그래, 헤어졌다면 진부한 말이겠으나 사랑한 만큼 아플 터였고. 사람이라면 자연스레 위로를 받고 싶어 하겠지. 그리고 그런 위로의 노래는 아주 많았다.
* * *
언제부터인가 그러하듯 데이트하는 날 용산을 찾으면 항상 첫 만남은 이하연의 집 앞이 되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하늘에는 여전히 진눈깨비가 흩날리고 있었다.
“왔어?”
“응.”
평소와 다른 약간의 어색함.
순간적으로 착각했나 싶었지만 그건 또 아닌 것 같아서 이하연이 툭 물었다.
“뭐야. 무슨 일 있었어?”
“아니. 딱히?”
“있었던 것 같은데.”
“그냥.”
“에이. 말해 봐. 아니면 나한테 말하기 곤란한 문제?”
평소처럼 은후가 보조석의 문을 열어 주기 직전. 이하연이 은후의 어깨에 달라붙으며 물었다. 이하연이 뭔가 확신하고 있음을 알아차린 은후가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조금은.”
“그렇게 말하니까 조금은 서운한데.”
“당장은 말하기 좀 힘들지도.”
“그럼 나중에?”
“응.”
평소와 다른 뉘앙스에 이하연은 서운함을 애써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연인이라도 말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는 걸 이하연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 말해 준다고 했으니까.’
그런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은후를 신뢰할 수 있으니까.
당장은 서운한 만큼 조금 더 붙어 있자.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하연이 말했다.
“조금만 이러고 있을까.”
“안 추워? 일찍 나와서 볼이 찬데.”
“붙어 있으면 괜찮을 듯.”
“그래?”
“이런 로망이 있었거든.”
연인과 함께 우산을 쓰고.
그 안에서 걸으면서.
혹은 멈춰서서 꼭 달라붙어 있는 그런 거.
그래서 이하연은 은후와 사귄 후 눈이나 비가 내리는 날이 더욱 좋아졌다. 비교적 주위의 시선을 덜 신경 쓰고 가까이 연인과 있을 수 있기에.
“차 안에서 그래도 된다고 하면 낭만이 좀 덜하려나.”
“그럼. 덜 하지. 이제 좀 뭘 아네.”
“원래도 알았거든?”
“흥흥.”
이제는 느껴지지 않은 어색함에 이하연이 웃었다.
“오늘 가기로 한 곳 재밌겠다.”
“재미라.”
“재밌을 것 같지 않아?”
“잘 모르겠네.”
재미라.
“공부할 생각에 좀 골치가 아픈걸. 사실 현대 음악의 녹음에 관해서 잘 모르니까. 사전 예습을 좀 하고 오기는 했는데.”
그래도.
“다시 생각해 보니 재밌을 것 같아.”
“그래?”
“응. 옆에 있어 준다고 했잖아? 도와준다고도 했고.”
“그랬지.”
“그러니까.”
재미도 기준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지만. 연인과 함께 무언가 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재미는 대개 충분히 보장되는 법이었다.
“슬슬 갈까.”
“……뭔가 아쉬운데.”
은후가 피식 웃으며 이하연의 얼굴을 살폈다. 한껏 공들인 화장과 머리. 헤어지기 직전이라면 모를까 막 데이트를 시작하려는 시점이었다.
‘입술에 하는 키스는 말고. 밖이기도 하니까.’
은후가 이하연의 손을 자신의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어?”
“이제 가자.”
아쉬움을 위로하는 손등의 키스.
이하연의 뺨이 붉어졌다.
차에 탄 이후에도 한동안 쭉.
그사이에 찾아온 침묵. 하지만 그 침묵에는 불편함과 어색함이 아닌 설렘과 기쁨이 가득했다.
‘좋다.’
밖에 내리는 눈조차도.
이하연은 눈을 좋아했다.
다만 조건이 있었다. 집 안에 있을 때. 밖에 돌아다닐 때 눈이 오는 건 귀찮았다. 그러나 누군가와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그 생각이 바뀌었다.
“그나저나 앨범 말이야.”
“어.”
“콘셉트가 위로라고 그랬지.”
“그랬지?”
지금은 트렁크에 잠들어 있을 성호를 의식하며 은후가 대꾸했다. 뒷좌석에서 조용히 있어도 괜찮다고 했지만 연인 사이를 방해하기 싫다면서 성호는 트렁크를 자처했다.
- 귀신이라서 이럴 때는 좋네요. 트렁크에 실려서 갈 수도 있고요. 게다가 좁은 곳이라서 그런지 집중하기에 딱 좋거든요.
이렇게 말하면서.
그 말은 배려이기도 했으나 진심이어서 은후는 굳이 성호를 말리지 않았다.
“그거 내가 조금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혹시 내 말이 불편하게 들리면 바로 말해 주고.”
“어, 편하게 말해.”
이하연이 말을 고른 뒤 답했다.
“콘셉트도 콘셉트인데 대상을 좁히는 게 낫지 않을까 싶더라고.”
“대상을?”
“응. 위로라고는 하지만 사람마다 처한 환경이 다르고 위로받고 싶은 내용도 다를 거잖아. 구체적인 편이 난 더 좋지 않을까 싶더라고.”
예컨대.
“연인과 헤어졌다거나. 소중한 사람이 죽었다거나. 시험이 걱정이라거나. 상황을 가정한 다음에.”
“응.”
“그런 식으로 확실하게 들려주고 싶은 청자를 구체적으로 가정한다면 위로라는 콘셉트를 더 살릴 수 있을 것 같거든.”
그리고.
“뮤직비디오나 사진처럼 시각 정보를 활용해도 좋을 것 같아.”
어디까지나 주된 건 음악이라지만.
“음악을 보조하는 느낌으로 활용하는 시청각 자료랄까? 그런 경우는 무척이나 많잖아. 영상이 있으면 더 공감하기 쉬운 편이고.”
“확실히.”
은후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방금 들었던 내용을 트렁크에 있는 성호에게 마나를 통해 전달했다. 성호는 일리 있는 말이라며 좀 생각해 본다고 답했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이런 말도 안 하겠는데. 솔직히 뮤직비디오를 찍는 거나 스토리를 짜는 것도 돈만 있으면 해결되는 문제잖아? 직접 해도 상관은 없겠지만.”
“비전문가로서 힘들겠지. 게다가 이번에 낼 앨범은 좀 뭐랄까. 제대로 마음먹고 있거든.”
“응응. 그래서 그래. 이런 말 하면 좀 그렇지만 돈만 있으면 어지간한 건 다 해결할 수 있는 세상이니까.”
정말로 웬만한 건.
아니, 사실상 돈으로 불가능한 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세상이었다. 그래서 소위 이런 말이 있지 않던가.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면 돈이 부족한 건 아닐까 다시 되짚어 보라고.
“뮤직비디오라.”
은후가 중얼거렸다.
‘성호 씨는 어떻게 생각하려나.’
대외적으로 보이는 건 은후가 주가 되어 앨범을 내는 것으로 보이겠으나. 진실은 성호가 주체였으니. 중요한 건 성호의 의견이었다.
“그으.”
“응?”
“그리고. 있잖아.”
“응.”
“하나…… 정도는 내가 찍었던 영상으로 뮤직비디오 만들어 보고 싶은데. 괜찮을까? 저번에 생일 선물 때 받았던 곡 말야. 아, 앨범에 포함하자는 이야기는 아니고.”
은후는 상관없었다. 허나 곡의 지분 중 반은 성호에게 있었다. 그래서 성호에게 은후가 물었더니 흔쾌한 대답이 돌아왔다.
- 물론이죠.
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대로 해.”
“좋아.”
이하연이 해맑게 대답했다.
그렇게 목적지였던 렛츠 뮤직 스튜디오 녹음실에 도착하기까지 한동안 음악에 관한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 * *
렛츠 뮤직 스튜디오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작업을 받지 않았다. 최소한 어느 정도 입증된 음악인만을 손님으로 받았다. 그런 와중에 스튜디오의 실장은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부탁을 받게 되었다.
일전에 신세를 졌던 한 PD로부터 일반인의 작업을 해 달라는 그런 부탁을. 처음에는 난처했으나 그 일반인의 정보를 알게 된 이후 생각을 달리했다.
‘일반인은 무슨.’
근래 브이튜브를 중심으로 인터넷과 더불어 특히 해외에서 큰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음악인. 예명은 사과라고 했다. 업계에서도 아는 사람은 전부 다 알고 있을 정도.
한국인이라는 것과 20대라는 점을 제외하고 신상은 철저히 베일에 휘감겨 있었다. 그 정도 음악성을 지닌 이라면 소문이 났을 법도 한데 그 아무도 정체를 몰랐다.
‘그런데 그 PD가 그런 개인적인 부탁을 해 올 사람은 아닌데. 그런 사람이 우리 녹음실에 앨범 작업을 위해서 온단 말이지.’
현재 은후는 음악 업계에서 뜨거운 감자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