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8화
김서준이 전북 대학교에 입학한 건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
전액 장학금.
소위 인서울이라 말하는 수도권의 대학을 충분히 노려볼 수 있는 수능 성적을 받았지만 집안 사정을 감안하여 장학금을 택했다. 더불어 지역 인재 채용 제도와 같은 메리트도 고려했다.
전주에서 태어나 쭉 머물렀기에 서울을 향한 동경도 없잖아 있었다. 집안 사정을 고려했다고는 하지만 국가 장학금이나 학자금 대출 등을 이용하면 서울로 못 갈 것도 아니었다.
‘그놈의 돈이 문제지.’
결국 나중에 갚아야 할 돈이 아니던가.
‘문과라는 것도 그렇고.’
차라리 이과였다면.
혹은 의대를 노릴 수 있을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면.
“후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른들은 말했다.
수능만 잘 보라고.
대학교에 가면 실컷 놀 수 있다고. 하고 싶은 거 다 하라면서. 하지만 막상 대학교에 와 보니 그럴 수가 없었다. 물론 그렇게 사는 학생들도 많았다. 당장 김서준 주위만 해도 그랬다.
딱히 집안의 형편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닌데도, 학사 경고까지는 아니지만 성적을 신경 쓰지 않고 실컷 노는 애들도 상당수. 그것도 대개 1학년 때까지였지만 말이다.
김서준 또한 전액 장학금을 위한 최소한의 성적만 유지한다면 얼마든지 놀 수 있었다. 하지만 성격상 그럴 수가 없었다. 1학년은 괜찮다고 말은 들었지만.
‘기타나 치고 싶다.’
고등학교 때 들었던 음악 동아리를 계기로 취미가 된 기타. 잠깐은 음악을 업으로 삼고 싶었던 시기도 있었으나 그저 상상만으로 그쳤다. 음악으로 돈을 벌기는 너무 힘든 길이니까.
성공한 극소수를 제외한다면 음악으로 밥 벌어먹고 살기는 너무도 어려웠으니. 그걸 알았기에 김서준은 기타를 취미로만 남겼다. 현실적으로. 취직을 위해서.
‘결국 돈이 문제지.’
이과로 전향을 했어야 했나.
아무리 현실적인 성격이라지만 이과는 도저히 성향에 맞지 않아서 문과를 택했는데.
‘지친다.’
죽고 싶다.
뭐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솔직히 힘들었다.
취업을 위하여 각종 자격증을 따는 것도. 토익 성적을 만드는 것도. 고등학교 때와 다르게 기타가 아닌 취업 동아리 활동을 하는 것도. 그냥 지긋지긋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김서준은 걸었다.
자박자박.
며칠 전에 내렸던 눈이 밟혔다.
‘응?’
그때 들려오기 시작한 기타 소리.
‘누구지?’
이 시간에 대체 누가.
아직 늦은 새벽이었다. 해가 뜨기에는 다소 이른 어스름이 가득한 시간 때. 바로 뒤가 덕진 공원이었기에 산책하러 나오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많이 이르지 않나?’
아닌가.
‘그나저나 듣기 너무 좋다.’
그리고 잘 쳤다.
무척이나.
기타를 취미로 삼고 있었기에 더더욱 그 점을 느낄 수 있었다.
‘저 정도 실력이면 기타를 직업으로 삼았을 것 같은데.’
마음에 음률이 와닿아 꽂히는 느낌이랄까.
그저 듣는 것만으로도 지친 삶에 위로가 되는 기분.
‘근데 대체 어디서 치는 거지?’
분명히 길거리인데.
덕진 공원의 뒤편.
기타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바라보니 사람이 오갈 수 있는 길이 없었다.
‘뭐지?’
잘 모르겠다.
하기야 그게 무어 중요할까.
김서준이 눈을 감았다.
잠깐이지만 지금 이 순간은 음악에 집중하고 싶었다.
* * *
해가 잠에 들었다가 다시 눈을 뜰 때까지 은후와 성호의 기타 연주는 계속되었다. 그 시간 동안 적잖은 사람이 기타가 자아내는 소리에 위로를 받았다.
은후의 생각 외로 정말로 많은 이들이 기타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삶에 지치지 않으면 들을 수 없을 텐데. 그 와중에 도깨비 주점에 들어올 자격이 있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자격이 있다고 하여 전부 손님으로 들어온 건 아니었다. 오늘은 대다수가 그냥 지나쳤다. 하기야 간판이 좀 수상쩍기도 하고. 또 길목이 어둑어둑해서 들어가기 좀 그렇긴 했다.
“기타 소리가 참 좋네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두 번째이자 마지막 손님이 도깨비 주점에서 벗어났다.
“뿌듯하네요.”
“그래요?”
“네. 그리고 무엇보다요.”
“무엇보다?”
성호가 씩 웃으며 답했다.
“다른 사람은 잘 모르겠고요. 아니, 알긴 아는데 솔직히 크게 신경 안 썼어요.”
“그럼요?”
“은후 씨가 좀 편안해진 것 같아서 그게 제일 좋네요.”
“저요.”
성호의 말에 은후가 픽 웃었다.
‘그러네.’
이런 느긋한 시간이 참 오랜만이라서 더욱 그런 것 같았다.
그간 은후는 쉴새 없이 달려오는 나날이었으니까. 수호령을 비롯한 낙원의 주민들과의 교류. 연인인 이하연과의 데이트. 틈틈이 어머니의 가게에도 들렀다.
그 사이 사이에 쉬는 틈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짤막한 시간에 항상 은후는 마법 연구에 몰두했다. 때로는 사고를 분할해서까지도. 물론 그러한 시간이 즐겁지 않다는 건 아니었지만.
‘몰랐는데 내가 좀 지치긴 했나 보다.’
그냥 오늘처럼.
방금 이 시간처럼 아무 생각하지 않고 멍하니 기타 소리에 집중하면서. 그런 휴식을 취한 적은 최근에 없었으니까. 은후가 아무리 초인에 가깝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사람이었다.
‘들어가서 잘까.’
푹.
오늘은 마법 연구도 쉬고.
늘어지게 한번 자야겠다.
은후는 잠깐 청명한 하늘을 바라본 뒤 은신 마법을 쓴 후 하늘로 날아올랐다.
* * *
그날 느지막한 오후.
- 별일 있었던 건 아니고?
- 응. 그냥 오랜만에 푹 잤어.
- 아하.
- 왜?
- 아니, 그냥. 갑자기 연락이 없길래. 평소에는 보통 방송 끝날 때 즈음에 문자 한 통 정도는 있었으니까.
이하연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에 은후가 하품을 하면서 답했다.
- 그런 날도 있는 법이지. 다음부터는 미리 말할게.
- 아냐, 아냐. 그렇게까지는 안 해도 되는데. 내가 혹시 너무 귀찮게 한 건 아니지?
- 조금은?
- 우.
- 괜찮으니까.
연인 간의 연락 문제.
서로가 잘 맞는다면 상관은 없지만 그렇지 않으면 자주 다툼의 소지가 될 만한 요소였다. 다행히 은후와 이하연 둘 사이에는 크게 문제가 없었다.
은후가 알아서 연락을 자주 하는 것도 있었고. 이하연이 그렇게까지 연락에 집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뭐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걱정이 되어서 그랬던 것뿐. 그걸 은후도 알았기에 장난스럽게 대꾸했더라.
- 바보.
이하연의 말에 은후가 웃었다.
바보라.
- 그런 바보랑 사귀는 누구는?
- 그 사람도 바보네.
- 둘 다 바보야?
- 응.
그렇게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은후가 일정을 잡았다.
- 다음 쉬는 날에 데이트할까.
- 좋아.
- 그런데 데이트는 데이트인데.
- 저번처럼 그냥 단순히 데이트만 하는 거 아니다?
- 저녁에는 그러지 않을까.
은후는 음반 녹음을 결심하고 이하연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과정에서 은후는 생각 외로 음반을 냄에 있어서 숙지해야 할 것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단순히 취미로 한다면 모를까. 아니, 단순한 취미여도 고퀄리티를 바란다면 전문적인 장비와 인력 및 지식이 요구되었다. 그래서 이번에 성호의 음반을 내기 위하여 사전에 전문 녹음실을 답사할 예정이었다.
- 나도 음반 녹음하는 과정이 궁금했으니까 괜찮아.
- 그렇다면 다행이고. 귀찮거나 흥미 없으면 저녁에 봐도 괜찮은데.
- 으응, 아냐. 나도 알아 두면 좋을 것 같으니까.
- 굳이?
- 뭐어. 지식이 힘이라잖아?
사실은 그냥 뭐든.
은후와 함께하는 것이 좋아서 그런 핑계를 대었다.
게다가 이하연의 입장에선 마냥 남의 일이 아니었다. 연인으로서의 입장도 그렇지만 브이튜브의 본인 계정에 은후의 곡이 올라오게 될 터. 그건 직간접적으로 충분한 이득이 되었다.
- 게다가 그냥 나 몰라라 하면 미안하구.
- 뭐가?
- 바보야. 돈 말이야, 돈. 아무리 연인 사이라지만 이런 건 좀 철저히 해야지. 브이튜브에서 은후 너 때문에 발생하는 수익이 얼만지는 알아?
- 알지? 하연이 네가 다 알려 주니까.
- ……얄미워. 내가 속이면 어떻게 하려고?
- 속이면 뭐. 그럴만한 사정이 있겠거니 생각하지 않을까.
- 데이트 통장이란 명목으로 묶어 놓는 것도 솔직히 부담이야. 금액이 금액이잖아. 그냥 계산해서 네 통장에 넣어 주면 되는데 데이트 통장을 만들자고 하더니만.
애초에 금전적인 부분에선 가족은 물론, 연인 사이에서도 칼 같아야 한다는 게 이하연의 지론이었다. 하지만 은후는 다소 널널한 편이었다. 그래서 이 부분에선 의견 차이가 종종 발생했다.
- 나중에 결혼하면.
- 응? 결혼?
- 결혼하면 네 돈이 내 돈. 내 돈이 네 돈. 그러면 상관없지 않을까.
- 어, 결혼. 응, 그거야 그렇……지? 요새 부부여도 맞벌이면 따로 관리하는 사람도 있다고는 들었는데. 내 친구 중 한 명이 그렇거든. 안 그런 사람들이 대다수인 것 같기는 하지만.
- 그렇지? 그러니까 상관없지 않을까.
- 뭐가?
- 데이트 통장이란 명목으로 그 돈 묶어두는 거.
- 어…… 어?
결혼.
아예 생각해 보지 않은 단어는 아니었다. 하지만 아직 이하연에게 있어서는 꽤 멀게만 느껴지는 일. 은후와 데이트하면서 가볍게라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 그런 단어가 갑작스럽게 나왔기에 이하연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솔직히 그 돈 없어도 그만이고.’
있으면 좋겠지만.
물론 그 돈이 은후에게 있어서 아무런 가치가 없다거나 정말로 아무렇게나 쓰여도 좋다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하연과 사귀어온 시간 동안 은후는 판단을 내렸다.
충분히 믿을 만하다고. 설령 그 돈을 말하지 않고 어디에 쓴다고 해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만난 지 그리 길지 않았지만 그런 신뢰가 있었다. 그래서 그랬다. 은후가 이하연에게 금전적으로 관대하게 반응하는 건.
‘게다가 결정적으로.’
마음만 먹는다면 돈은 얼마든지 벌 수 있어서.
‘생각은 해야 하는데.’
은후가 속으로 혀를 찼다.
돈.
적당한 돈이라면 모를까 큰돈에는 마성이 존재한다. 특히나 자본주의 시대인 현대 사회에서는 더더욱. 평범하고 화목한 가족이 복권에 당첨된 후 불행해졌다는 사연은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만약 이하연이 돈에 있어서 냉정하게. 또 확실하게 은후의 몫을 생각해 주지 않았다면 은후가 이러지도 않았을 터였다. 아니, 애초에 연인 사이로 발전하기 힘들었을 수도.
‘그러고 보니 그렇네.’
은근히 여리면서도.
또 어떤 면에서는 칼 같은 그 성격이 좋았다. 꼭 그것만은 아니지만 연인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큰 요소임에는 분명했다.
- 그러는 게 좋았어.
- 뭐, 뭐가?
- 돈에 냉담할 수 있다고 해야 할까. 돈을 그저 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드물거든. 그래서 더 호감이 갔는지도 몰라. 여하간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해. 나 씻으러 간다?
뚝.
전화가 끊겼다.
‘아니, 갑자기 뭐야.’
이하연의 입이 부루퉁해졌다.
‘결혼이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거였어?’
아니.
‘쉽게 말했으니까 더 좋은 건가? 아니지, 아니야. 으으. 결혼을 쉽게 본 건 아니고. 내가 쉽다는 거? 아닌데. 그냥 나랑 결혼할 생각이 있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건.
‘나랑 결혼…… 할 생각은 있다는 거지.’
결혼이라.
결혼.
인생의 무덤이라고는 하지만.
반대로 인생의 축복이라는 이도 있었다.
‘후자가 드문 편인 것 같기는 하지만서도.’
이러나저러나 한국 사회에서의 결혼은 연인 사이에서의 일종의 종착점이자 사랑의 결실로 받아들여지는 편이었다. 더불어 개인과 개인의 결합임과 동시에 집안과 집안의 결속이었다.
‘내 결혼에 대해 부모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뭔가 심란했다.
하지만 그런 심란함 이상으로 기분이 묘하게 좋았다. 그래서 그런지 내일 있을 데이트도 무척 기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