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6화
술은 공짜.
안주는 인생 이야기.
무슨 동화에서나 나올법한 가게에서나 할법한 이야기가 아니던가. 한마디로 현실에서는 절대로 찾아볼 수 없는 가게였다.
적어도 유영하가 겪어온 세상에서는.
‘녹음기라도 켜야 하나?’
덤터기를 써서 터무니없는 금액을 낸다면 그것대로 곤란하니까.
유영하는 오른손을 코트의 안쪽 주머니에 넣어서 녹음기를 찾다가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
‘아니, 됐다.’
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터무니없는 소문이나 음해를 받을 때도 있었다. 처음에 그런 일을 겪었을 때 얼마나 억울했던지.
증거가 없으니 결국 목소리가 크거나 여론을 잘 선동하거나. 또는 인맥에 따라서 진실이 결정되었다.
유영하가 처음 겪었던 선배와의 갈등은 결국 인맥에 따라 결론이 났다.
믿어주는 건 아내와 친한 동기 몇 명뿐.
그 일을 겪은 후 유영하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항상 소형 녹음기를 소지했다.
‘이거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에 도움받은 일이 많았지.’
오늘도 그럴 수 있겠지만.
‘뭐 덤터기 써도 얼마나 쓰려고.’
적어도 말은 낭만이 있지 않은가. 요즈음 세상에. 아니, 예전 과거에도 이런 가게가 있었을까.
글쎄.
있어도 금방 망하지 않았으려나.
‘술은 공짜, 안주는 인생 이야기라.’
유영하는 다시 한번 중얼거리며 피식 웃었다.
‘낭만이라.’
그런 삶과 태도를 꿈꾸었던 적도 있었다. 적어도 대학교에 다니고. 또 막 취직했을 무렵까지는 세상에 낭만이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막상 사회를 겪은 후에 낭만이 어째서 낭만인지 알게 되었다.
현실에는 없으니까.
존재할 수 없으니까.
물론 어디엔가 있을 수도 있겠지.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으니까. 누군가는 낭만이 가득 차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을 수도 있을 터.
그러나 유영하에게는 아니었다. 유영하의 주변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유영하는 낭만이란 단어를 잊었다.
최대한 현실적으로. 가족과 아주 어렸을 때부터 사귀어 온 친구를 제외하고는 이해득실을 대부분 철저하게 따졌다.
이따금 감성에 따라서 행동하기도 했으나 최소한의 구분은 했다.
그런데 지금 마주한 가게는 그러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니 주인장이 도깨비 코스프레를 하지 않았나.
“일단 술부터 한 잔 드셔보슈.”
“감사합니다.”
도깨비가 내 온 술병과 잔을 보고서 유영하의 눈에 살짝 커졌다.
‘하얗네.’
요즈음 가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술병과 잔이었다.
하얀 도자기로 빚어진 병과 잔.
다만 잔에 그려진 것과는 다르게 병에 새겨진 문양이 잘 어울리지 않았다. 어린아이가 낙서한 모양새랄까.
“거 이상하슈?”
“하하.”
유영하게 일부러 어색하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조금요? 나름대로 표정 관리에는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눈치가 빠르시네요.”
“거 순간적으로 바로 눈빛이 변하던데. 모르면 바보제.”
“하하.”
“이상하게 생각할 거 없으요. 병에 새겨진 건 우리…… 흠.”
“아드님?”
도깨비가 피식 웃었다.
“아들은 아니고. 뭐어. 그 비슷한 느낌이기는 한디.”
뭔가 속사정이 있는 것일까.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으요.”
“그거야 그렇지요.”
“내 사정을 말하면 아마 믿지도 못할게요.”
“하하. 그럴 리가요. 세상에는 정말…… 터무니없는 일이 많이 일어난다는 걸 알고 있는데요.”
개인의 상식과 가치관으로 재단할 수 없는 일들이 세상에는 넘쳐나기 마련이었다.
“제가 좋아하는 철학자 중 한 명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누구나 자신 시야의 한계를 세계의 한계로 간주한다고요.”
쇼펜하우어의 명언을 유영하는 말했다. 평소에는 오글거려서. 또 잘난 체하는 것 같아서 이런 말을 아꼈지만.
오늘은.
또 장소가.
유영하의 생각 날 것을 그대로 끌어냈다. 하나 도깨비는 그런 유영하의 말에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거 명언이구려.”
“그렇죠?”
“흐. 근디 말이여.”
“네.”
“흐흐. 아니여, 아니지.”
자신이 진짜 도깨비라며 골려주고 싶은 마음이 조금 동했으나 도깨비는 그 욕망을 꾹 내리눌렀다. 안 그래도 지친 사람인데. 괜스레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놀라는 모습을 좀 보고 싶기는 한디.’
그래도 여기에 손님으로 왔으니까.
‘놀래주는 건 다른 놈들로 하면 되니께. 은후 도령의 허락은 맡아야 것지? 예전처럼 멋대로 굴면 낙원에 피해가 갈 수도 있응께.’
도깨비는 그냥 웃으며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일단 한 잔 마시고.”
“네.”
“여 도미도 먹고.”
“감사합니다.”
“그다음에 인생 이야기 좀 해 보셔. 뭐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는디. 안 하면 안줏값은 내고 가야혀?”
“하하. 이야기하면 진짜 공짜인가요.”
“고럼.”
“하하하하하.”
정말로 낭만이 있는 가게였다.
한결같이 이렇게 말하는 걸 보아하니 진짜로 돈을 안 받을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허.’
술맛이 일품이었다.
‘일반적인 술이 아닌데?’
맛이 기깔났다.
‘뭐지?’
그거야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술집을 만들며 손님의 기준을 정할 적에 도깨비는 지친 이들을 위로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 위로의 의미는 정신적인 것을 뜻했으나 은후는 한 발짝 더 나아갔다.
- 기왕이면 육체의 피로도 풀고 가면 좋겠죠.
현대 사람들은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나면 피로를 달고 살기 마련이었다. 과학의 발달로 낮과 밤의 경계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또한 먹고살기 바빠서 운동을 못 하는 사람도 많았으며 먹는 걸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경우도 부지기수. 그래서 의학적으로 건강하다고 정의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 어떻게?
- 술집에서 술을 마시겠죠.
- 그렇제?
- 그 술에 마법을 부려보려고요.
물론 그 술로 모든 피로를 가시게 하거나 앓던 병을 없앨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 전보다 건강하게 만들 수는 있었다.
게다가 그런 효능 외에 맛은 기본이었다.
그렇기에 유영하는 술을 마시면서 바로 생각했다.
일품이라고.
‘단골이 될지도 모르겠어.’
뭔가 피로도 가시고 건강해지는 느낌까지 들었다. 유영하는 단순한 착각이라 여겼으나 실제로 그러했다.
“하. 좋네요.”
“그체? 우리 도령이 신경을 좀 많이 썼구마.”
유영하는 잠시 고민하다 도깨비에게 물었다.
“혹시 이거 한 병만 따로 사서 포장해 갈 수는 없겠습니까? 아내에게도 주고 싶은데요.”
“흐음. 글씨. 귀한 술이라 손님당 한 병으로 정해놨는디 말여.”
“그러면 아내와 한 번 다시 와야겠네요.”
“다시 말이제.”
도깨비가 중얼거렸다.
‘거 그런 손님도 좋지만 말여.’
그럴 거라면 이런 형태의 술집을 만들지도 않았을 터였다.
한 번 방문한 손님은 어지간해서는 다시 올 수 없다고 규칙을 정했다.
언제나 예외가 있는 법이기에 확실히 못을 박은 건 아니지만.
‘술 때문이라면 안 되것지.’
그때 구미호가 슬그머니 다가와 유영하에게 물었다.
“아내 분을 무척 좋아하시나 봐요?”
“아, 네. 그렇죠.”
“후후. 그래요. 여보.”
“응? 와?”
“한 병 정도라면 괜찮지 않을까요. 그 정도는 도령도 뭐라고 하지 않을 텐데요.”
“그거야 그런디. 쯥. 거, 이름이 뭐요?”
“유영하라고 합니다.”
“인생 이야기 좀 해 보쇼. 내 마음에 들면 한 병 싸 주리다.”
무척이나 좋은 술.
맛있는 안주.
좋은 분위기.
특히나 부부로 보이는 주인장 내외가 자신과 아내를 보는 것 같아서.
“뭐부터 이야기해야 할까요.”
유영하는 과거를 더듬으며 자신의 인생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원래라면 그런 이야기조차 약점이 될 수도 있을 거로 여겨서 말을 아꼈을 터인데.
“그러니까…….”
* * *
다음 날.
유영하는 눈을 번쩍 뜨며 급하게 시간을 확인했다.
‘출근 시간이……!’
아.
‘오늘 일요일이지.’
빨간 날이었다.
“어우.”
뭔가 무척이나 개운한 느낌.
기지개를 켠 후 거실로 나가자 언제나 그러하듯 아내가 있었다.
“우리 아들이랑 딸은?”
“둘 다 자고 있어.”
“그래?”
“일요일이잖아. 자기도 푹 자라고 일부러 안 깨웠지. 배는 안 고프고?”
유영하가 잠깐 고민하다가 답했다.
“조금?”
“잠깐 기다려. 밥 차려줄 테니까.”
“아니, 됐어. 이따가 점심이나 같이해.”
“괜찮겠어?”
“그럼.”
유영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아내 옆에 앉았다.
“잠깐만 쉬다가 씻고 집안일 좀 도와줄게. 빨래는?”
“돌리는 중인데. 그나저나 여보.”
“응?”
“무슨 좋은 일 있어?”
“딱히? 왜?”
“안색이 좋아 보여서. 근래 들어서 제일 좋은 거 같은데?”
그런가.
‘그나저나 좋은 일이라.’
있었다.
‘그 가게 무척이나 좋았지.’
게다가 술.
“어제 말이야.”
“응.”
“내가 진짜 좋은 술집을 찾아냈는데. 다음에 한번 같이 가자.”
“술. 그러고 보니 우리 같이 술 안 마신 지도 오래됐네.”
“그러니까. 거기서 파는 담금주가 말이야 일품이더라고. 진짜 맛있어서 내 한 병 싸달라고 해서 가져왔지.”
유영하 아내의 눈빛이 반짝였다.
“어제 가지고 들어온 술 말이지? 되게 고급스러워 보이던데. 선물 받은 게 아니었어?”
“어.”
평소 술을 그다지 즐기지는 않지만 마실 때는 마시는 남편이었다. 게다가 먹는 것에 있어서 입맛이 무척이나 까다로웠다.
정확히 말하자면 대부분 뭐든지 잘 먹으나 평가에 냉정했다. 그런 남편이 이토록 칭찬한다면 기대할만한 술집이란 소리였다.
“게다가 좀…… 특이했어.”
“뭐가?”
“술은 공짜. 안주가 인생 이야기라고 하더라.”
“실질적으로 그냥 다 공짜란 소리 아니야? 그게 말이 돼?”
“그러니까 말이야.”
유영하가 머리를 긁적였다.
‘다시 생각해보니 진짜 이상하네.’
분명히 산책하다가.
‘위치가…… 위치가.’
어디였더라.
뭔가.
너무도 흐릿했다.
‘어?’
분명히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했는데. 자신처럼 사이가 좋아 보이는 부부가 운영하는 술집이었고.
‘게다가 술.’
그래.
‘꿈은 아닌데.’
유영하가 미간을 찌푸렸다.
‘어쩌지.’
위치가 기억이 나지 않는데.
아내가 저토록 기대하고 있는데.
‘어, 음.’
유영하가 어색하게 웃자 아내가 말했다.
“그나저나 다행이다.”
“뭐가?”
“얼굴이 펴서. 요새 자기 되게 날카로웠던 거 알아?”
“그랬나?”
“그래. 애들도 눈치 보고 있었는데. 몰랐지?”
“그…….”
“그래서 무슨 일 있나 싶어서 걱정 많았다고. 항상 자기는 그게 문제야. 무슨 일 생기면 말 안 하고 혼자 끙끙 앓지. 그래도 잘 해결은 됐나 봐?”
“뭐어…….”
승진은 누락됐지만.
“미안. 잘할게.”
“으이구. 알았으면 됐어.”
더 힘을 내야지.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 * *
그 무렵.
“은후야아! 이거 봐봐!”
수호령이 은후에게 자신이 만든 조각상을 자랑했다.
“잘 만들었네?”
“응응. 그렇지?”
요새 들어서 수호령은 새롭게 취미를 찾았다.
바로 조각이었다.
아이들에게 선물하거나. 혹은 새롭게 생긴 도깨비의 술집에 장식을 목적으로. 조금이나마 자신이 술집에 도움이 될 일을 찾는 과정에서 재미까지 찾을 수 있었다.
“나나. 그리고 나중에.”
“응?”
“아이들을 위한 술집……은 안 되겠고!”
“응.”
“놀이터를 만들어보고 싶어.”
“놀이터?”
“응. 공원은 쉼터 느낌이잖아.”
“그렇지?”
“그러니까. 같이 놀 수 있는 놀이터. 축제처럼 말이야. 평소에도 같이 뛰어놀 수 있는 느낌으로. 괜찮을까?”
수호령의 요청에 은후가 고민하다가 답했다.
“안 될 것도 없지? 술집처럼 손님이랄까. 놀이터에 올 수 있는 아이나 방문 횟수나. 그런 건 좀 생각을 해 봐야겠지만.”
“응응.”
그나저나 아이인가.
‘한결같네.’
하기야 그러니까 아이들을 위한 공원의 수호령이지.
은후가 웃었다.
“그리고, 그리고.”
“응.”
“이번에 성호 형이 축제에서 연주한 곡 말이야. 그거 공원에 좀 틀어주면 좋겠는데.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아, 그 곡.”
예전에 수호령의 부탁으로 아이들이라면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곡을 만들겠다며 칼을 갈았더랬지.
최근 열었던 축제 직전에 완성했고, 아이들에게 들려준 결과 무척이나 좋았었다.
“꼭 공원에 못 틀어도 괜찮은데. 나는 그 곡을 많은 아이가 들을 수 있으면 좋겠어.”
음반이라도 내야 하나.
아니면 브이튜브에라도 올려야 하나.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은후가 고민하다 결론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