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5화
과거에도 그렇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 중 삶에 지치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아니, 사람이라면 자주 지치기 마련이었다. 의외로 기쁠 때조차 지치는 경우도 많았다.
게다가 지쳤다는 건 주관이 매우 심한 부분이었다. 본인이 아닌 다른 이가 바라봤을 때 지쳐 보일 법한 일을 해도 막상 스스로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실제로 그렇게 느끼는 경우도 많았으니까.
‘그러니까 지표는 감정으로.’
감정은 솔직하기 마련이니.
게다가 특별한 방법으로 동원해 수련하지 않는 이상 아무리 선천적으로 타고나도 스스로 내뿜는 마나까지 숨길 수는 없는 법.
‘부정적인 마나가 아주 짙을 때. 이 정도면 되려나.’
살아가다 보면 종종 죽고 싶다고 말할 때가 있기 마련이다. 그 안에 내포된 의미는 실제로 목숨을 끊는다는 게 아닌 그 정도로 힘들다는 뜻. 그런 말을 저도 모르게 내뱉을 정도.
‘혹은 그 직전.’
물론 부의 감정을 품은 마나의 농도를 측정하는 방법으로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다. 애초에 지쳤다는 감정을 콕 집어서 측정하는 것 자체가 은후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었다.
애초에 감정이란 복잡하며, 하나가 아닌 여러 가지가 얽히고설켜 있는 법. 그래서 처음에 은후도 감정 마나를 다룰 때 뭉뚱그려 다루었다. 긍정, 부정, 분노, 슬픔 등.
‘하지만 긍정에도 부정이, 분노 속에도 슬픔이, 기쁜 와중에도 증오가.’
사람이 처할 수 있는 환경은 다양했기에.
‘긍정, 부정, 분노, 슬픔, 억울함, 불안, 사랑, 욕망…… 정말로 모든 감정이 총집합하는 경우도 있었으니까.’
언제였더라, 그토록 다채로운 감정이 함께할 수 있다는 걸 느꼈던 건.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감정의 측정.
그런데 지쳤다는 것 또한 감정일까.
‘기분이라고 표현하는 게 옳을까.’
감정이란 어떤 현상이나 일에 관하여 절로 일어나 느끼게 되는 기분이니까.
‘…….’
덕진 공원의 뒤편, 공간이 괴리된 곳에서 은후의 사고가 천천히 침잠했다.
* * *
건물을 만드는 것, 길을 조성하는 것 등, 그런 일은 은후가 마음만 먹는다면 하루 채 걸리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은후는 굳이 그러지 않았다.
“어이쿠! 조심해야제!”
낙원에서의 삶은 무료했다. 수호령을 제외한 이들에게 있어서.
안정과 평화가 보장되는 곳이었으니까. 게다가 다른 정령들과 다르게 낙원의 주민들은 존재 유지에 위협을 받을 요소가 없었다. 적어도 은후가 건재하는 이상은.
그렇기에 매일이 한가했다. 물론 한가함과 반복되는 일상 속의 화목함은 더할 나위 없는 가치. 그러나 계속 이어지면 그것도 지루해지기 마련이니.
해야 할 일을 억지로라도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은후는 최소한의, 예컨대 손님을 구분하는 마법진 설치와 같은 정말로 꼭 필요한 일이 아닌 이상 지켜만 봤다.
“강보다는 역시 연못이 좋겠어.”
“나는 강도 좋을 거 같은데.”
“왜?”
“목욕하기 좋잖아.”
“샤워 시설이 낫지 않아?”
“그다지. 내키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시야가 확보되지 않아서 뭔가 불안해.”
개구리와 호랑이 신선은 연못이냐 강이냐를 두고 여전히 논쟁하고 있었으나, 결국 연못으로 굳어져 가는 것 같았다.
“곤충 전시장 같은 걸 만들면 안 되겠죠?”
“당연히 안 되겠죠.”
“아쉽네요.”
“요새 너무 곤충에 진심이신 것 같은데. 곤충을 위한 노래라니.”
“무리한 부탁이었나요?”
“전혀요. 오히려 새로운 도전 정신이 생겨서 좋네요. 곤충이라. 동물이라면 모를까, 곤충도 내 음악으로 감동하게 할 수 있을까 의문이었는데 이번에 해결할 수 있겠어요.”
성호와 연후는 길을 어떻게 꾸미느냐에 관하여 이야기 중이었다. 그러다가 주제가 좀 이탈한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은후는 내심 안심이 되었다. 데면데면했던 성호와 연후가 이제 제법 친해진 모양이어서. 낙원의 도깨비 술집 짓기 프로젝트가 왁자지껄함 속에서 이어졌다.
* * *
덕진 공원의 후문 주차장의 뒤쪽 거리에는 오래된 가게들과 집이 있었다. 전통 찻집과 요새 편의점이나 마트와 다르게, 90년대에나 볼 수 있을 법한 오래된 슈퍼.
그 위쪽으로 쭉 올라가다 보면 전북대학교의 학생들이 주거하는 기숙사가 있었다. 그 외 전북대학교의 운동장이라든가, 학군단도 그 위쪽에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전북대학교 학생들은 덕진 공원의 후편 길을 제법 자주 이용하는 편이었다. 유영하 또한 그런 학생 중 한 명이었다. 기숙사에 거주하면서 기분 전환을 하거나, 또 과제에 지쳐 한숨 돌릴 때.
그리고 자주 걸었다. 이쪽 길을.
데이트를 위해서.
대학교에 한창 다닐 무렵에.
‘예전 생각나네.’
유영하는 이제 마흔이 코앞이었다. 삼촌이나 아저씨라는 말이 너무도 익숙해진 나이. 그래서 그랬을까. 왠지 모르게 요즈음에는 과거를 회상하는 때가 잦았다.
‘여기서 데이트할 때가 참 좋았는데.’
운이 참 좋았다.
덕진 공원, 지금 아내를 처음 만나게 된 곳.
그건 우연이었다.
유영하의 취미는 산책이었다. 그냥 길을 걷는 것이 좋았다. 날씨와 무관하게, 날이 맑으면 맑은 대로 훤해서 좋았고,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우산을 건드리는 빗소리가 기분이 좋았다. 눈이 오는 날에는 세상이 하얗게 물드는 것만 같아서 상쾌했고.
‘군대에서는 아니었지만.’
눈이 지긋지긋했다.
비와 눈이 애매하게 섞여서 내리는 날이었다. 보기 드문 날씨에 유영하는 덕진 공원으로 산책을 나섰고, 같은 대학교 동기였던 아내가 우산이 없어서 몸이 젖는 걸 목격했다.
‘우산 씌워 줄까요?’
무슨 생각에서 그랬을까.
어떤 감정을 느껴서 그랬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적잖이 용기를 내어서 건넨 한마디.
‘영하…… 씨?’
‘같은 동기인데 존댓말은 괜찮아요.’
‘그러는 영하 씨도 존댓말 중이잖아요.’
‘어, 그러면 말 놓을까?’
‘……그래.’
그렇게 시작된 우연한 만남이 결혼까지 이어졌고, 지금은 아들과 딸 하나를 나아서 한 가정의 가장이 되었다. 하지만 요새는 적잖이 지치는 느낌이었다.
여전히 아내는 좋았다. 아들과 딸을 바라보면 없던 힘도 솟아났다. 직장을 때려치우지 않고 여전히 지금도 잘 다니는 이유는 그래서일 것이다.
여느 가장이 그렇지 않겠느냐만, 가족을 위하여. 하나 오늘 승진에서 미끄러진 건 속이 쓰렸다. 가족을 위한 것도 있지만 나름대로 욕심이 있었기에 회사 생활을 열심히 했는데.
‘그냥 적당하게 살아야 하나.’
유영하가 그런 생각을 하다가 흠칫하며 가볍게 혀를 찼다.
“쯧.”
지친 모양이었다.
평소에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데.
‘적당히라니.’
뭐든지는 아니지만 해야 할 일이라면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그런 신조를 가지고 지키며 살아온 나날들이었는데.
“후우.”
한숨이 폭 나왔다.
‘그까짓 승진…… 아니지.’
그까짓이라고 표현할 만한 건 아니었다.
‘내년에 딱 한 번 기회가 남았나.’
다음에도 승진에서 미끄러지면 임원을 바라보기는 힘들 터.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게 있다면 딱히 주위에 이번에 승진할 거라며 자랑하지 않은 것.
철이 없던 시절에는 그랬던 적도 있었다. 이제 곧 승진이라며. 만약 큰소리를 뻥뻥 친 이후에 승진에서 미끄러지기라도 했다면 고개를 들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자신의 실망을 가족들에게 표출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내는 그런 유영하에게 이따금 섭섭하다고 말했다. 기쁜 일도 그렇지만 힘든 일이 있으면 자신에게도 말해 달라면서.
아내니까.
‘당신은 내가 혼자 끙끙 앓고 있으면 그런 생각 안 들겠어?’
그걸 머리로는 이해했으나, 막상 아내에게 차마 말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평소와 다르게 산책을 나왔다. 그리고 걷고 걷다 보니 어느새 추억이 가득했던 덕진 공원 근처에 도착했다.
‘여전하네.’
조금은 달라졌지만, 그래도 거의 달라지지 않은 거리 풍경이었다.
‘저 슈퍼는 여전하고.’
아내와 자주 들렀던 찻집도.
‘응?’
잠시 멈춰서서 주위를 둘러보던 유영하의 간판 하나가 눈에 띄었다.
‘도……깨비 주점?’
세련되고 모던한 느낌을 풍기는 입간판에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명칭.
‘지친 이들을 위로해 드립니다. 술이 공짜, 안주는 인생 이야기? 내키면 들어오세요?’
뭐야 저게.
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술이라.’
가볍게 한잔 정도면 괜찮을까.
왠지 모르게 이끌렸다.
그래서 유영하는 입간판 뒤로 나 있는 오솔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런 길이 있었나.’
없었던 거 같은데.
‘새로 뚫었나?’
뭐.
‘딱히 중요한 건 아니지.’
그런 유영하의 눈에 어느 순간부터 들어온 풍경은 바다였다.
‘뭐야.’
유영하의 머리에 물음표가 연신 떠올랐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주위를 휙휙 둘러봤다.
‘분명히 나는 산책하고 있었는데.’
왜 갑자기 바다가.
순간 유영하는 오싹함이 들었다. 하나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해지는 것도 느꼈다. 마음이 탁 트인달까. 그렇다고 갑자기 변한 풍경에 발걸음을 떼기도 주저하게 되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유영하의 눈에서 바다가 사라지고 오솔길이 나타났다. 유영하는 탄식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순간적으로 자신이 헛것을 봤노라고.
‘지치긴 내가 많이 지쳤던 모양이야. 승진에 미끄러진 거에 실망도 무척이나 컸던 거 같고.’
기회가 아직 괜찮다고 애써 되뇌었는데.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그래, 바다를 보아서 그랬을까.
환상이어도 그 풍경이 유영하의 마음을 조금은 가볍게 만들었다. 또 스스로에게 더욱 솔직해질 수 있었다. 유영하는 그게 기꺼웠다. 그래서 도깨비 술집이란 곳도 기대가 되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가게를 보니 선술집이었다. 손님이 서서 마신다고 하여 선술집. 이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옛 과거의 향취에 유영하는 내심 마음이 기꺼웠다.
‘어느 순간부터 아예 안 보였는데.’
선술집이라.
“어서 오세요.”
한복을 입은 여성이 유영하를 맞이해 주었다.
구미호였다.
“아, 네. 안녕하세요. 새로 개업했나 봐요?”
“호호, 네, 며칠 안 되었어요. 손님이 처음으로 방문하셨고요.”
“아하, 제가 첫 손님이었군요.”
“네.”
구미호가 부드럽게 웃었다.
“선술집 형태를 취하고는 있지만 의자와 테이블도 마련돼 있으니 서 있기 힘드시면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그러면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좀 오래 걸었더니 지쳐서요.”
“그럼요. 여보!”
“오야!”
이윽고 나타난 도깨비.
‘응?’
도깨비.
전형적인 도깨비의 모습에 유영하의 눈이 커졌다.
‘어, 그러니까 코스프레인가, 뭐, 그런 건가?’
머리에 뿔이라니.
“하하, 안녕하세요.”
“오, 안녕하신감. 내 술집에 어서 오시구려.”
아니.
‘그런데 뭐가 저렇게 자연스러워?’
콘셉트겠지, 설마 진짜 도깨비겠어.
상식적으로 절대 그럴 수가 없다고, 이성적으로는 알고 있으나 유영하의 눈에는 억지로 꾸미지 않은 느낌이었다.
“오늘은 좋은 도미가 들어왔수만, 회는 좋아하시는감?”
“아, 네. 회 좋아하죠.”
“그려. 술은?”
“좋아하는 편입니다.”
“좋수다. 잠시만 기달리시구려.”
“저어, 그런데.”
머뭇거리는 유영하를 도깨비가 의아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뭐요? 할 말 있으면, 거 시원하게 하시구려.”
“가격은요?”
“입간판 안 보고 들어왔수?”
“술은 공짜 안주는 인생 이야기……요?”
“그려요.”
아니.
‘그게 진짜였다고?’
뭐지? 대체, 이 술집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