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4화
생일, 태어난 날.
어렸을 때는 축하받는 것이 당연한 줄로만 알았다. 부모님부터 시작해서 주위 친구들 모두가 축하한다고 말해 줬고 파티까지 열었으니까.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알게 되었다. 생일을 챙기는 것은 의외로 귀찮은 일이라는 걸. 심지어 가족끼리도. 왜냐하면 너무 바쁘니까, 그리고 1년에 1번은 은근히 빨리 돌아오니까.
‘언제부터였지.’
생일을 굳이 챙기지 않게 된 건.
‘대학교…… 때부터였었나.’
다른 집은 모르겠지만, 이하연의 집안은 음력으로 생일을 따졌다.
‘생일을 음력으로? 하기야 우리 집도 그랬었는데.’
‘지금은 아니야?’
‘어, 그게 은근히 귀찮더라고. 우리는 보통 양력으로 날짜를 따지니까.’
‘우리 집도 그래서 바꿈.’
‘우리는 처음부터 양력으로 챙겼는데.’
대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 신입생 환영회에서 생일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
‘생일을 뭐 하러 굳이 챙겨? 귀찮게.’
‘아, 그건 동의.’
‘귀찮기는. 그게 다 성의 아니냐.’
‘생일 서로 챙겨 주면 좋지 않아?’
‘그냥 다 같이 안 챙기면 얼마나 편해. 1년에 1번이라도 가족부터 친구들까지. 어휴, 그거 다 챙기려면 피곤하다, 피곤해. 그렇게 챙기다가, 어? 한 명이라도 실수로 빠트리면 X라 서운해하고.’
‘내가 챙기면 뭐 하냐. 난 꼬박꼬박 챙기는데 챙겨 주는 사람이 내 생일 빼먹지? 엄청 서운하다. 그런 일 만드느니 그냥 서로 안 챙기는 게 나음.’
참 쓸데없다면 쓸데없는 주제로 한동안 술자리에서 불타올랐었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다른 주제로 넘어가기는 했지만. 그 이후였던가, 아니면 좀 더 지난 후였던가.
생일.
정말로 까맣게 잊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의 생일이어도, 가족이나 친구들의 생일이어도, 자연스레 서로 챙기지 않고 지나가게 되었다.
‘으, 모르겠네.’
이하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하늘을 바라봤다.
이제는 완연히 어둠이 찾아온 밤. 멍했던, 몽환적으로만 보였던 노을은 사라지고 밤하늘에 구름과 별이 총총히 박혀 있었다. 이하연은 은후와 헤어지고도 한동안 집에 들어가지 않고 계속해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은후와도 했었지.’
은후를 배웅하고 포옹한 뒤에 가벼운 베이비 키스를 했다.
‘어우.’
은후의 차량이 멀어져 가는 걸 바라보았다.
‘얼른 들어가야 한다?’
‘걱정하지 말고, 다음에 또 봐.’
‘그래, 조만간.’
‘응.’
이하연은 마지막으로 나누었던 대화가 문득 떠올랐다.
‘이러고 있는 거 알면 은후가 혼내려나.’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때.
“딸?”
“엄마.”
이하연의 어머니가 퇴근하며 딸을 발견했다.
“뭐 하고 있어? 데이트 늦게 끝났어?”
“아니, 좀 전에?”
“그래? 저녁은?”
“먹었지.”
이하연의 어머니가 빤히 딸을 바라봤다.
“볼 빨개진 거 봐라.”
그리고 캠코더가 들린 오른손을 잡으며 물었다.
“아직도 촬영 중이야?”
“어, 어?”
이하연이 캠코더를 확인한 후 말했다.
“하고 있었는데 꺼졌네. 배터리 다 떨어졌나 봐.”
“손이 엄청 차네. 언제부터 이러고 있던 거야?”
“그게.”
“…….”
딸의 상태가 좀 이상하다고 이하연의 어머니는 느꼈다. 평소와 다르게 얼이 완전히 빠진 느낌이랄까.
‘반지?’
쇼핑백은 그렇다 치고.
“웬 반지야?”
“오늘 받았어.”
“커플링? 요새 애들은 빠르네. 사귄 지 얼마 안 되지 않았던가?”
“빠르기는. 그리고 이거, 생일 선물로 받은 거다.”
“생일?”
“어.”
이하연의 어머니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엄마나 아빠보다 낫네. 남자 친구라고 생일도 다 챙겨 주고.”
“뭐어.”
“미역국도 안 끓여 준 지 오래됐지?”
“오래는 됐는데, 괜찮아.”
“그래도.”
“하여간 얼른 들어가자.”
미안해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기 싫은 이하연이 발걸음을 옮겼다.
‘엄마 생일이 언제였더라?’
올해 엄마도, 아빠도, 부모님의 생일은 모두 지났다.
‘내년에는.’
좀 챙길까.
‘은후 생일도 챙겨야지.’
먼저.
‘먼저 챙겼으면 더 좋았을 텐데.’
생일.
‘……챙기면 좋겠지?’
이하연이 결심했다.
앞으로는 부모님과 연인인 은후, 그 외에 다른 친구들의 생일도 챙길 수 있으면 좋을 거 같은데.
‘으으.’
오늘은 왠지 모르게 푹 잘 수 있을 거 같았다.
* * *
며칠 후.
“그러니까 말여, 난 선술집이 좋을 거 같다니께.”
“선술집, 좋죠.”
“가는 길은 어떻게?”
“거, 초가집이랑 기와집 좀 가져다 놓고, 어, 돌담이랑 볏짚으로다가…….”
“연못도 있으면 좋을 거 같은데.”
“기타 연주할 장소도 있으면 좋겠어요.”
덕진 공원의 낙원에서 주민들이 하나의 주제로 이런저런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도깨비의 주점에 대해, 술집의 형태부터 어떻게 꾸미느냐 등등.
주체는 어디까지나 도깨비였다.
하지만 도깨비는 홀로 의견을 고집하지 않았다. 기왕이면 다른 주민들의 의견도 적극 수렴하고자 했다. 구미호의 경우엔 남편인 도깨비가 원한다면 뭐든지 좋다는 느낌이었기에 한 발자국 떨어져서 웃고 있었다.
‘나도 비슷하기는 한데.’
아예 의견이 없지는 않으니까.
‘그래도 좀 터무니없었나.’
은후가 피식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은후가 낸 의견 중 하나는 술집으로 가는 길을 하늘에 만들자는 것이었다. 어차피 매번 꾸준하게 들를 손님을 받을 건 아니었다.
술집에 제일 중요한 건 주인도 주인이지만 손님이었다. 그리고 그 손님을 어떻게 받느냐에 관한 기준은 이미 합의를 보았다. 예전처럼 단순히 영능에 소질이 있다고 손님으로 받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조건을 명확하게 했다.
첫 번째는 삶에 지친 사람일 것.
두 번째는 딱 한 번, 다시는 방문할 수 없게끔. 예외가 나중에 생길 수도 있겠으나, 일단 기본적으로 그랬다.
또한 방문 이후에는 기억이 흐려지게끔 조처하기로 했다. 위치라든가, 대화를 나눈 대상에 관하여. 보안을 위해서였다.
‘그나저나 도깨비 삼촌도 생각이 참 깊단 말이지.’
두 번째 조건이야 안전을 위해서 그렇다고는 하지만, 첫 번째 조건은 전적으로 도깨비의 의견이 반영된 것이었다.
‘세상을 둘러보고 깜짝 놀랐당께.’
은후에게 도움을 받고 낙원의 주민이 된 이후, 도깨비는 구미호와 함께 이따금 전주 시내와 원래 가게가 있던 용산 근처를 돌아다녔다. 데이트를 위해서.
아무리 낙원의 주민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낙원에 갇혀서 사는 건 도깨비 구미호 부부가 바라는 바는 아니었다. 낙원의 안전에 해가 되지 않는 한, 어느 정도 자유를 원했다.
물론 은후는 그 바람을 이해하고 납득했다. 큰 걸 바라는 건 아니니까. 아무리 어떤 단체에 소속되었다고 한들 자유를 침해하는 건 말이 안 되었으니까.
‘어느 정도 구속은 받겠지만.’
게다가 도사니, 주술이니 마법과 비슷한 이능이 사라진 시대였다. 또 현시점에서 도깨비와 구미호를 위협할 수 있는 단체나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으니.
그래도 혹시 몰라 은후는 도깨비 구미호 부부를 위하여 아티팩트 몇 개를 만들어서 챙겨 주었다. 이후 도깨비는 구미호와 함께, 때로는 홀로 전주와 용산을 거닐었다.
‘나중에는 다른 도시도 가 볼 거구마. 허, 내가 알던 곳들이 많이 바뀌었으.’
그러다가.
‘근데 말이여, 왜 이렇게 지친 사람이 많은가 잘 모르겠단 말여. 살기는 너무 좋아진 거 같은디.’
시대가 변해서 좋은 점이 참 많았다.
‘먹거리도 풍부해지고, 어, 생활도 편리해지고 말여. 즐길 거도 엄청 늘어난 거 같단 말이지. 그 티브이나 콤퓨타라는 게 물건이여, 물건. 근디, 허.’
나쁜 점도 많아졌다.
‘다양해졌다고 해야 하려나. 흐, 내 구체적인 사정을 잘 몰라서 이해는 잘 안 가는디, 감정적으로 지친 인간들이 너무 많은 거 같으이.’
그래서 도깨비는 이번에 차릴 주점의 콘셉트를 확실히 했다. 지친 현대인을 위로해 줄 수 있는 술집. 물론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고민이나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겠지.
‘허나 잠깐이나마 위로받고 용기를 얻고, 조금이라도 지친 마음을 쉴 수 있다면, 거 얼마나 좋것어.’
그리하여 시작된 토론.
‘술집에 오는 길부터 말여, 좀 경치를 보고 마음이 풀렸으면 좋것는디, 어떻게 길을 만드는 게 좋겠으? 다들 의견 좀 내 봐.’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때때로 위로를 받는다. 드넓게 펼쳐진 하늘, 아스라이 떨어지는 별똥별, 연하게 가로등이 켜진 도로에 내려앉는 노을 등등에.
‘하지만 개개인이 보고 싶은 풍경은 제각기인 법이지.’
은후가 결론을 내렸다.
“자, 집중!”
은후가 외쳤다.
“술집에 가는 길은요, 방문하는 손님이 원하는 경치를 보여 주는 거로 하죠.”
은후의 말에 낙원의 주민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으잉? 그게 말이 되남?”
“되고말고요. 환상을 보여 주면 되는 일이니까요.”
감정을 읽어서.
은후에게 있어서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문제가 있다면 그러려면 항상 은후가 그 근처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만.
‘천도복숭아 나무.’
도깨비의 술집도 결국 천도복숭아 나무를 중심으로 한 낙원의 권역이니.
‘천도복숭아 나무를 중심으로 술식을 짜 올려 마법진을 그리면 충분해.’
그간 틈틈이 열심히 연구한 보람이 있었다.
“흐음. 거, 도령이 그렇게 말하면 믿겠지마는, 딱히 바라보고 싶은 경치가 없는 인간일 수도 있잖나? 진짜 지친 인간이면 어찌하고?”
“그럴 때는 그냥 평범한 길을 보여 주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일단 평범한 오솔길에 개구리가 말한 연못도 근처에 만들고, 연후 씨가 말한 벚꽃 나무도 심고요. 그러니까 손님들에 관한 걱정은 하지 마세요.”
손님들이 술집에 방문하는 길은 환상을 현실처럼 보이게끔 할 것이니.
“여러분들이 원하는 대로 길을 꾸며 보시죠. 저희가 자주 왕래할 곳이 될 텐데요.”
“오, 그거 좋다!”
수호령이 외쳤다.
“나, 나! 그러면 나는 풍등이 있었으면 좋겠어!”
그제까지 가만히 있던 수호령이 적극 자신의 의견을 펼치기 시작했다. 수호령은 손님에는 아이가 포함되지 않았기에 큰 관심도 없었으나, 딱히 생각나는 바가 없어서 조용히 있었다.
“그리고 삼촌 가게니까 벽돌길도 있으면 좋겠구, 연후 형이 말한 벚꽃 나무도 근처에 심고, 개구리가 말한 호수도……?”
“호수가 아니라 연못.”
“연못은 너무 작잖아.”
“개구리에게는 연못이 제일인데? 작고 아담하니.”
“에이, 그러면 아담한 강을 만드는 건 어때?”
“강이 아담할 수가 있나?”
“하여튼!”
풍등 외에는 지금까지 다른 낙원의 주민들이 말한 바를 종합해서 말하는 수호령. 그런 수호령의 마음 씀씀이에 다들 흐뭇한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가게 말야, 삼촌.”
“으이.”
“선술집도 하고 일반적인 가게도 하면 되지 않을까? 꼭 가게를 하나만 두라는 법은 없잖아.”
“허어, 그렇제. 그건 그려.”
“그리고, 그리고, 참새랑 뀽뀽이랑 루비가 놀 장소도 있으면 좋을 거 같아! 저번에 TV 보니까 애견 놀이터 같은 게 있던데 참 좋아 보이더라고.”
이윽고 대충 정리가 되었다.
‘한동안 바쁘겠네.’
장소는 덕진 공원의 후문 뒤쪽.
공간을 분리해서 일반적으로는 삶에 지치지 않은 사람은 보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나저나 지침의 정도를 어떻게 설정한다?’
단순히 그냥 지쳤다고 손님의 자격을 줄 수는 없을 터이니.
‘그건 좀 고민을 해 봐야겠는데.’
무척이나 어려웠다.
하지만 어려운 만큼, 마법사의 관점에서는 즐거운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