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9화
사람들은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며 서서히 현실을 깨닫게 된다. 산타클로스가 줬다는 선물은 사실 부모님이 준비해 줬다는 걸. 슈퍼맨은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존재라는 걸.
도깨비라든가 구미호와 같은 존재도 매한가지였다. 가상과 허구의 이야기에서나 나오는 이들이라는 걸 사람들은 안다. 진지하게 구미호나 도깨비가 세상에 실제로 있다고 믿지 않는다.
“와…….”
하지만 은혁이나 현수는 아직까지 아이였다. 산타클로스라는 존재는 세상이 만들어낸 거짓말이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어렴풋하게 구미호나 도깨비와 같은 정령이 세상 어디엔가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그래서였다. 현대에 정령들이 완전히 소멸하지 않고 극소수나마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면서 버틸 수 있었던 건. 전 세계의 어린아이들의 믿음. 이런 이유를 도깨비는 알았다.
“거, 놀라지만 말고 얼른 자리에 앉으.”
평소와 다르게 좀 더 친절한 말투. 그에 감탄 이후 쭈뼛거리던 은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 진짜 도깨비……예요?”
“고럼!”
도깨비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유쾌하게 말을 이었다.
“요 뿔 말이여. 가짜처럼 보이는감?”
“아니요!”
“그렇제.”
“멋있다…….”
저도 모르게 자신의 진심을 중얼거린 은혁 덕분에 도깨비는 좋지 않을 수 없었다.
“크. 멋을 좀 아는 친구구만. 파스타는 좀 좋아하는감? 내 요새 애들이 뭘 좋아하는지 잘 몰라서 말이여.”
“파스타 좋아요.”
“그려, 그려. 거 옆에 친구는?”
“어. 저요?”
현수가 잠깐 머뭇거리다가 답했다.
“저는 피자 좋아해요.”
“크. 피자 좋제. 잠깐 기둘려. 거 도령이랑 령이는 뭐 먹을 겐감?”
은후가 령이를 잠깐 바라본 후 말했다.
“김피탕 부탁드립니다.”
“오야.”
대개 탕수육을 기본 베이스로 김치, 치즈, 피자 토핑 등이 혼합된 퓨전 요리. 처음 들었을 땐 이 무슨 혼종 요리가 있느냐고 의아해하지만 의외로 좋아하는 사람은 좋아한다.
물론 반대로 극도로 혐오하는 사람도 많았다. 한마디로 호불호가 크게 갈리는 음식이었다. 다만 눈에 비치는 형상은 쓰레기라는 말이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김피탕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도 비주얼만큼은 좀 그렇다며 불호하는 이들에게 동의하는 케이스가 대다수. 은후도 처음에 김피탕을 접했을 때 끔찍한 비주얼에 눈살을 절로 찌푸렸었다.
‘막상 먹어 보니 의외로 맛이 있어서 놀랐지만.’
은후가 그런 김피탕을 시킨 이유는 별거 없었다. 축제를 준비할 때 아이들을 위하여 어떤 음식을 준비하느냐에 관하여 도깨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김피탕에 관한 말도 나왔었다. 도깨비가 은후에게 근래 특이하게 먹어 본 음식을 물으면서. 그 과정에서 령이가 김피탕에 관한 존재를 듣게 되었고.
- 오오. 그런 신기한 음식도 있구나. 축제 때 먹어 보면 좋겠는데.
그때의 한마디를 기억한 은후가 령이를 위해 부탁한 것.
‘파스타와 피자도 나쁘진 않겠지만.’
수호령은 이미 먹어 봤으니까.
“저어.”
“응?”
“김피탕이 뭐예요?”
“김치, 피자, 탕수육의 앞 글자를 딴 줄임말이야.”
은후가 은혁의 질문에 친절하게 답했다.
“김치랑 피자에 탕수육이요?”
“어.”
은혁이 신기해하며 물었다.
“맛있나요?”
“글쎄. 직접 먹어 보지 않으면 모를 거 같은데.”
“김치에 피자나 탕수육이라니. 생각도 못 했어요.”
“보통은 하기 힘들지. 그런데 갑자기 존댓말? 처음에는 반말했던 거 같은데.”
은혁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 저어.”
“응?”
“그냥요.”
“그냥은 아닌 거 같은데.”
사실은.
고마워서.
응원을 받은 것부터. 자신의 몸이 좋아진 것도. 은혁은 확신했다. 은후 덕분이라는 걸. 그래서 뭔가 보답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딱히 방법이 없었다.
용돈을 얼마간 모아는 뒀지만, 이거로는 턱도 없을 것 같았고. 그렇다고 자신이 옆의 현수처럼 그림을 잘 그리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열심히 고민했다.
은후를 다음에 만났을 때.
조금이라도 보답을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게요.”
“응.”
개중에 하나가 존댓말을 하는 것.
“그으.”
하지만 왠지 그 이유를 말하기가 부끄러웠다. 그런 은혁의 감정을 알아차린 은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말하기 어려우면 말 안 해도 돼. 아, 그리고 힘들면 언제든지 편하게 말해도 좋아.”
“……네.”
딱히 마나를 움직이지 않아도 표정이나 태도에서 드러나는 수줍음에 은후가 따스하게 웃었다.
* * *
수호령의 등장과 만남.
딱 봐도 사람인 것 같은데. 비슷한 또래인 것 같은데,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다. 근처에 가득했던 눈으로 된 동물들이 함께여서 더더욱. 더불어 함께 하늘을 달렸던 경험.
“야, 야. 방금 진짜 무섭지 않았냐?”
“무섭다기보다 웃겼지?”
눈으로 된 귀신의 집.
무서웠지만 동시에 그렇지 않았던 기묘함. 그건 귀신들이 전부 눈으로 만들어져서. 그래서 그런지 정말로 무섭게 느껴지진 않았다. 이건 일부러 그랬다.
실제로 귀신을 불러올 수도 있는 은후였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귀신의 집은 보통 사람들이 공포 영화를 관람하는 것처럼 약간의 스릴과 재미를 주기 위한 것이었지, 진짜로 무섭게 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그 외 맛있는 음식.
평소에 바라보던 파랑과 다른 하얀 하늘.
“와아.”
몽환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덕분이었을까.
“어?”
아이들은 수호령의 말을 한 귀로 듣고 다른 한 귀로 흘렸다. 놀다 보면 다시 자연스럽게 원래의 덕진 공원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걸. 그건 은혁이나 현수도 마찬가지였다.
“어라?”
정신없이 놀았다.
“우리 관람차 타고 있지 않았어?”
“어, 어어. 맞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때 다시 현실로 돌아온 두 사람. 은혁과 현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은혁아?!”
“어? 엄마?”
은혁의 어머니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어디 갔었어?”
“어, 어어?”
“화장실?”
“…….”
“진짜. 후우.”
은혁의 어머니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오늘 사람 많으니까. 엄마 옆에서 떨어지지 말라고 그랬잖아. 화장실 가기 전엔 꼭 말하라고.”
“……응.”
“그런데. 은혁아?”
“응?”
뭔가 멍한 상태의 은혁. 그 모습이 은혁의 어머니 눈엔 이상하게 비쳤다. 조금 전까지 덕진 공원에 온다며 너무 신나 했으니까. 도착해서도 그랬고. 그런데 지금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넋이 빠진 느낌이랄까.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니지? 몸 상태가 나빠졌다거나.”
“아, 아니. 그게, 엄마. 그러니까.”
은혁이 잠시 당황했다.
“조금 전까지…… 관람차.”
“관람차?”
찰나의 꿈이었을까.
‘아, 씨. 뭐지.’
은혁이 어설프게 웃으며 말했다.
“놀이동산에서 나중에 관람차 다시 한번 타고 싶어서.”
“그래, 나중에. 몸 좀만 좋아지면 놀이동산 데리고 가 줄게.”
은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현수를 바라봤다.
‘현수와 분명히 함께였는데.’
물어봐야 할까.
물어보면 어디 아프냐고 묻지는 않을까.
아니지.
분명히 관람차 같이 타고 있냐고 물었을 때 맞다고 했으니까. 은혁은 길을 좀 걷다가 어머니의 눈치를 살핀 후 현수에게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야.”
“어.”
“은후 형 기억나?”
“나지.”
“도깨비 아저씨랑 구미호 이모는?”
“이모가 직접 만들었다던 식혜 진짜 맛있더라.”
“그치.”
은혁이 중얼거렸다.
“성호 형 기타 치는 거 진짜 멋있던데.”
“은후 형도. 피아노 정말 잘 치던데? 요 앞에 분수대 있잖아. 눈이 뿜어지는 거 진짜 예쁘더라. 음악 소리에 맞춰서. 저기서는 물이 나오겠지?”
“아마도?”
낙원의 축제에서 겪었던 신비로운 일들.
“눈사람 만드는 것도 재밌었는데.”
“우리가 만든 눈사람이 직접 움직였으니까. 근데 눈싸움은 재미없더라.”
“왜? 난 재밌었는데.”
“씨. 그거야 넌.”
한창 은혁과 맞장구치며 떠들던 현수가 멈칫했다.
“야. 근데.”
“어?”
“시간 말이야.”
“시간이 뭐?”
“아까 내가 시간을 봤거든.”
현수가 분수 옆에 설치된 대형 시계를 가리켰다.
“우리가 여기 도착했을 때 시간이랑 5분도 차이 안 나는 거 같아.”
“5분? 야. 그게 말이 되냐? 몇 시간은 신나게 놀았잖아.”
“……그치. 근데 좀 이상해.”
“뭐가?”
“도깨비랑 구미호가 진짜 있을까.”
“직접 봤잖아. 뿔도 심지어 진짜 만져 보고.”
“그건 그런데. 내 옷 봐 봐. 아까 젖었었다고.”
현수가 입고 있는 티셔츠를 가리켰다.
“근데 지금은 멀쩡……?”
그때.
은혁과 현수의 눈앞에 수호령이 나타났다. 수호령은 두 사람에게 슬쩍 웃으며 손을 크게 흔들었다.
- 잘 가! 나중에 또 놀러 와! 그리고 오늘 여기에서 있었던 일은 비밀이야!
그리고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했다.
“꿈은 아니었던 거…… 같은데.”
“어, 어어.”
오늘.
덕진 공원에 들른 아이들은 저마다 비슷한 경험을 했다.
* * *
현실 시간으로는 하루.
낙원의 시간으로는 며칠.
축제가 끝나고 괴리되었던 시간이 다시 비슷하게 변했다. 이전처럼 완전히 똑같게 되지는 않았다. 그 때문에 은후는 심각하게 낙원의 상황을 살폈으나 이내 안심할 수 있었다.
원인은 천도복숭아 나무. 그리고 천도복숭아 나무와 연결된 건 수호령. 수호령이 이번에 바란 무의식적 바람이 현실과 낙원 사이의 시간을 약간 어긋나게 했다.
아이들이 찰나의 순간이라도 좋으니 자신과 함께 어울리며. 아니, 자신과 어울리지 않아도 좋으니 그저 이곳에서 좋은 시간을 보내고 다시 현실로 돌아갔으면.
그런 수호령의 바람 때문에 천도복숭아 나무가 낙원과 현실의 시간을 어긋나게 했다. 게다가 현재 진행형이었다. 어디까지 어떻게 시간을 다르게 할지는 모르겠지만.
‘크게 문제 될 건 없어 보이네.’
설령 문제가 된다고 해도.
‘해결하면 되지.’
정말로 최악의 경우에는 천도복숭아 나무를 불태우기라도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현재 낙원의 유지부터 여러모로 문제가 생기긴 하겠지만.
그 문제는 은후에게 있어서 불편함과 귀찮음의 문제였다. 수고를 들여야 할 뿐이지, 해결할 수 없지 않은. 그런 은후의 생각을 알아차린 듯 복숭아나무가 스스로 흔들렸다.
쏴아.
뿜어지는 복숭아 향.
명확하게 자신을 향한 향 내음에 은후가 피식 웃었다.
‘영물은 영물인가.’
안심하라는 듯.
그럴 일은 없을 거라며.
미약하게 생겨난 자신의 자아를 올곧게 드러내며 의지를 전달해 오는 천도복숭아 나무. 언제 이렇게 성장했을까. 영성을 지녔다는 건 알았지만.
‘자신의 의지를 드러낼 정도가 되려면 아직 멀었던 거 같은데.’
이번 축제가 계기였을까.
그렇게 은후의 사고가 천도복숭아 나무에게 집중되려고 할 때.
“와아아아아이!”
수호령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지금은 축제를 끝내고 뒤풀이하는 시간이었다. 성공적으로 재밌게, 그리고 잘 끝난 축제. 그래서 그런지 다들 뿌듯해하고 있었다. 은후가 피식 웃었다. 그런 은후에게 도깨비가 곰방대를 문 채 다가왔다.
“도령.”
“네.”
“뭐 별일이 있는감?”
“딱히요?”
도깨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려. 그러믄 얼른 가자고.”
“어딜요?”
도깨비가 눈으로 모닥불이 피워진 곳을 가리켰다.
“어디긴 어디것어.”
수호령과 낙원의 주민들이 놀고 있는 곳.
“산책 시간이 너무 길잖으. 말은 안 해도 령이가 계속 기다리는 거 같던디. 다른 애들도 그렇고.”
“애들이요?”
“성호랑 연후 말이여.”
“애들이군요.”
“흐. 사실 나이만 따지자면 나한테는 다 애들이제. 도령도 그렇제. 도저히 애로는 보이지 않지만 말이여. 여하튼 얼른 갑세?”
은후가 피식 웃으며 도깨비의 뒤를 따라 걸었다.
겨울의 따스한 밤이었다.
* * *
그리고 다음 날.
다시 추위가 찾아온 아침에 도깨비가 은후에게 말했다.
“아, 그리고 도령.”
“네.”
“내 부탁이 하나 있는디.”
“편하게 말씀해 보세요. 무리한 부탁이 아니라면야.”
“내 장사를 다시 좀 하고 싶은디 말이여.”
“장사요?”
은후가 고개를 갸웃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