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9화
호랑이 신선이 낙원의 주민이 되는 것에 관하여 잠정적으로 결론이 났다. 다만 여지를 조금 남겨 두었다. 다른 낙원의 주민들을 비롯한 수호령의 동의도 필요했으니까.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다른 낙원의 주민들과 수호령이 호랑이 신선을 어떻게 생각할지는 확실치 않기에. 물론 긍정적일 것 같기는 하지만 실제로 서로가 만나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건 저에게도 있어서 마찬가지니까요. 그러니 확실하게 주민이 되는 건 서로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후에 결정해야 합니다.”
은후가 동의했다.
아무리 은후가 낙원을 실질적으로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이 부분에 있어서 더 중요한 건 주민들과 수호령의 의견이었으니까. 물론 억지를 부린다거나. 강제로 할 수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럼 의미가 없지.’
어디까지나 처음에.
첫 거름망의 역할 정도만.
“그럼 저는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못다 한 말도, 듣고 싶은 이야기도 있지만 추후 기회가 있겠죠.”
은후의 말에 개구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도령? 이 시간에 어디 가게?”
은후가 피식 웃었다.
“찾아볼 게 있어서. 오랜만에 친구랑 회포나 더 풀라고.”
“어?”
개구리가 당황했다.
‘하룻밤을 머물러도 상관은 없겠지만.’
은후는 호랑이 신선을 응원하고 싶었다. 저 눈치 없는 개구리도 무의식중에 연애 감정을 품고 있는 듯하였으니까. 스스로 자각하지 못했을 뿐.
어느 한쪽의 일방통행이라면. 또는 어느 한쪽이 확 싫어한다면 모를까. 그래서 은후는 호랑이 신선에게 눈짓한 후에 개구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적당히 놀다가 함께 오라고.”
“어?”
“낙원으로. 돌아와야지?”
“어어.”
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올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도.”
“저보다야 저 친구가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그.”
은후가 머뭇거리는 호랑이 신선을 뒤로하고 몸을 일으켰다.
‘진법의 대가라고 했던가.’
개중에서도 특히 환상에 관련된 부분이 주특기라고.
‘그런 능력을 고작 축제에. 아니, 고작이라고 할 건 아닌가.’
어찌 되었든 이번 축제에 한해선 전폭적으로 협조하겠다고 약속했다. 설혹 낙원의 주민이 되지 못하더라도. 물론 그렇게 될 경우 반대급부로 은후는 호랑이 신선에게 존재 유지를 위한 도움을 주기로 했다.
‘어디엔가 얽매이는 게 싫은 건가.’
긍정적으로, 거의 확정이나 다름없이 낙원의 주민이 될 것 같은데.
‘만약 개구리가 아니었으면 낙원에 들어오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겠어.’
은후가 호랑이 신선의 거처를 떠나기 직전 주위를 한번 둘러봤다. 잘 가꾸어진 전형적인 신선의 거처. 그 외에 안쪽에 마련된 가구와 식기들.
‘손때를 거의 타지 않았지.’
그건 아마도.
‘수호령과 비슷하게 아이를 위해서 살아가는 존재이지만.’
어떤 한 특정 구역의 아이들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우리나라 전체에 존재하는 아이들을 위해서. 그런 성향이 크기 때문이리라.
‘뭐.’
더는 고민할 필요 없나.
낙원의 주민이 되면 좋고. 아니어도 딱히 문제는 없다. 이렇게 연을 맺은 것만으로도 은후는 족했다.
* * *
호랑이 신선의 거처를 뒤로한 채 은후가 찾은 곳은 토함산의 한 중턱이었다. 호랑이 신선의 거처로 가는 길에 위화감을 느꼈던 곳. 뭔가 숨겨져 있음을 확신하게 된 장소.
‘……여기쯤인 것 같은데.’
처음에 은후는 쉽게 생각했다. 이상함을 느꼈고 확신하게 되었으니 곧바로 숨겨진 무언가를 찾을 수 있으리라고. 하지만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은후는 여전히 일정한 장소를 빙빙 맴돌고 있었다. 시간이 적잖이 흘러 아침 해가 산을 비추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쯧.’
은후가 가볍게 혀를 찼다.
‘너무 얕봤나.’
현대에 비하여 우위에 있다고 여긴 마법. 하지만 마법도 만능은 아닐진대.
‘하물며 과거에는 뛰어난 능력자들이 다수 있었다고 했지.’
그 시절을 직접 겪은 호랑이 신선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였다. 괴력난신을, 신선을, 정령을 믿으며 과학이 널리 전파되지 않은 시대. 충분히 예상외의 능력자가 등장할 수 있는 환경이었으리라.
‘반성해야겠네.’
무의식중에 어린 오만함.
‘그래도.’
은후가 마나를 끌어올렸다.
‘세월이 너무 흘렀어.’
반성은 반성이고.
사실은 사실.
은후가 결국 빈틈을 찾았다.
자연을 이용하여 무언가를 숨겼다. 하지만 자연도 결국 세월의 흐름에 바뀌기 마련. 하물며 아무리 자연의 흐름에 순응했다고 할지라도 인위적인 손길이 닿은 곳이었다.
처음에는 아마 완벽에 가까웠으리라. 아니, 완벽하다는 말이 어울렸을 터. 그랬다면 은후도 뭔가 이상함을 자각했을지언정 찾아낼 수는 없었을 터.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그러나 시간이 너무 흘렀다.
그 시간이 얼마만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은후가 숨겨진 곳을 파헤치려던 찰나.
‘음?’
은후의 감각에 다른 뭔가가 걸렸다.
‘사람?’
어떻게 해야 할까.
숨겨진 곳을 찾았다. 그러니 지금은 모습을 감추고 나중에 찾아와도 되기는 하는데.
‘그런데 이곳에 사람이?’
평범한 길을 벗어난 곳이었다. 하물며 여타 산보다 높이가 낮고 지세가 험하지 않다고는 하지만 산은 산이요, 그 산에서도 깊숙한 곳. 보통 사람이 찾아올 곳은 절대 아니었다.
‘어찌할까.’
은후가 잠시 고민하며 일부러 자리를 지켰다.
잠시 후.
한 스님이 나타났다.
“거기 누구 계십니까?”
“네, 있습니다.”
딱 봐도 나이를 잔뜩 먹은. 허나 허리가 꼿꼿하고 누가 봐도 정정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스님이었다.
“허허.”
선한 미소를 지으며 스님이 중얼거렸다.
“사람이 올 곳은 아닌데.”
“그러는 스님은 사람이 아니십니까?”
“젊은 시주의 말이 옳습니다. 저도 사람이지요. 이곳에서 사람을 본 건 처음이라 놀래서 말이 헛나왔습니다. 이 나이를 먹고도 아직 모자라는군요.”
“…….”
스님이 불경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이것도 인연인데 좀 걸으시겠습니까?”
“걸어요?”
“산세가 험하기는 해도 산책하기에는 나쁘지 않거든요. 그래서 이따금 제가 찾는 곳입니다.”
“거짓말은 아니신 것 같네요.”
하지만.
“그 외에 다른 목적도 있으신 듯한데.”
미련.
안타까움.
기대감.
스님으로부터 느껴지는 감정의 편린을 읽은 은후가 말했다.
“뭔가를 찾고 계신 것 아니었는지요.”
“……허허.”
스님이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시주 말씀대로입니다. 하지만 수십 년입니다. 제가 이곳을 걸은 지도.”
그러나 성과는 없었다.
‘어찌할까.’
스님의 법명은 종여.
불국사의 주지였다.
‘이야기해도 될까.’
어느 순간부터 역대 주지에서 주지에게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
- 힘든 시기에 불국사가 한 번 무너졌다가 다시 세워지리라. 그 이후 한반도에 큰 내란이 닥치고 외세에 의해 귀한 것들이 모두 빼앗길지니. 그때를 대비하여 토함 깊숙한 곳에 대비하노라.
사찰의 귀물을 어딘가에 숨겼다고.
- 그러니 후대에 한반도에 평화가 찾아오면 그것들을 다시 찾길 바라니.
하지만 결정적인 단서가 되는 이야기는 유실되었다. 사람에서 사람의 입으로 전해졌기에 어쩔 수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저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였던 것뿐일까.
사실 이 전설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주지는 거의 없었다. 게다가 수십 년 넘게 그 전설을 찾아 헤맸음에도 성과가 없었다. 그럼에도 비밀을 유지한 채 주지에게서 주지에게만 이야기가 전해진 건.
‘관습이라서.’
그래.
처음 그 이야기가 만들어질 당시라면 모를까. 어느 순간부터 관습이어서.
‘사실 내가 이 이야기를 들을 때도.’
딱히 중요한 이야기를 듣는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굳이 비밀로 할 이야기도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고. 그런데도 계속 비밀을 지켰던 건 아까 생각대로 관습이라서.
‘또 아는 이도 없어서.’
묻는 이도 없었지.
종여가 중얼거렸다.
“아미타불.”
이것도 인연인가.
토함의 깊숙한 곳에서 수십 년을 왔다 갔다 했음에도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던 사람. 그런데 그 사람이 자신의 심중을 알아차렸다.
‘관습은 꼭 지켜야만 하는 것인가.’
그런 종여에게 은후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따라오시겠습니까?”
종여가 느닷없는 은후의 말에 당황했다. 은후는 그런 종여에게 어깨를 으쓱인 뒤 발걸음을 옮겼다.
* * *
자박자박.
두 사람이 발걸음을 옮겼다.
은후가 종여라는 스님에게 굳이 따라오라는 제안을 건넨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숨겨진 곳으로부터 느껴지는 기감과 종여라는 사람이 품고 있는 기운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똑같지는 않으나 매우 흡사한. 은후는 그것만으로도 숨겨진 곳이 불교와 연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불국사. 그리고 토함산이 품고 있는 정기가.
‘사람이 한곳에 오래 머무르면 그 땅이 품고 있는 기운을 닮아 간다더니.’
물론 그게 티가 날 정도가 되려면 마나에 민감한 체질이어야만 했다. 혹은 마나와 관련된 기술을 습득하거나. 은후가 판단하건대 종여는 전자였다.
‘이세계에서 태어났다면 천재로 이름을 날렸을지도 모르겠어.’
마법사나 정령사가 되었다면 말이다. 마법사의 관점에서 종여는 애석하게도 태어난 시기와 장소가 잘못된 사람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마법사의 관점일 뿐이다.
‘그것도 오만함이지.’
마법사로서의 오만함.
평범한 사람들의 위에 있다는. 나는 보통 사람과 다르다는. 그 다름으로 비롯된 교만은 사실 마법사의 기본 패시브 스킬이나 다름없었다.
그렇지 않은가. 바람을 일으키고, 불덩이를 뿜고. 종래에는 기후마저 조작하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자연스레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기 마련이다.
‘허나 그래도 결국 같은 사람인데.’
마법사의 오만함은 자연스러운 흐름인가.
‘그렇다.’
허나.
‘당연하면서도 당연하지 않다.’
본질은 사람.
‘그러니…….’
발걸음을 옮기며 이어지던 은후의 상념이 깨어졌다.
“시주.”
종여 스님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
은후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언젠가 또.’
뭔가 깨달음의 한 조각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찾아오겠지.’
은후는 마음속을 간질이던 아쉬움을 털어 내며 말했다.
“말씀하시지요.”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말입니다.”
“사람은 사람이지요. 보통 사람이 있고 아닌 사람이 있답니까.”
“……허허.”
“궁금한 게 많으신 줄로 압니다.”
갑자기 풍경이 변했으니.
해가 사라지고 밤이 찾아왔다.
은후가 숨겨진 곳을 찾아 비집고 들어오면서 변한 주위의 광경. 그 때문에 종여가 입을 열은 것이다.
“약속이 있어서 이곳을 찾았습니다.”
“약속이요?”
“네. 이 근처에서 친구의 친구를 소개 받기로 했거든요.”
“친구의 친구 말입니까.”
이상한 말이었다.
이곳에서 누가 살아갈 수 있을 리가 없는데. 하지만 종여는 잠자코 은후의 말을 기다렸다. 애초에 이 만남부터가 범상치 않은 일이지 않던가.
게다가 보통 사람이 있고 아닌 사람이 있냐고 말했으나 종여는 생각했다. 절대로 은후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그건 본질의 의미가 아닌 현상에 관한 의견이었다.
“약속을 위해 이 근처를 지나가다 알게 되었습니다. 뭔가가 숨겨져 있다는 걸요.”
“숨겨져 있다고요.”
“네.”
“그렇다면 이곳은…….”
“무언가를 숨기려면 평범한 방법으로는 힘들지 않았겠습니까.”
평범하지 않은 방법으로 숨겼다는 말이었다.
‘진법.’
그래.
이곳에 무언가를 숨긴 이는 진법의 대가였으리라.
‘호랑이 신선을 뛰어넘는.’
이윽고 은후와 종여에게 토함산의 비밀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