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8화
아이는 호랑이와 마주하며 몸이 굳었다. 생전 처음 보는 거대한 짐승. 사람마다 이견이 있을 수 있으나 개중에서도 왕이라고 불리는 호랑이. 하물며 어린 호랑이도 아니었다. 다 자란 성인도 압도되기 마련인데 어린아이면 오죽했을까.
다행스러운 점이 있다면 호랑이에게 인간에 가까운 지성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엄청나게 착각하여 호랑이가 곶감에 관해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다는 부분이었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이에게 있어서는 영원과도 같은, 하지만 호랑이에게는 찰나의 순간. 호랑이가 울었다.
크르르르릉.
일순 멈췄던 아이의 시간이 흘러갔다.
“히끅!”
아이가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았다.
‘저게 말로만 듣던 호랑이?’
아이가 생각했다.
‘죽어?’
아이는 나이가 어렸다. 그래서 죽음에 관해서 명확히 알지는 못했다. 하지만 어렴풋이 개념은 갖고 있었다. 이 시대에 있어서 죽음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으니까.
‘세상에서 사라지는 거.’
맛있는 것도 이제 먹을 수 없고.
‘또.’
엄마와도 만날 수 없고.
그러니까 죽을 땐 죽더라도.
‘먹고 죽자!’
아이가 생각했다. 동시에 손에 들고 있던 곶감을 입으로 넣었다.
“큽!”
너무 급하게 먹었던 탓인지 체할 것 같지만.
‘도와줄 사람이…….’
맛있다.
‘이대로 죽어?’
죽어.
죽음.
생각이 어지러이 엉키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게 되었다. 다만 선명한 것은 입에 퍼지는 달곰씁쓸함.
“아, 엄마, 곶감.”
아이가 중얼거렸다.
“곶감?”
호랑이가 물었다.
“곶감. 응, 죽기 전에 하나만 더 먹고 싶어.”
아이가 답했다.
“응?”
그리고 이내 당황했다.
달려들지 않는 호랑이.
‘말?’
말을 하는 호랑이.
‘호랑이가 맞나?’
아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호랑이가 말을 한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곶감 하나 주면 살려 주지.”
호랑이가 말했다.
“어어, 곶감 없는데……. 나, 그럼 이제 죽어?”
호랑이가 침묵했다.
배가 고프기는 하지만, 호기심이 먼저라서.
“나중에 만날 때 곶감 하나 가져온다고 약속하면 살려 주지.”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서로의 친분을 다지는 데 제일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저마다 답변은 다를 터였다. 하지만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순간적으로 빠르게 가까워질 수 있는 수단 중 하나는 술이었다.
“크, 이거 맛이 일품이군요.”
은후가 호랑이를 만난 시간은 막 해가 떨어진 저녁. 마침 식사 시간이었으나 딱히 배가 고픈 이는 없었다. 그리하여 마련된 가벼운 술자리.
간단한 안주와 은후가 마법으로 빚은 술. 하나 그 안주도 술도 모두 인세에서 찾아보기 힘든 음식이었다. 자연스레 호랑이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주 오랫동안 긴 세월을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음식은 처음이구나.’
그래, 처음 먹었던 곶감의 맛이 이러했을까.
하지만 냉정하게 따져 보면 추억이 깃든 맛이었다. 그러니 지금 먹고 있는 안주가, 술이 객관적으로 맛은 있지만, 그럼에도 그리운 것은 아주 오래전 먹었던 곶감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레 자신의 과거를 살짝 털어놓았다. 인간 아이를 좋아하게 된 계기를 만들어 준 첫 만남에 관하여.
“그 이후 아이는 순식간에 거짓말쟁이가 되었지요.”
“거짓말쟁이요?”
“호랑이가 말을 하는 것도, 곶감 하나를 나중에 받겠다고 약속하니 살려 주었다는 것도, 대체 누가 믿겠습니까?”
작은 마을이었다. 아이의 난데없는 이야기는 순식간에 퍼졌고, 아이는 순식간에 거짓말쟁이로 몰렸다.
“그래서 곶감을 못 구해 왔다면서 저를 다시 만났을 때 울고불고하는데, 그 모습이 참 안쓰러웠죠.”
호랑이가 처음 느낀 측은지심이었다.
“그 이후에…….”
호랑이가 무어라 더 말하려는 순간, 은후가 조용히 빈 술잔을 채워 주려다 개구리에게 눈치를 주었다. 개구리가 아리송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은후는 혀를 차면서 눈으로 술잔을 가리켰고, 개구리는 그제야 알아들은 듯했다.
“어, 음.”
개구리가 뭔가 말을 하려고 입을 우물거릴 뿐이었다.
“뭐야?”
호랑이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니, 너랑 나랑 술 마실 때는 자작이 기본이었잖아.”
“그래서?”
“은후 도령이 자꾸 눈치 줘서.”
“하아.”
호랑이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뭔가 김이 빠졌다.
맥이 끊겼다고나 해야 할까.
“한 잔 따라 봐.”
“어, 어어.”
개굴.
개구리가 저도 모르게 울며 조심스럽게 호랑이의 술잔을 채워 줬다.
“그간 많이 힘드셨겠어요?”
“아무렴요.”
호랑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쭉 술을 들이켰다. 은후는 그 모습을 잠깐 바라보다, 리어카에서 오늘 낮에 샀던 대형 TV를 꺼냈다. 호랑이가 하다가 만 뒷이야기가 궁금하기는 했지만.
‘오늘만 날은 아니니.’
이 상황에서 뒷이야기를 묻는 건 아무래도 꺼려졌다. 호랑이는 한숨을 폭폭 내쉬며 술을 마시고 있었고, 개구리는 옆에서 눈치를 살피며 쩔쩔매고 있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분위기가 이렇게 된 게 자신 때문인 건 알아차린 듯했다.
“그건 뭔가요?”
“TV라고 불리는 물건입니다.”
“TV?”
“다른 말로는 텔레비전. 전파에 실어 보낸 영상을 재생시키는 일종의 장치인데.”
은후가 피식 웃었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시겠죠?”
“네.”
“만들어진 지 고작 100년 남짓이니 모르시는 게 당연하죠. 딱히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네?”
“무지는 죄가 아니고, 부끄러워할 것도 아니죠. 중요한 건 모르는 걸 모른다고 인정할 줄 아는 자세, 그리고 모르는 걸 배우고자 하는 의지죠.”
그 두 가지만 있다면 되었다.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라면 모르는 것이 있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스승님과…… 비슷한 이야기를 하시는군요.”
“그런가요?”
“네. 이립(而立, 30세)도 되지 않으신 것 같은데. 맞으시죠?”
“뭐어.”
은후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 말은 정답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였다. 육체적인 나이는 호랑이의 말대로였으나 정신적인 나이는 배를 훌쩍 넘겼으니.
“미려하네요.”
호랑이가 TV를 빤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런 물품이 지금은 흔한가요?”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좀 다르겠지만, 네, 과거에 비하면 흔해졌죠. 여하튼 설명을 길게 이어 나가는 것보다 직접 경험하시는 게 이해하기가 훨씬 빠를 겁니다.”
은후는 TV에 아까 함께 샀던 DVD 재생기를 연결했다. 그리고 코드를 손에 쥐고 알맞은 전력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호랑이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전기를 손에?’
그것도 무척 가볍게.
호랑이는 긴 세월을 살아왔다. 현대에는 능력자들이, 신비가, 환상이 사그라들었으나, 과거에는 아니었다. 그사이 호랑이들이 만났던 이런저런 능력자들.
개중에서도 뇌전의 힘을 다루는 이는 드물었다. 그리고 저처럼 안정적으로 가볍게 힘을 쓰는 이는 없었다. 적어도 호랑이의 기억 속에는.
‘신선 중에서라면.’
아니, 애초에 평범한 인간을 신선과 비교한다는 것이 가당찮은 일인데. 게다가 자세한 건 듣지 못했으나 개구리가 전해 준 바에 따르면 뇌전의 힘이 주력도 아닐진대.
‘어?’
하지만 그러한 생각은 곧 멈췄다.
‘뭐, 뭐지?’
커다란 화면에 갑자기 나타난 영상.
그러니까.
‘사람? 아이?’
뭐지?
호랑이가 혼란스러워했다.
저 조그마한 네모난 것이 TV라고 했던가. 기척이 하나도 잡히지 않은 걸 보니, 저기에 사람이 들어간 것도 아닐 터. 게다가 저렇게 조그마한 사람이 있을 수가 있을까.
‘소문으로 듣기로 소인(小人)족이 사는 섬이 있다고는 했는데.’
전혀 섬이 아닌데.
호랑이가 혼란스러워했다.
“책에 비유하면 이해가 쉬울까요?”
“책, 말입니까.”
“저 관은 책이요, 안쪽에 움직이는 것들은 글씨죠.”
“글씨요.”
“네, 글씨.”
“일종의 기록물이라고 보면 되겠습니까?”
마치 꿈을 형상화시킨 것 같았다.
은후가 DVD플레이어를 통해 재생시킨 건 ‘과거 아이들의 놀이와 기쁨’이라는 다큐멘터리였다. 호랑이는 생각을 멈추고 멍하니 TV를 바라봤다.
이제는 더는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과거의 배경 속에서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들. 해맑게 웃고, 때로는 소리도 지르고, 찡그리고, 순수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하는 광경이.
“……감사합니다.”
그래, 이런 모습을 보고 싶어서.
* * *
호랑이와 아이와 두 번째 만남은 첫 만남으로부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곶감 가져왔어!”
거짓말쟁이가 되어 버린 아이는 가족 외의 사람들로부터 외면받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들의 말을 견디지 못하고 아이가 도망친 것이다.
‘난 거짓말쟁이가 아닌걸!’
‘바보! 우리 엄마가 곶감 같은 거로는 호랑이 못 쫓아낸다고 그랬거든!’
‘맞아, 맞아. 우리 삼촌이 호랑이에게 죽었는데. 사냥꾼이던 우리 삼촌도, 어? 곶감 따위가 호랑이는 무슨!’
‘애초에 호랑이를 만났다는 거, 거짓말 아니야?’
아이의 어머니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거짓말을 하려면 차라리 좀 그럴듯한 거짓말을 하지 그랬니. 호랑이라니, 호랑이라니. 내가 잘못했구나. 울면 호랑이가 잡아간다고 내가 말을 잘못했어.’
곶감을 주며 아이의 어머니가 말했다.
‘다시는, 다시는 그런 거짓말은 하지 말렴. 응? 알았지?’
아이는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이들의 놀림에서 도망쳤다. 그 후 시간이 흐르며 아이는 헷갈리게 되었다. 그때 꿈을 꾼 건 아닐까 하고.
하지만 너무 선명한데, 기억이 뚜렷한데. 그래서 곶감을 손에 꼭 쥐고 호랑이를 찾아다녔다. 또래와 어울리지 않을 수 있다는 점도 아이의 행동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호랑아! 나와!”
그렇게 호랑이를 찾아다니던 어느 날, 아이와 호랑이가 다시 만났다.
아이는 호랑이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호랑이다!’
그때 만났던 호랑이와 같은 호랑이인지 아이가 알 방법은 없었다. 혹 다른 호랑이라면, 또 같은 호랑이라도 그때와 다른 마음을 먹었다면 목숨을 잃을 것이 분명한데.
‘놀라게 해 줘야지!’
아이로서는 단순하게 그 호랑이라고, 왠지 모를 확신을 가진 채 호랑이에게 살금살금 다가갔고.
컹!
호랑이가 크게 울었다.
“왁!”
아이가 처음 호랑이와 만났을 때처럼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아이가 일어섰고 호랑이가 말했다.
“그렇게 다가오면…… 모를 수가 없어.”
“뭐, 뭐를?”
“지금 다가오고 있다고.”
“그걸 어떻게 알아?”
“?”
“?”
“왜 그걸 몰라?”
대화가 어긋났다.
“호랑이면 다 아는 거야?”
“아마도?”
아이가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여기 곶감. 그때 약속했으니까. 약속을 잘 지켜야 착한 아이가 된다고 그랬어.”
“……곶감.”
호랑이가 아이의 손에 들린 곶감을 빤히 바라봤다. 호랑이가 저도 모르게 웃었다. 이걸 착각했구나. 무서운 짐승이라고. 내가 모르는 건 너무나도 많구나.
“머, 먹을래?”
저 아이도.
“넌 뭐가 무섭니?”
“응? 어, 엄마?”
“엄마가 무서워?”
“가끔. 화내면 무서워. 그런데 이번엔 슬펐어. 화를 내시는데 내가 거짓말을 했다면서. 그런데 난 거짓말한 게 아닌데.”
아이가 중얼거렸다.
“호랑이는 뭐가 무서워?”
아이의 질문에 호랑이가 답했다.
“곶감.”
알 수 없다는 게, 무지가, 무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