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7화
토함산은 그리 높은 산은 아니었다.
745미터.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에베레스트산의 높이가 8,850미터, 우리나라의 산 중 가장 높은 한라산이 1,950미터. 한라산의 반도 안 되는 높이였다. 물론 그래도 산은 산이었다. 그래서인지 빨리 어둠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산에서는 해가 머무는 시간이 짧기 마련. 과학적으로 그 이유를 알 수 없어도 사람들은 이미 본능적으로 습득한 지식. 은후는 저도 모르게 그 인과를 계산하려다가 피식 웃었다.
‘잡생각은.’
이따금 그런 날이 있다.
할 일이 명확히 정해져 있는데도 그와 관계없는 상념이 떠오를 때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명확한 인과관계를 설명할 수는 없었다.
‘나 같은 경우에는.’
그러니까.
은후가 흠칫한 뒤 발걸음을 멈췄다.
“도령?”
은후도, 개구리도, 발걸음은 여느 때와 다름이 없었다. 머릿속에 쓸데없는 생각이 떠오른 것도 일상의 한 자락. 하지만 뭔가가 이상했다. 그건 일종의 직감이었다.
‘왜지?’
어째서?
은후가 눈을 감고 마나를 끌어 올리며 육체에 집중했다.
‘몸에 이상은 없어.’
하지만 오감을 초월한 육감이 말하고 있었다.
이상하다고.
은후가 다시 한번 자신을 살폈다.
‘내 몸에 문제가 없고.’
개구리도.
“뭔가 안 이상해?”
“뭐가? 아, 혹시 호랑이 놈이 깔아 놓은 진법 때문이려나?”
“아니, 그건 아니야.”
“?”
개구리의 머리 위에 갈고리 표시가 떠올랐다. 심각한 분위기를 조금 가라앉히고자 개구리가 대기 중의 수분을 끌어모아 장난을 친 것이다. 무척 심각한 상황이라면 한 소리 하겠지만.
‘위험은 없……. 아.’
그래, 위험은 없었다.
‘위험은 없어.’
은후는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유적 탐색.’
이 근처에 떠도는 공기는 이세계에서 숨겨진 장소를 찾을 때 느꼈던 기묘한 위화감과 닮아 있었다.
‘이 근처에 뭔가 숨겨져 있어?’
마법과 비스름한 무언가와 관련이 있는.
‘마나가 사용……된 것 같은데.’
정확한 건 시간을 들여서 확실하게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런 판단을 내린 후에야 은후는 긴장을 다소 풀었다. 적어도 먼저 숨겨진 무언가를 찾아내지 않으면 위험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도령?”
은후는 어깨를 으쓱인 뒤 다시 발걸음을 옮기며 자신이 느꼈던 감각에 관해 설명했다. 개구리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거, 은후 도령이 말한 거니까 믿기야 믿겠지만, 나는 도저히 모르겠는데. 이 길을 내가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했는데…….”
“돌아가는 길에 확실하게 찾아보면 알겠지.”
그냥 지나쳐도 상관은 없고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굳이 은후는 숨겨진 무언가를 찾아보기로 결심했다. 이세계에서라면 모를까, 현대에서 마나를 이용하여 이 정도로 정교하게 무언가를 숨겨 놓았으니. 그 점에 짙은 호기심을 느낀 탓이다.
* * *
은후는 호랑이 신선이 산다는 거처에 들어서며 나지막하게 감탄했다.
‘자연을 정말 세련되게 이용했네.’
마법이란 극단적으로 말해 세상의 법칙을 자신의 의지로 변형시키는 힘이었다. 때때로 자연과 협력이나 거래도 마다하지 않지만, 기본적으로 축이 되는 것은 술자 본인.
하지만 호랑이 신선의 거처에 설치된 마법진, 그러니까 개구리가 진법이라고 부르는 힘은 자연의 흐름을 전혀 거스르지 않았다. 좋게 말하자면 친구를 먹었고.
‘나쁘게 말하자면 기생이군.’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자연을 속였어.”
“응? 아하.”
은후가 무얼 말하고자 하는지 알아들은 개구리가 자지러지게 웃었다. 은후는 그런 개구리를 잠깐 바라보며 피식 웃은 뒤 허공에 대고 말했다.
“안 그런가? 손님이 찾아왔음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건 예의가 아닐 텐데.”
은후의 말이 끝난 직후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매우 갑작스러웠지만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손님은 무슨, 개구리 저놈은.”
“저놈은?”
“……으휴, 하여간 들어와. 그쪽이 이은후 도령인가? 친구로부터 말은 많이 들었어. 모습을 숨기고 관찰한 건 미안해. 저 친구가 소개해 준다니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믿기야 하겠지만.”
호랑이가 한숨을 폭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나는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으면 사람을 판단하지 않아서 말이야.”
“그래서 이제는?”
“적어도 날 해치러 온 사람이 아니란 건 알겠네.”
“뭐.”
은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적인 공격도 없었고 그저 관찰만 했으며 사과까지 받았으니 문제 삼을 것도 없었다. 거처의 주인으로서 객을 판단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권리이기도 했고. 그러니 호랑이가 굳이 사과하지 않았어도 은후는 딱히 문제 삼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중간에 개구리라는 고리도 있었으니.
‘그런데 목소리가.’
여자였군.
거기에다가.
“자주 좀 놀러 오라니까.”
“이 정도면 자주 놀러 오는 거지.”
“자주? 자주우?”
“이 정도면 자주 맞지 않나?”
“자주는 무슨. 거의 100년 만에 제대로 대화하는 건데.”
“그래도 너 잠들었을 때마다 자주 찾아왔다고. 너야 자고 있어서 몰랐겠지만.”
서로 티격태격하는 걸 보아하니 생각 이상으로 친한 것 같았다. 게다가 호랑이는 개구리에게 티가 날 정도로 연심을 품고 있는 듯하였고.
‘문제가 있다면.’
정작 당사자인 개구리는 그 심정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지만. 제삼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너무도 티가 나는데 본인은 모르고 있다니. 은후가 판단컨대 개구리가 모르는 척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모르는 것 같았다.
‘바보인가?’
눈치가 빠르다고 생각했는데.
‘연애 방면에선 아니군.’
아니야.
은후가 가볍게 혀를 차며 호랑이에게 안쓰러운 시선을 던졌다. 그 시선을 눈치챈 호랑이가 미간을 찌푸리며 은후에게 물었다.
“뭐예요?”
“아니, 아니요, 그간 많이 힘들었겠다 싶어서요.”
호랑이가 멈칫했다.
“힘내세요.”
“……눈치챘어요?”
“모르기도 힘들죠? 방금 대화만 들어도. 그나저나 갑자기 존댓말은 왜 하시는 건지.”
“초면인 데다가 손님이시니까요.”
“저보다 훨씬 나이가 많으신데요.”
“나이가 무어 대수라고요. 그저 숫자에 불과한 건데.”
그저 나이를 먹었다고 현명해지는 것도, 존중받을 자격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적어도 호랑이의 가치관에서는 그러했다.
“뭔데? 뭔데? 뭘 눈치채?”
중간에 개구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은후와 호랑이에게 물었다. 은후는 처음으로 한심한 표정으로 개구리를 바라보며 티가 나게 혀를 찼다.
“쯧쯧.”
“도령?”
“가시죠.”
“네.”
“힘내시고요.”
“감사합니다.”
묘하게 의기투합한 듯한 은후와 호랑이 때문에 개구리가 당황했다. 은후는 다시 한번 개구리를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호랑이의 뒤를 따랐다.
“아, 뭐야! 같이 가!”
개구리가 후다닥 그 뒤를 쫓았다.
* * *
호랑이는 본래의 모습에서 인간의 형태로 변한 뒤 간단한 요깃거리를 내왔다. 다만 개구리와 다르게 완전한 인간의 형태가 아닌 사람의 몸에 호랑이 머리였다.
“여전히 멋있네.”
“그래?”
“사람 얼굴도 곱지만, 그쪽이 더 멋있어서 좋더라.”
“으, 흠.”
만족스러운 미소와 못마땅한 눈초리를 한 호랑이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 선물.”
“선물은 무슨.”
“그래도. 곶감 좋아하잖아?”
“……응.”
은후는 그런 개구리와 호랑이의 대화를 따스하게 바라보며 주위를 둘러봤다. 호랑이가 거주한 곳은 토함산의 깊숙한 곳, 그곳을 진법으로 공간을 괴리시킨 듯하였다.
‘공간 마법과 많이 달라.’
비슷한 점도 적잖이 있지만.
그 외에는 전형적으로 우리가 보통 상상하는 신선이 기거하는 곳이었다. 신비롭다는 말이 어울리는, 갑자기 산속에 나타나는 널찍한 공터.
그 주위를 나무가 감싸고 있으며 작은 호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에 감나무를 비롯한 다양한 과일나무가 있고 따뜻한 느낌을 풍기는 초가집 한 채가 있었다.
“그래서 결정은 했어?”
“뭐어.”
오늘 호랑이 신선을 만나러 온 목적은 낙원의 주민이 되길 권유하려 함이었으니. 개구리가 적당히 대화를 나누다가 은후 대신 물었다. 호랑이는 은후를 슬쩍 바라본 뒤 개구리에게 물었다.
“거기에 완전히 자리 잡은 거야?”
“거의?”
“원래 머물던 곳은?”
“이따금 들러서 관리는 하고 있지. 게다가…… 너 이대로 계속 혼자 여기에서 지낸다면 몇 년 못 버틸걸. 다시 잠에라도 들지 않는 이상. 하지만 낙원에서 머문다면 다를 거야.”
조금은 가벼웠던 호랑이의 눈초리가 변했다.
“그게 정말?”
“금방 들통날 거짓말을 하는 취미는 없어. 애초에 내가 거짓말을 한 적이 있던가?”
호랑이가 곰곰이 생각한 뒤 답했다.
“없지. 그래, 항상 넌 그랬어. 말을 돌리거나, 정보를 숨기거나, 착각을 유도하거나, 그런 적은 있어도 거짓말은 하지 않았지.”
“새삼스레.”
“그게 같이 온…… 그러니까 은후 도령님이라고 하셨지요?”
“도령님이라뇨.”
은후가 쓰게 웃었다.
“제 친구의 은인이니 그리 부담스러워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 그래. 은후 도령이 아니었으면 나도 빤히 보이는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을 테니까.”
은후는 딱히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개구리의 말은 사실이었으니까.
“이렇게 함께 오셨다는 건 은후 도령님도 제가 낙원의 주민이 되는 걸 허락하셨다는 의미지요?”
“네.”
그 낙원을 만든 이유가 한 아이 때문이라고 했다.
아이를 위한 수호령.
‘아이라, 아이.’
그래.
‘나도.’
호랑이는 아이를 좋아했다.
정확히는 인간의 아이를.
그 계기는 호랑이가 갓 태어나서 지성을 갖출 무렵에 일어난 만남 때문이었다.
* * *
아주 먼 옛날, 산속에 호랑이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부모로부터 갓 독립한 호랑이는 여느 동물과 다름없이 치열하게 삶을 이어 나갔다. 그러던 어느 한겨울, 머물던 산에 먹을 것이 너무 없어서 결국 사람이 사는 마을까지 찾게 되었다.
그때 갑자기 들린 아이의 울음소리. 산의 영험함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일까. 보통 호랑이와 달리 지능을 갖추면서 비롯된 호기심이 그 울음소리에 다가가게 만들었다.
“아이고, 왜 이렇게 운담?”
아이의 어머니가 말했다.
“뚝! 계속해서 그렇게 울면 호랑이가 나타나서 잡아간다? 계속해서 우니까 호랑이가 왔잖니!”
호랑이는 깜짝 놀랐다.
‘어떻게?’
기척을 감추는 것이 특기인데, 평범하게 보이는 동물이 자신이 왔다는 걸 알아차렸단 말인가.
“계속 그렇게 울면 호랑이보고 진짜 잡아먹으라고 할 거야! 얼른 뚝!”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기 위한 어머니의 말이었다. 진짜로 호랑이가 온 걸 눈치채고 그리 한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호랑이는 그 말의 의미를 대강 알아듣고 기대감을 품었다.
계속해서 아이가 운다면 힘을 쏟지 않고도 먹을 게 생긴다는 의미였으니까. 아이는 여전히 울음을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으니, 그런 아이에게 어머니는 쩔쩔매며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러다가 한숨을 폭 내쉬고 품에서 곶감 하나를 꺼냈다.
“곶감, 여기 있다.”
아이가 울음을 뚝 그쳤다.
호랑이는 생각했다. 곶감이 얼마나 무서운 거길래 갑자기 울음을 그쳤을까. 내가 왔는데도 계속해서 울어 젖히던 아이였는데. 그런 생각이 들어 호랑이는 겁을 먹었다.
“곶감! 곶감!”
울던 아이는 곶감을 손에 꼭 쥐고 콧노래를 부르며 집 바깥으로 달려 나왔다. 마침 그곳은 호랑이가 있던 곳이었고, 아이는 눈을 크게 뜨며 당황했다.
“어?”
그 만남이 계기였다.
호랑이가 인간의 아이를 좋아하게 되고, 신선이라고 불리게 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