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6화
은후는 개구리와 함께 L사의 대형 전자 매점으로 향했다. 개구리는 평소와 다르게 자신의 모습을 인간의 형태로 바꾼 뒤 동행했다. 은후가 알기로 개구리는 보통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이는 걸 꺼렸다. 그래서 은후가 길을 걷다가 툭 물었다.
“어쩐 일로?”
“뭐가?”
“굳이 인간의 모습으로 길을 걷는 이유 말야.”
“아.”
개구리가 멋쩍게 웃으며 말을 흐렸다.
“그, 그게.”
이후 개구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뭔가 말하지 못하는 사정이 있는 것일까. 은후는 굳이 개구리의 내심을 캐묻지도, 마나를 움직여 내면을 들여다보려 애쓰지도 않았다.
그 정도의 신뢰는 쌓였으니까. 하지만 의식하지 않아도 절로 개구리의 심정이 파악되었다. 애초에 은후의 눈썰미가 뛰어난 것도 있었지만 그 정도로 개구리가 티를 냈기 때문이다.
‘부끄러워해?’
이럴 땐 그냥 모른 척하는 게.
그렇게 은후가 자연스레 발걸음을 옮겼고, 개구리도 함께 이동했다. 그러다가 개구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안심되어서.”
“응?”
“적어도 도령 옆에 있으면 애먼 짓은 안 당할 거 아니야.”
“……?”
은후가 고개를 갸웃했다.
‘애먼 짓?’
애초에 개구리가 원래의 모습으로 사람의 말을 한다면 모를까. 아니, 그렇다고 해도 은후가 알기로는 어지간한 위협은 전부 물리칠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또 눈치도 빨랐다. 쌓인 신뢰도 상당했고. 그렇기에 다른 낙원의 주민과 다르게 은후는 개구리를 이래저래 은근히 믿고 있었다.
‘예전에 나와 만나기 전이라면 모를까.’
골골거리며 죽음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던 무렵, 하지만 그 시기에도 개구리는 최소한의 힘을 비축하고 있었다. 하물며 지금은 꽤나 힘을 회복했다고 알고 있는데.
“하하. 아, 흠.”
개구리가 일부러 크게 티를 내며 웃은 뒤 말했다.
“요새는 은후 도령과 같은, 아니지, 은후 도령보다는 못하지만 비슷하게 정령을 보고 신비를 다루는 이들이 있으니까.”
“그런데?”
“그때는 정말 조심했어야 했어. 왜냐하면 난 영물이라고, 이득이 되는.”
“…….”
“내 피만 해도 무당들에게는 귀한 재료로 취급받았을 거고, 한때는 왕실에서 날 사냥하겠다고 무당과 도사에게 포고문을 돌린 적도 있었고, 드물긴 해도 사람의 모습을 취한 날 알아본 이들도 이따금 마주했고.”
그래서 항상 사람들을 조심했다.
“물론 세월이 많이 흘렀지. 지금에야 정말 진짜 무당이나 도사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고, 설령 그런 사람도 과거에 비해 힘이 많이 약할 게 분명해. 내가 마음만 먹으면 도망치는 것 정도야 충분하겠지.”
그러나.
“그때의 습관이랄까, 기억이랄까. 너무 선명해서 말이야.”
그래서 여전히 사람들 사이를 걷는 건 꺼려졌다.
“무서운 건 아니야. 머리로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마음이 좀.”
은후가 피식 웃었다.
“괜한 걱정을 하기는.”
“그런가?”
“그래, 이해는 하지만 말이야. 그러니까 심심하면 부탁하라고.”
“뭘?”
“산책. 자주는 무리여도 가끔이라면 어울려 줄 테니까. 사람 구경이 취미잖아?”
개구리가 쑥스럽게 웃으며 조그맣게 알았다고 대답했다. 이윽고 목적지로 삼았던 매점에 도착했다.
“어서 오세요!”
은후와 개구리가 들어서자 큰 소리로 입구에 있던 사원이 인사했다.
“저희 경주 지점 L…….”
“김동우?”
“네?”
“김동우 아니야? 전주 사대부고에 다녔던.”
“어어, 네, 맞습니다. 그런데 누구……?”
과거 은후가 고등학교에 다녔을 때의 친구. 정확히는 이따금 같이 어울렸던 친구의 친구였다.
“이은후.”
“이은후?”
고등학교 내에서도 보통 자주 어울리는 무리가 형성되기 마련이었다. 개중에 은후가 속했던 무리 중 엄청난 인싸가 있었다. 그 인싸 덕분에 이따금 이야기를 나누고 게임도 했었던 친구.
단둘만 있으면 어색하고, 굳이 둘이 연락은 하지 않고, 그러나 다수가 모여서 놀게 되면 무리 없이 어울릴 수 있었던. 아까 경주로 오며 이하연과 나누었던 대화 때문일까.
‘천하, 그놈은 뭐 하고 지내려나.’
그 무렵의 추억 한 조각이 되살아났다.
“천하는 기억하지?”
“어어, 당연히 기억하……죠.”
“존댓말은 무슨.”
“하하.”
이동우가 어색하게 웃었다.
“천하랑은 여전히 연락해?”
“가끔? 1년에 한두 번 정도 안부 인사는 주고받는 것 같은데. 넌 아닌가…… 보…… 아!”
이동우가 화들짝 놀랐다.
“그 이은후?”
“이은후면 이은후지, 그 이은후는 무슨 뜻이야?”
“아니, 야, 씨. 근데 진짜 이은후 맞아?”
“그런 거로 거짓말하겠냐.”
이동우가 다시 한번 은후를 살폈다.
‘예전 모습이 드문드문 보이기는 하는데.’
진짜 이은후 맞나.
이렇게까지 잘생겼던 애가 아니었는데.
‘성형?’
이동우는 궁금증을 꾹 누르며 입을 열었다.
“여하간 진짜 오랜만이다. 안 그래도 며칠 전에 했던 동창회에서 네 이야기로 시끌벅적했었는데.”
“나?”
“그래, 인마.”
그때.
“실례합니다.”
“아, 대리님.”
이동우가 멈칫했다.
“손님이 오셨으면 안으로 들여보내야지, 인사만 하면 되는 일이 그렇게 힘들어요?”
“그게요…….”
“변명?”
“그…….”
이은후가 대화를 끼어들며 말했다.
“이 친구랑 제가 고등학교 동창이라서요. 너무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워서 신이 났습니다. 매장 입구에서 민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은후의 정중한 사과에 대리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 그러셨군요. 그럴 수도 있죠.”
“죄송합니다.”
“죄송하기는요. 다만 다른 손님들도 계시니까 회포는 나중에 푸시면 좋을 것 같네요. 안내는.”
대리가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동우야.”
“네, 대리님.”
“네가 안내해 드려.”
“제가요?”
“그래. 그럼.”
이동우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고, 대리는 은후에게 살짝 목례한 뒤 사라졌다.
“꼰대 선배냐?”
“꼰대는 무슨. 말투가 저래서 좀 오해를 많이 받기는 하는데 좋은 선배야. 능력도 좋고.”
“진짜?”
“그럼 진짜지 가짜겠냐. 엄하기는 한데 잘 챙겨 주셔. 저 선배 아니었으면 사직서 내야 했을걸?”
진심으로 감사하는 감정을 품은 것 같았다.
“그냐?”
“어.”
“근데 여기서 일한 지 얼마나 됐어?”
“1년 넘었지. 좀 있으면 2년?”
“그런데 매장 앞에서 인사를 해?”
“내가 사고를 쳐 가지고. 아까 그 선배가……. 아, 이런 이야기는 나중에 술 마실 때나 하자. 별로 좋은 이야기도 아닌데. 그런데 뭐 사러 옴?”
“TV.”
“응? TV?”
“어. 이 매장에서 제일 큰 TV가 어딨냐?”
“어어. 일단 이쪽으로 와. 근데 진짜 비싼데. 그리고 그런 제품은…….”
이동우가 주위를 슬쩍 둘러본 후 잔뜩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인터넷으로 알아보는 게 좋을걸. 가격 차이 오진다.”
“오진다가 뭐냐, 오진다가.”
“아, 하여튼. 다른 제품이라면 모를까 TV는 좀 비추야. 에어컨이나 청소기, 그런 건 나도 추천할 것 같은데 TV는 진짜 아님.”
“거참.”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니었다. 그러면 적당히 이런저런 말로 살살 꼬드길 수도 있을 법한데.
‘하기야.’
이동우는 고등학교 때도 그랬다. 은근히 약으면서도 솔직한, 이따금 눈치가 없어서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하는. 그러나 성격이 무던해서 이동우를 싫어하는 친구는 없었다.
“여전하네.”
“뭐가?”
“은근히 솔직한 거. 됐고 안내나 해.”
“어, 알았어.”
가격 보면 생각을 달리 먹겠지.
이동우는 그렇게 여기며 은후와 함께 TV가 전시된 곳으로 향했다.
“이게 우리 매장에서 제일 큰 TV야. 52인치고, 올해 초에 나온 신모델이야.”
가격은 539만 9천 원.
“사은품을 주기는 하는데, 솔직히 가격 생각하면 좀 그렇지. 카드 새로 발급받고 그 카드로 긁으면 40만 원 할인은 돼. 무이자로 24개월 할부까지도 되고.”
“뒤에 TV는 종류가 다른 거야? 크기는 비슷한데 가격 차이가 크게 난다?”
“어. 뒤에건 50인치 PDP. 많이 싸지?”
200만 원 가까이 차이가 났다.
“근데 싼 건 다 이유가 있어.”
“그러냐.”
“재고품인 데다가 어, 자세하게 설명하면 말이 길어지니까. 굳이 산다면 저 42인치짜리가 그나마 나을걸.”
“그나저나 네 이름으로 사면 도움 좀 되지?”
“거야 그렇지. 근데 무리할 필요는 없어. 그, 큼.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가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었잖냐.”
은후가 픽 웃었다.
“일단 저 52인치 TV랑, 에어컨하고 청소기도 좀 보자. 아, 그리고 여기 DVD 플레이어도 있지?”
원래는 티브이만 사려고 했다.
‘하지만 뭐.’
오랜만에 만난 고등학교 동창이기도 했고.
‘딱히 나쁜 기억도 없고.’
즐거웠던 추억만 있었으니, 이 정도 호의쯤이야.
여유가 없는 것도 아니고.
그러진 않겠지만 은후가 마음만 먹는다면 아예 매장 자체를 인수할 수도 있었다.
“진짜 사게?”
“여기서 장난으로 그러겠냐.”
“진짜로? 무슨 혼수라도 사는 거야?”
“그건 아니고.”
“아니, 어. 아니, 진짜?”
그냥 몇십만 원, 크게 잡아서 100~200만 원 정도 사는 거라면야 그러려니 했겠는데.
“무리하는 거 아니지?”
“아니니까.”
슬슬 낙원에도 이런저런 가전제품을 들여놓으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은후는 낙원의 주민들도 현대 문명의 편의성을 누리길 바랐다. 전기 문제는 자가 발전기를 구입해서 해결하면 되었다.
“저어, 도령.”
“응?”
“그 문제는 해결됐소?”
“뭐.”
은후가 어깨를 으쓱였다.
지금까지 낙원에 전자 제품을 들여놓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전기. 제대로 전력을 공급받을 수단이 마땅치 않았다. 공원 내의 전기를 멋대로 도둑질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마법으로 어떻게 안정적인 전기를 공급할 수 있을까. 그런 연구도 은후는 했었다. 하지만 의외로 간단한 방법이 있었다. 바로 자가 발전기.
‘하여간 마법사가 이래서 문제라니까.’
어떠한 문제든 해결 수단의 첫 번째는 마법이라는 것. 은후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사고방식은 좀 바꿔야 하는데.’
넓게.
마법만이 수단이 아니었다.
다른 수단도 널려 있는데.
“그, 옆에는 아들……은 아니겠고.”
“아들이겠냐.”
“그럼?”
“아는 동생.”
“동생?”
이동우가 이상하게 개구리를 바라봤다. 개구리는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휙 돌렸다.
“중2병이라서 말투가 좀 그래.”
은후는 개구리의 눈초리를 자연스레 무시하며 이동우에게 말했다.
“아, 그리고 저 TV는 바로 가져갈 거니까.”
“바로 가져가다니?”
“이따가 트럭 몰고 올게. 포장이나 잘해 놔.”
“트럭?”
뭔가 이야기가 이상했다.
하지만 아까 말했듯이 이동우와 은후는 그렇게까지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게다가 몇 번 말렸음에도 은후가 확고한 의지를 보였기에 이동우는 자신이 할 만큼은 했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은후가 L사의 경주 대형 전자 매점에서 쓴 돈은 약 천만 원가량이었다. 그것도 일시불로. 그 건으로 이동우는 그날 지점장에게 호출되어 칭찬까지 받았다.
“하하, 오늘 매출이 상당했다며? 이번 달은 더 출근 안 해도 1등이겠어?”
“감사합니다.”
“저번 사고는 이번 일로 완전히 잊을 테니 너무 신경 쓰지 말고.”
“네.”
이동우는 나중에 은후에게 따로 연락해 술이라도 한번 꼭 사야겠다고 다짐했다.
‘이따 오면 꼭 번호 물어봐야지.’
그리고 그날 저녁.
은후는 트럭을 하나 렌트하여 매점을 찾았다. 마음 같아서는 아공간 리어카에 그냥 넣어 버리고 싶지만, 주위의 시선을 의식한 탓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이 없는 곳을 찾은 뒤 TV를 아공간에 넣었다.
“이제 슬슬 갈까. 미리 말은 해 뒀지?”
“그럼.”
은후와 개구리 한 마리가 사람의 시야를 벗어나 토함산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