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5화
긴 세월을 보낸다고 하여 친분을 넓힐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소수의 사람과 깊게 사귀기를 좋아하는 성향이 있는 반면, 다수와 넓고 얕은 관계를 맺는 걸 선호하는 이도 있었다.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니까.
그건 타고난 천성을 비롯하여 자라 온 환경에 의하여 자연스레 형성되는 성향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개구리는 소위 말하는 인싸(인사이더)였다. 자신이 소속된 무리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물론, 그 외의 이들과 두루두루 잘 어울리는.
그건 개구리의 가치관과 밀접하게 연관되었다. 원한은 최대한 피하고 은혜는 그 이상으로 보답하고. 그래서인지 현시대의 대한민국에 남은 신비의 존재. 그러니까 은후가 보기엔 정령들을 모두 알고 있었다.
‘개중에서 낙원의 주민이 될 수 있을 법한 존재는.’
둘뿐이다.
하나는 토함산의 호랑이 신선.
토함산은 지리산이나 계룡산보다 비교적 덜 알려졌으나, 예부터 제사를 지내던 다섯 개의 거대한 산(五嶽) 중 한 축을 담당하는 산이다.
명확하게 역사의 기록으로 남은 건 신라시대. 신라에서 삼국을 통일한 후 국토의 명산 다섯 곳을 골라 지정했다. 또 신라에서 석탈해를 동악대신으로 모신 산이기도 하였다.
호랑이 신선은 그 동악대신 석탈해에게 선업을 인정받아 인근 일대에서 모셔지게 되었다. 호환으로부터 인간을 구하며 사람 고기를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랑이의 위협을 막는 호랑이. 그래서 굳이 석탈해가 인정하지 않았어도 사람들에게 숭배를 절로 받게 되었을 터. 게다가 인간 어린아이를 무척 아꼈다고.
“……아마 령이와 정말 잘 어울리지 않을까?”
그런 배경을 개구리가 은후에게 털어놓았다.
“석탈해, 라고. 신선이란 말이지. 신선이라, 신선.”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아마 은후 도령이 말하는 정령의 범주에 신선도 포함되지 않을까 싶은데.”
“석탈해라는 신선, 개구리도 만나 봤어?”
“아니. 나도 이야기만 들었어. 신라가 망한 후에는 그래도 종종 나타났다고는 하던데.”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추었다고.
“아마 인간들이 더는 석탈해 신선을 제대로 믿지 않아서 힘을 잃거나, 혹은…… 극락으로 갔을 수도 있고. 그런데 그건 크게 중요한 건 아니지 않으려나?”
이미 현세에 없는 존재이니.
“그건 확실해. 한창 내가 활동할 때도 석탈해 신선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말은 못 들어 봤으니까. 지금은 당연하고.”
“뭐, 그렇지. 중요한 건 네가 말하는 호랑이 신선 말인데, 말만 들어 보자면 진즉 내게 소개해 줘도 되었을 것 같은데?”
“그게 말이지, 잠에서 최근에 깨어났거든.”
“잠?”
“한 150년 정도 되었나? 하지만 힘을 많이 잃었더라고. 여전히 인근 마을에서 알음알음 그 존재가 전해지고는 있었는데.”
그냥 오래된 마을의 전설과도 같은 느낌. 진지하게 토함산 호랑이 신선의 존재를 믿는 이는 현세에 없었다.
“잠에서 깨어나더니 그냥 웃더란 말이지. 이대로 사라지는 것도 자연의 흐름이라나? 인간이나 몇 번 더 돕다가 죽겠다고 했어. 인간에게 배신도 많이 당한 놈인데.”
그래서 개구리는 기본적으로 사람을 불신했다. 동시에 선함을 믿었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선악으로 딱딱 구분할 수 없음이니.
“결국 그게 인간이 재밌는 점이라고 했지. 우리와 같은 존재. 어, 그러니까 나나 호랑이 녀석과는 다르게 말이야.”
그리고.
“다른 후보도 한 명 더 있기는 한데.”
“누구?”
“그 녀석은 조금만 더 고민해 보고 말할게.”
“그래.”
은후는 개구리에게 뭔가 더 묻지 않았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을 함께했으나, 그 시간만으로도 개구리의 성격을 파악하기엔 충분했다. 개구리가 그렇게 말하는 데엔 다 이유가 있을 터였다.
“아, 그런데 그건 있어.”
“뭐가?”
“은원이 명확해. 기본적으로 사람 돕길 좋아하고 해하지도 않지만, 반대로 먼저 공격받으면…….”
“호전적인 건 아니란 소리잖아. 그거면 됐어.”
개구리의 말대로라면 낙원의 새로운 주민으로 받기엔 무척이나 적합한 존재였다.
“그, 미안한데.”
은후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평소와 다르게 어색한 표정을 짓는 개구리에게 피식 웃었다. 그리고 검지로 개구리의 이마에 살짝 딱밤을 때리며 말했다.
“미안하기는. 내가 직접 토함산으로 가야 한다는 말이잖아?”
“그렇지?”
“뭘 그런 거로. 너도 낙원의 주민이고, 그리고 새로운 주민을 검증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아마 토함산을 떠나면 그나마 보존하고 있던 힘도 잃을 것 같은데.”
오랫동안 터를 잡았다.
그렇다면 그 토지와 자연스레 가까워지는 법.
‘그나저나 신선이라.’
무슨 재주를 가지고 있을까.
개구리가 말했다.
축제를 여는 데 아주 적합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다만 그 능력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고. 은후는 그런 개구리의 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은 중요한 법.’
그 중요성을 뛰어넘는, 피치 못할 사정이 끼어든다면 또 모르지만.
‘아니지.’
개구리라면.
‘그런 사정이 찾아와도 입을 꾹 닫을 것 같은데.’
은후가 하늘을 바라봤다.
서늘한 공기.
‘눈이 내리려나.’
전국적으로.
‘그나저나 토함산이면 경주인가.’
경주라.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으로 갔었던 게 마지막이었나.’
억지로 기억을 헤집지 않으면 잘 떠오르지도 않는. 떠오르는 건 희미한 웃음소리. 고등학교 친구들과 별 시답지 않은 주제로 떠들썩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던 추억의 한 조각.
은후는 굳이 그 추억을 상세하게 떠올리지 않았다. 다만 그러지 않고도 생각이 나는 게 있었으니, 바로 이하연과 관련된 부분이었다.
‘내가 경주로 갔을 때 며칠 차로 제주도로 갔었다고 했던가.’
수학여행으로.
* * *
- 그런 걸 기억하고 있어?
“이번에 경주에 갈 일이 있다고 그랬잖아. 지금 가는 중이거든. 갑자기 떠올라서 전화해 봤어.”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던가.
낙원에서 여는 축제는 기본적으로 어린아이들을 위한 것이니, 더 매서운 추위가 찾아오기 전에 축제를 여는 것이 좋아 보였다. 여차하면 아예 시기를 늦추든가.
그래도 기왕이면 빨리 열고 싶다고. 물론 어설프게 여는 것보다 확실하게 준비하여 개최하는 것이 낫겠지. 그러나 수호령은 기왕이면 빨리 열고 싶어 했다.
‘기왕이면 빨리…… 재밌게 아이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어떨 때는 어른스럽다가도 때때로 어린아이의 면모를 보이는 수호령. 이번엔 후자의 경우였다. 개구리는 그런 수호령의 바람을 호랑이 신선만 데리고 온다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그래서 곧바로 은후는 경주로 향했다.
- 은후야?
“아, 미안. 잠깐 다른 생각 좀 하느라.”
그 과정에서 은후는 이하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냥 목소리라도 들으려고.
또 떠오른 과거의 추억을 주제로 이야기도 나눌 겸.
- 칫, 나랑 전화할 때 한눈팔기 있기?
“없기. 미안해.”
- 아니, 미안해, 미안해 해야 하지만, 너무 미안해 하면 또 내가 미안한데.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거 아니야?”
- 그러니까…… 지금 나 놀리는 거?
“반은?”
- 하여간 못됐어.
이하연이 쿡쿡 웃었다.
- 고등학교 때라. 그립긴 하다.
“……나도.”
은후의 대답이 반 박자 느렸다.
- 안 좋은 일 떠올랐어?
“그건 아니고.”
그냥.
“너와 게임했던 거라든가, 친구들과 시답지 않은 이야기로 낄낄거리며 놀았던 거라든가.”
다 좋지만.
“딱히 그립지는 않아서.”
그러기에는 너무 긴 시간을 보냈다.
‘그래.’
그립다는 건 보고 싶거나 만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는 것. 하지만 은후는 고등학교 시절을 그렇게까지 원하지 않았다. 그런 자신의 마음을 은후가 털어놓자, 이하연이 가볍게 웃으며 대꾸했다.
- 하여간. 이럴 땐 그냥 맞장구쳐 줘도 괜찮을 텐데.
“거짓말하지 않기. 서로에게 솔직하기. 약속했잖아?”
- 그런 점이 단점이자 장점이라니까. 그래도 내게는 엄청난 장점. 그래서 조, 큼.
“조?”
- ……좋아해. 알면서 묻는 거지?
그렇게 이하연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옆 좌석에 자리를 잡던 개구리가 울었다.
개굴.
- 응? 방금 개구리 소리가 들린 거 같은데?
은후가 힐끔 개구리를 바라봤다. 개구리가 눈을 데구루루 굴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
- 응…… 잘못 들었나? 아,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브이튜브는 확인했어?
“당연히 확인했지.”
- 이번에도 수익 배분은 확실하게 할 거니까.
“굳이?”
- 연인 관계여도 돈 계산은 확실히 해야지. 가족도 그렇고, 이런 건 철저하게 하는 게 깔끔하고 서로에게 좋다니까. 나 안 만났으면 어쩔 뻔했어?
“호구는 안 잡혔을걸?”
- 하여간 말은 잘해요. 그나저나 경주는 무슨 일로?
“친구가 친구를 소개해 준다고 해서.”
- 친구?
“응. 자세한 건 말하기 좀 어려운데.”
- 무슨 위험한 일은 아니지?
“아니야.”
- 그럼 됐어. 나중에 말해 줄 수 있을 때.
이하연도 은연중에 알았다. 은후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걸. 하지만 굳이 그걸 캐내려고 들지 않았다. 위험한 일이 아니라면야 아무래도 좋았다.
- 그나저나 그 친구는 누군데? 그러고 보면 네 친구들 한 명도 모르는 것 같아.
은후가 잠깐 고민하다가 개구리에게 눈짓했다. 개구리가 한 차례 울며 말했다. 개구리의 형상을 유지하며 인간의 목소리로.
“안녕하세요.”
- 어라? 네, 안녕하세요.
“하하. 네, 은후 도…… 아니, 은후 친구입니다. 아까 개구리 울음소리는 제대로 들으신 거 맞아요. 동물 성대모사가 취미라.”
- 아하, 네.
서로 어색한 대화가 잠깐 이어졌다.
‘나중에 알게 되면 깜짝 놀라려나.’
개구리 친구라니.
‘언젠가.’
하연이에게도 제대로 소개해 줄 날이 오려나.
‘오긴 올 것 같은데.’
그게 언제일지.
그렇게 잠시 개구리와 이하연의 인사가 오간 후, 경주 토함산에 도착할 때까지 은후와 이하연의 이야기가 쭉 이어졌다.
* * *
토함산의 위치는 경상북도 경주시.
경주국립공원의 일부이며, 토함산지구에 있었다.
‘아.’
은후가 토함산에 도착하면서 깨달았다.
‘나도 여기 왔던 적이 있구나.’
토함산이란 이름은 유명하지 않았으나 그 안에 있는 불국사, 그리고 산자락의 중턱에 있는 석굴암은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곳이었다.
‘하, 거 참.’
절이라.
그러고 보니 개구리를 만난 곳도 절이었다.
‘지금 만나러 가기엔 좀 그런데.’
호랑이 신선이 기거하는 곳은 석굴암 근처라고 했다. 아직 해가 떨어지기 전이었다. 게다가 유명한 관광지였다. 그래서 근처에 사람이 많았다.
‘마음만 먹는다면 모습을 감추고 방문해도 되겠지만.’
은후가 잠깐 고민하다가 개구리에게 물었다.
“호랑이 신선이 좋아하는 거 뭐 없어?”
“좋아하는 거? 선물이라도 들고 가게?”
“일단 손님으로 찾아가는 거니까.”
“글쎄, 야채?”
“야……채?”
“어, 채식주의자라서. 신선한 야채라면 뭐든 좋아할걸.”
호랑이가 채식주의자라.
‘거참.’
은후가 살짝 황당해 했다. 그런 은후의 모습에 개구리가 방긋 웃었다.
“거, 은후 도령도 당황할 때가 있네?”
“호랑이가 채식을 한다는 소리를 들으면 누구라도 그럴걸.”
“소금에 절인 채소를 가장 좋아했어. 그 무렵에는 고추나 젓갈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하더라고. 그때 식습관이 굳어졌다나 뭐라나. 그 외에 좋아하는 거라면 애들 웃음?”
애들 웃음을 선물로 들고 갈 수는 없으니까.
‘아니지.’
없지는 않나.
“150년 전이라고 그랬지? 잠들었던 시기가.”
“그렇지?”
은후가 씩 웃었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