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3화
섬세한 마나의 조절.
모순적이게도 투박하다면 투박한. 하지만 매우 찬찬하고 세밀했다. 이런 마나의 운용법은 이세계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필요에 의하여 발달한 것 같은데.’
마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지구.
그렇기에 단 한 톨도 허투루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최대한 효율적으로. 낭비하지 않도록. 현대의 지구로 돌아온 이래 은후도 이런 느낌으로 마나를 운용했다.
‘공간을 뛰어넘지 않고 접는다, 인가. 마나가 충분했다면 굳이 이런 식으로 돌아가…… 응?’
이내 이어지는 은후의 상념이 멈추었다.
‘끊겨?’
필히 이어져야 할 흐름에 생기는 구멍들.
너무도 의아했으나 은후는 입을 꾹 다물고 검은 바다를 바라봤다. 검은 바다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어떻게든 마나의 흐름을 이어가고자 애썼다.
하지만.
컥-
짧은 기침과 얕은 피를 토하며 주위에 일렁이던 검은 바다가 사라졌다.
[제가 늙기는…… 컥, 했나 봅니다.]
은후가 조용히 검은 바다를 바라봤다.
[최근에 힘을 쓸 일이 있기는 했는데 말입니다. 허, 큭.]
마나를 나누어 준다면 다소 괜찮아질까. 하지만 공간을 이동하는 데에 실패하여 꼬인 체내를 풀려면 단순히 마나만 나누어 주는 것은 딱히 의미가 없었다.
[후우, 후우.]
은후가 미간을 찌푸리며 어찌해야 하나 망설이던 사이. 다행스럽게도 검은 바다에게 전해지는 마나가 있었다.
아주 먼 곳.
공간을 접으면서 달려오는 마나의 흐름.
정령이었다.
아마도 검은 바다가 중간에 실패하지 않았다면 만났을 정령이겠지. 은후는 검은 바다의 마나 운용법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정령이 알려준 것인가.’
정령의 마나 운용법이라.
하지만 정령이 굳이 마나를 운용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을까.
‘……있었겠지.’
그러나 정령이란 존재는 본디 본능적으로 마나를 운용하기 마련이었다. 그 방법은 인간과 동떨어져 있는 것이 보통이었고. 아무리 인간에서 비롯된 정령이라고 하여도 그건 매한가지였다.
[저 때문에…… 아, 그렇지만…….]
정령과 뭔가 대화를 나눈 검은 바다가 쓰게 웃으며 한결 나은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 * *
결국 그 정령과 은후의 만남은 미뤄졌다. 서로 만나고자 할 의지는 있었으나 정령이 예기치 못하게 힘을 쓰는 바람에 잠에 빠진 것. 두어 달 정도는 잠을 자며 힘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검은 바다가 말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요.]
흥미롭기는 하지만 딱 그뿐.
게다가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것도 아니었으니. 넉넉하게 여름 즈음에 은후는 다시 이곳에 방문하기로 약속했다. 그때는 이런 일이 없도록 확실하게 준비하겠다고 검은 바다가 깊은 눈빛과 함께 약속했다.
이후 은후는 이하연과 여행을 계속했다. 그 와중에 혹여라도 다른 정령과 같은 신비가 남아 있을까 은연 중 마나를 퍼트리고 신경을 기울였으나 별다른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다.
“으, 멋지고 좋기는 한데. 평생 살라면 못 살겠다.”
“어쩔 수 없이 살게 되면 적응할 순 있을걸?”
“그거야 그렇겠지만.”
“그래도 쉽지 않겠지. 살아온 환경이 다르니까.”
“응응.”
멋져 보이기만 한 것도, 끝도 없는 초원도 하루 이틀이지. 몇 날 며칠 바라보다 보면 슬슬 감흥이 없어지기 마련. 하물며 현대의 문물과 동떨어진 곳이었기에 슬슬 이하연은 지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씩씩하게 남은 일정을 소화했다.
그리고 귀국하기 이전 선물을 사기 위해 몽골의 국영 백화점을 들렀다. 특히 캐시미어가 그렇게 유명하면서도 외국인 입장에선 대개 저렴한 편이라고.
‘일단 어머니하고 수호령이랑 낙원의 주민들 것이랑.’
어머니의 피부숍에 비치할 담요와 같은 것들.
애초에 어떤 선물을 사 갈지 정해왔기에 은후는 망설임 없이 선물을 골랐다. 일부러 넉넉하게. 돈도 넉넉했으니까. 그건 이하연도 마찬가지였다.
몽골로 오는 길. 어떤 선물을 사 갈지 은후와 충분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하연에게 의문인 점이 있다면 은후가 사는 선물의 양이었다.
‘대충 설명이야 들었지만…… 응?’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에 이하연의 눈에 띈 몽골의 전통 의상.
‘이거 예쁘다.’
국내에서 입고 돌아다니기엔 좀 그렇겠지만.
‘여행에서라면 괜찮았을지도.’
몽골 내에선 종종 전통 의상을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많았으니까. 울란바토르라는 시내에서도. 그런 이하연의 눈빛을 알아차린 은후가 점원에게 말했다.
[이것도 같이 계산해 주세요.]
이하연이 무어라 은후에게 말을 하려다가 그냥 웃었다.
‘이번에도.’
스타더스트가 죽은 이래.
자신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을 기울여 주는 은후. 그것이 부담스러우면서도 너무 기분이 좋았으니까.
“고마워.”
“고맙기는.”
그나저나 뮤직비디오나 이번 여행에서 찍은 영상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그때 은후가 독수리와 호흡을 맞춘 기타 연주는 올려도 될 것 같고.’
다른 영상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뭐.’
일단 그 고민은 편집하면서.
국내로 돌아가서 좀 더 천천히 생각해 봐야지.
‘일단 지금은.’
은후에게 집중을.
이하연이 웃으며 은후에게 달라붙었다.
* * *
은후와 이하연이 국내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스타더스트는 함께하지 않았다.
푸르르르르!
달려서 가겠다고.
은후는 스타더스트의 의지를 존중하며 그냥 웃고 말았다. 사실 몽골에서 국내까지 달려서 오기엔 정말로 긴 거리였다. 그리고 스타더스트의 본연의 힘만으로는 그 거리를 달릴 수 없었다.
어디까지나 은후의 보조가 있어야만 가능한 거리. 게다가 은후가 옆에서 함께하지 못 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서 보조해야 했다. 그래서 은후의 입장에서도 적잖은 힘이 소모되겠지만.
‘그 정도쯤은.’
이제 감당이 가능했다.
그래서 은후는 흔쾌히 스타더스트에게 그러라고 말했다. 죽는 그 순간까지. 죽은 이후에도 달리고 달리는 걸 바라는 스타더스트의 의지를 은후는 존중하고 싶었다.
“잘 다녀왔니?”
“네.”
은후가 국내로 돌아온 후 향한 곳은 어머니가 있는 익산의 본가.
“별일 없으셨죠?”
“그럼. 별일이야 있었겠니.”
은후는 어머니와 가볍게 대화하며 선물 보따리를 풀어 놓았다. 은후의 어머니는 뭘 이런 걸 다 사 왔냐며 가볍게 타박했지만 올라간 입꼬리를 감출 수 없었다.
“네가 잘 번다는 걸 아니까 크게 무어라 하지는 않겠다만. 그래도 너무 낭비는 하지 말고.”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캐시미어가 국내에서라면 몰라도 몽골에선 그렇게 비싸지 않더라고요. 이건 어머니가 입을 거고, 이 담요들은 피부숍에 비치하면 좋을 것 같아서 사 왔어요. 그리고…….”
몽골에서 있었던 이런저런 일들.
스타더스트의 죽음부터 몽골에서 겪었던 이하연과의 이야기.
은후가 몽골에 가기 전 어느 정도 사정을 이야기해 둔 상태였다. 그래서 은후의 어머니는 즐겁게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스타더스트라고 했지? 죽었다니 좀 안타깝기는 하구나.”
“그래도 만족했을 거예요. 그리고 확실히 별이 정말 잘 보이더라고요. 어머니도 별 좋아하신다고 하셨잖아요. 언제 나중에 한번 같이 가요.”
“얘는.”
“그, 고등학교 때 천문학 동아리 활동 하셨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랬지? 그걸 기억하고 있어?”
“그럼요. 그리고 빈말이 아니에요. 내년 여름 즈음에 어떠세요?”
언제부터인가.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들과 거리가 멀어졌다. 반복되는 일상의 대화 외에는 거의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된 것. 돈에 쪼들린 것도 있었지만 그 때문만은 아니었을 터.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다시금 아들과 재밌게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은후의 어머니는 그게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게다가 몽골에 가자는 이야기도 진심인 것 같았다.
‘몽골이라.’
정말로 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미리 계획을 세운다면 휴가를 내도 괜찮을 것 같은데.’
별이라.
별.
그래.
별을 보는 걸 참 좋아했는데.
하늘과 함께.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별은커녕 하늘도 느긋하게 바라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아들.”
“네?”
“언제 한번 별 보러 갈까?”
“좋죠.”
“그래.”
“말 나온 김에요. 조만간 같이 나가요. 하늘만 맑으면 소리 문화의 전당 쪽에서도…….”
그날 밤.
아주 늦은 시간까지 두 모자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 * *
은후는 그날 매우 일찍 일어났다.
‘어디 보자.’
그리고 냉장고를 살피며 어젯밤 대화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아들의 귀국 날짜를 착각하여 별다른 반찬을 준비하지 못했다고. 그래서 미안하다고 하셨던 어머니. 하지만 은후는 정말로 괜찮았다. 그걸 어머니도 알았지만 그럼에도 미안해하셨다.
은후는 피식 웃은 후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준비했다. 원래라면 어제 저녁에 어머니가 해 주셨을. 그리고 골야시도 함께 만들었다. 몽골에서 배웠던 대로. 다만 고기는 소고기를 썼다. 이후 은후는 다음과 같은 쪽지 한 장을 냉장고에 붙였다.
- 일이 있어서 먼저 나가요. 찌개랑 몽골에서 배워 온 음식 준비해 뒀으니 맛있게 드세요.
이후 향한 곳은 덕진 공원.
은후가 덕진 공원의 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언제나 그러하듯 수호령이 마중 나왔다.
“은후 왔다!”
다만 평소와 다른 점은 그 옆에 개구리뿐만 아니라 서연후도 함께였다는 것. 서연후가 은후를 이처럼 마중 나온 건 꽤 드문 일이라 은후가 물었다.
“어쩐 일로 나오셨어요?”
“하하. 그게요. 사흘 전부터 다들 이 근처에서 머물고 있었거든요. 령이가 말이죠.”
“앗! 그거 말하지 말랬지!”
“에이. 부끄러워하기는.”
은후가 오는 날짜를 알았지만 기다리기가 힘들어서. 그래서 아주 조금이라도 빨리 만나고 싶어서. 은후가 도착하고 난 걸 알아차리고 마중을 나오면 조금 늦으니까. 그 시간마저 아끼고 싶었다는 수호령의 마음씨에 은후가 몽근하게 웃었다.
“많이 기다렸어?”
“……쪼끔?”
“열심히 기다렸나 보네?”
“으응.”
“그럼 선물을 줘야지.”
“응? 선물?”
일단 옷부터.
‘그러고 보니 음식이나 다른 건 이것저것 선물했던 것 같은데.’
옷은 처음이었던가.
“여기 연후 씨랑 개구리 것도 있어요.”
“오호. 내 것도?”
“령이 것만 사 오면 삐지지 않았을까?”
“엣흠. 삐질 리가. 좀 서운했을지는 모르겠는데.”
“그게 그 말 아닌가?”
은후는 개구리와 가볍게 농담을 주고받으며 가져온 선물 보따리를 풀었다.
“아! 맞다! 삼촌이랑 이모가 오늘 은후 온다고 해서 열심히 음식 준비하고 있어! 기대해도 좋을 거라던데? 뭔가 되게 특별하다고 했었어.”
특별이라.
어떤 음식을 해 주려고 특별이라는 단어까지 썼을까.
‘몽골에서 배워 온 요리를 좀 해 주려고 했는데.’
그건 좀 미뤄야 할 모양이었다.
‘돌아오기는 했구나.’
이런 복작거림이 왠지 모르게 좋았다.
“짠! 어때?”
“멋지네.”
“개구리도!”
“은후가 센스가 좀 있지. 그나저나 옷만 사 온 거야? 과자는 없나? 몽골의 전통 과자라던가?”
개구리의 너스레에 은후가 피식 웃으며 먹거리를 꺼내며 입을 열었다.
“하여간 이럴 때 보면 령이보다 어리다니까.”
“허허. 나이 불문하고 원래 과자를 좋아하는 건 사람의 본능이라니까.”
“사람이 아니라 개구리의 본능이 아니고?”
“지금은 사람의 형상이니까 사람이라고 봐도 되지. 흠흠.”
수호령이 은후가 꺼낸 간식을 둘러보며 물었다.
“이거 뀽뀽이 줘도 돼?”
“조금이라면.”
뀨-!
눈치가 비상한 페럿 뀽뀽이가 한 차례 운 다음 은후에게 재롱을 피웠다.
아직 봄이 찾아오기 전.
겨울의 어느 아침.
보통 사람은 눈치채지 못할 시끌벅적함이 덕진 공원의 주차장에서 계속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