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2화
독수리의 시선을 통해 어떤 의지가 은후에게 전달되었다. 하지만 그건 인간의 언어로 형언키 어려운 무언가였다.
‘굳이 해석하자면.’
한번 만나자, 고.
‘정령인가.’
원래는 일방적인 전달이 되어야 할 시선. 하나 은후의 의지와 감각이 그 시선 너머에 있는 정령에게 닿았다.
‘?!’
이윽고 정령의 시선이 사라졌다.
푸드드드득.
독수리가 날갯짓하며 고개를 갸우뚱한 뒤 가볍게 목청을 높였다.
까악.
은후가 노인에게 말했다.
“느끼셨죠?”
“정확히는 들었습니다. 귀인께서는 느끼는 모양이군요.”
들었다고.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요. 복잡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짧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노인이 말없이 은후에게 가져온 보호 장비를 내밀며 말을 이었다.
“이 아이가 귀인을 좋게 여긴 듯합니다. 함께 사냥을 나가 보시지 않겠습니까.”
“……좋죠.”
“옆에 분께는?”
“잠시.”
은후가 이하연에게 물었다.
“어떻게 할래?”
“응? 뭘?”
“독수리 사냥.”
“……사냥?”
이하연이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난 그냥 옆에서 지켜볼래. 좀 무서워서.”
“아쉽진 않겠어?”
“조금 아쉽긴 하겠지만. 으, 한번 시도는 해 볼까?”
“그래. 아니다 싶으면 그만두면 돼. 꼭 해야 할 일은 아니니까.”
이하연이 배시시 웃었다.
잠시 후 이하연도 보호 장구를 건네받고 함께 독수리를 골랐다. 독수리도 개체마다 성격이 달랐으니까. 다만 그 과정에서 다른 독수리들이 적잖이 긴장했다는 게 약간 문제였다. 은후의 어깨에 자리 잡은 독수리 검은 벼락 때문이었다.
은후가 검은 벼락에게 의지를 전달했다.
‘차라리 하연이와 함께해 줘.’
까아아아악.
‘내가 왜?’
하지만 독수리는 바로 긍정적인 의사를 표현했다. 은후의 강렬한 의지를 거스르기 어려웠던 까닭이다. 내키지 않았다. 따르기는 하겠지만 심술을 부려야지.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내 검은 벼락의 마음이 바뀌었다.
‘오늘 하연이를 잘 따르면 맛있는 걸 먹게 해 주지.’
은후가 던진 당근 덕분에.
‘정말 맛있을걸? 지금까지 네가 먹었던 것 중 무엇보다도.’
사람이라면 이런 제안에 혹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어떠한 근거도 없는 제안이었으니. 하지만 독수리 검은 벼락은 동물이었다. 또한 정령을 통하여 미약하게나마 마나를 본능적으로 다루는 영물이기도 했다.
그래서 은후의 의지에서 비롯된 진심을 느꼈다. 그리고 검은 벼락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은후를 믿기에 충분했다. 은후는 검은 벼락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툭 친 후에 이하연에게 말했다.
“여기, 얘 이름은 들었어?”
“아, 응. 검은 벼락이라고.”
“얘가 너, 마음에 드나 봐.”
“나? 은후 네가 아니라?”
검은 벼락이 눈치껏 가볍게 날아 이하연에게 날아갔다. 갑작스러운 검은 벼락의 날갯짓에 이하연이 순간적으로 당황하며 몸을 멈추었다. 검은 벼락은 그런 이하연을 배려하며 다시 은후로 돌아갔고.
“손 뻗어 봐.”
“어, 어어.”
이하연은 은후의 말에 손을 뻗었고, 검은 벼락이 다시 이하연에게 날아갔다.
“와.”
이하연이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너, 좀 무겁다?”
검은 벼락이 울었다.
까아아아악.
안 무겁다고.
“얘 지금 내 말 알아들은 것 같은데? 착각인가?”
은후가 피식 웃었다.
“알아들었을걸?”
“정말?”
“아마도.”
“흐응, 근데 내가 잘할 수 있으려나. 보통 말을 타고 이동하면서 사냥한다고 그러던데.”
단순히 말만 타는 거라면 이제 조금은 익숙해졌지만.
사실 이하연은 은후에게 비밀로 하고 틈틈이 시간을 내어 승마 수업을 받았다. 언젠가 은후와 함께 나란히 달리고 싶어서. 몽골 여행의 일정이 잡힌 후엔 바짝 연습까지 하고 왔다.
‘하지만 그냥 타는 거랑 독수리를…… 어깨? 이렇게 팔에?’
독수리와 함께 말을 모는 건 또 다른 일일 텐데. 하지만 그런 이하연의 걱정은 기우였다. 말도 독수리도 이하연을 부쩍 잘 따르며 알아서 도움을 줬기 때문이다. 물론 그 뒤에는 은후의 숨은 조력이 있었다.
* * *
겨울에 사냥하는 건 적잖이 힘든 일이었다. 사냥감을 찾는 것부터가 문제였으니까. 하지만 이런 일을 수 세대에 걸쳐 업으로 삼아온 부족에겐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저기 여우가 보이네요.’
은후가 이하연에게 그 말을 전달했다.
“자아.”
이하연이 검은 벼락의 안대를 벗겼다. 검은 벼락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허공으로 날더니 곧바로 사냥감을 향해 질주했다.
“……멋지다.”
동시에.
“조금 마음이 아프네.”
검은 벼락이 잡은 사냥감은 살쾡이의 한 갈래인 마눌이었다. 어떻게든 살려고 발버둥 치는 마눌이의 숨통을 함께 온 가이드가 끊어 주었다. 이하연은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눈을 돌렸다.
사냥, 결국 생명을 죽이는 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목적이 생존에 있다면 마음이 아프지 않았을까.
‘아니.’
정확히는 부끄러움.
사냥의 의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잘 느끼지는 못했다. 한 생명이 사그라드는 광경을 바라보며 이하연은 은후에게 다가가 말했다.
“여기까지…… 하면 안 될까?”
“상관은 없는데, 왜?”
“좀 불쌍하다고 느껴졌거든. 저 살쾡이 말이야.”
은후는 이하연의 감정을 느끼며 속으로 쓰게 웃었다.
이세계에서 적잖은 세월을 보냈던 은후에게 있어서 사냥은 유희의 일종으로 적잖이 친숙했다. 그래서 별생각이 없었는데, 이하연에게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내가 생각이 짧았어.’
은후는 이하연에게 말했다.
“그럼 사냥은 여기까지 하고 달릴까?”
“달려?”
“응, 가볍게. 연습 많이 한 모양이던데.”
“티 많이 나?”
“그럼. 열심히 연습했으면 써먹어야지.”
“좋아.”
이하연이 조금 나아진 표정으로 웃었다. 이윽고 일정이 완전히 변경되었다. 하지만 그 변환에 불만을 표시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결국 이번 일정의 중심은 은후와 이하연이었으니까.
다만.
푸르르르르륵.
허공에서 정령이 되어 은후를 따라오던 스타더스트가 불만을 표했다. 은후가 자신 외에 다른 말을 타는 것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은후는 그런 스타더스트를 달래며 이하연과 함께 말을 몰았다.
* * *
독수리 검은 벼락과 함께한 짧은 사냥, 이후 가볍게 말을 몰고 너른 평야를 달리고, 다시 검은 부족이 머무는 곳으로 돌아와 떨어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도란도란 나누는 두 사람.
그런 두 사람을 오늘 하루 종일 따라붙으며 이하연 대신 캠코더를 들었던 통역사 이은수가 툭 내뱉었다.
“그림 같네요.”
“저 노을이요?”
“풍경도 그렇고, 저 두 사람이요.”
“아.”
이창석의 부탁으로 함께하던 경호원 고명석이 쓰게 웃으며 답했다.
“그러게요.”
누구라도 부러워할 만한 광경이 저러할까.
서로를 애틋하게 바라보는 연인.
게다가 젊은 나이에 두 사람 다 성공을 거두지 않았는가.
“뭔가 영화를 눈앞에서 보는 것 같다니까요.”
“동감입니다.”
그런 두 사람 사이를 가로지르며 울려 퍼지기 시작한 기타 소리. 성호가 주체가 되어 은후의 손을 빌려 기타를 치기 시작했다. 이하연은 은후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며 눈을 감았고.
까아아아악.
사냥을 마친 후에도 은후와 이하연을 떠나지 않으려고 하던 검은 벼락이 한 차례 울음을 터트렸다. 성호의 기타 소리가 검은 벼락의 마음을 자극한 탓이다.
그건 지금 성호의 연주가 독수리를 위한 곡이었기 때문이다. 잠자코 은후의 뒤를 따르던 성호도 독수리를 인상 깊게 봤다. 특히 순식간에 허공을 질주하며 사냥감에게 내리꽂는 장면을.
성호는 바랐다.
‘나도 저 사냥에 함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확히는 내 음악이 함께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 짧은 시간 동안 떠오른 영감을 열심히 다듬었다. 사실 가능하다면 좀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보란 듯한 곡을 만들고 싶었다. 아무리 성호가 음악에 미쳐서, 죽은 후에도 음악만을 위해 살아가는 귀신이라지만, 제대로 된 곡을 만들기엔 시간이 모자랐다.
아마 평소였다면 연주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시간이 없었다. 은후가 몽골에 머물 시간이. 그래서 성호는 발상을 전환했다.
최근에 배우지 않았던가, 음악을 매개로 자연과 어울리는 법을.
그렇다면 이 모자람에 독수리의 울음소리를.
그렇기에 이름도 붙이지 않은 미완의 곡이었고, 이 곡을 완성하는 건 독수리의 울음소리였으니.
까아아아아아악.
검은 벼락도 그걸 느꼈다.
자신의 울음소리에 맞추는 기타 소리를.
다른 독수리였다면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동물도 음악을 느낄 수 없는 건 아니었다. 하나 보통 동물이라면 어울릴 수 없었을 터. 하지만 검은 벼락은 영물이었다.
까아아아아아!
자신이 내는 소리가 기타 소리와 어우러짐을 알았다. 그래서 우렁차게 계속 울었다. 뭔가 기분이 좋아서. 그것만으로도 검은 벼락이 계속해서 울 이유로 충분했다.
참으로 기묘했다, 독수리의 울음과 기타가 어우러져 자아내는 음악은.
하지만 불쾌하거나 짜증 나지 않았다.
뭐랄까, 마음을 간질이는 것이.
‘좋다.’
언어로 형언키 어려웠다.
하지만 본디 음악이 그러하지 않은가.
그저 느끼면 충분한 것을.
이 주위의 모두가 그렇게 느꼈다.
한국에서 따라온 경호원 고명석도, 갑작스레 찾아온 일거리에 부랴부랴 달라온 통역사도, 이 땅에 오랫동안 머물렀던 이들도, 국경을 초월하여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마찬가지로 다른 독수리들 또한. 그래서 어느 순간 하나둘, 근처의 독수리들도 동참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 주위를 쩌렁쩌렁하게 메우는 독수리들의 울음소리. 그리고 그 울음소리를 성호는 은후의 도움을 받아 잘게 조율했다.
기타 소리를 중심으로 독수리들이 내뿜는 울음이 하나의 음률을 이루었다.
* * *
그날 밤.
은후는 곤히 잠이 든 이하연을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하룻밤 빌린 게르에서 나오니 하늘에 총총히 박힌 별들과 이 부족의 제일 큰어른이라는 검은 바다가 은후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셨구려.”
“기다리고 계셨습니까?”
“그렇지요. 계시를 받았으니까요.”
“계시요?”
검은 바다는 어깨를 으쓱했다.
“귀인께서도 아시니 나오신 것 아니겠습니까?”
먼 과거부터 지금까지 믿어 온 정령, 그 정령이 이번에 부족에게 귀인이 찾아올 거라 점지해 주었다고 했다. 그래서 인맥을 총동원해서 자신의 손자를 보냈다고 했다.
“사실 진지하게 믿는 건 딱 저희 세대까지였지요. 제 아들은 그래도 믿는 것 같지만 손자부터는 글쎄요.”
그 이유는 간단했다.
실제로 이적을 보여 줄 수 없으니까.
“제 손자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대단하셨지요.”
검은 바다의 눈동자가 아련해졌다.
“저희 부족이 관광 사업을 시작하게 된 이유도 그래서였습니다. 모시던 정령님의 힘이 약해지면서…… 저희도 살길을 찾아야 했거든요.”
그 전까지는 사냥만으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었으나, 그러지 않게 되었으니.
“노인장이 가진 재주만으로도 충분했을 것 같은데요?”
“하지만 제 죽을 날이 멀지 않았지요. 제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요?”
미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이야기를 하며 검은 바다는 은후를 이끌었다.
이윽고 땅이 접히기 시작했다, 마나가 움직이면서.
그 흐름의 중심에는 검은 바다가 있었다. 그리고 이름 그대로 사막에 검은색의 바다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은후는 나지막하게 감탄하며 그 흐름에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