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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의 인생 룰루랄라-121화 (121/170)

제121화

이하연의 답변에 이원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혹 공개하실 생각이 있다면 미리 알려 주세요. 제가 도움을 좀 드릴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도움이라뇨?”

“그러니까…….”

이원석은 투자자였다.

주력으로 투자하지는 않았으나 운이 따라 줬는지 연예계 쪽에서 대박을 쳤다. 그 덕분에 관련 업계와 적잖은 연줄이 생겼다.

“……뮤직비디오라도 찍으면 참 좋겠던데요.”

“뮤직비디오요?”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이하연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런 말씀 드리기는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순수한 호의에서 하는…… 큼.”

이원석이 은후의 눈치를 슬쩍 살피다가 답했다.

“사실 순수한 호의는 아니고 바라는 게 있기는 합니다만.”

솔직한 이원석의 말에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은후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국내로 귀국하면 선물로 들고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정말입니까?”

“그럼요. 선물로 한 병, 같이 마실 한 병. 총 두 병을 들고 찾아뵙죠.”

“하하, 그렇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이런 약속까지 받았으니 제가 꼭 도와 드리고 싶네요. 아, 그렇다고 절대로 강요나 그런 게 아니니까요. 어디까지나 두 사람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이원석이 끙끙 앓는 걸 보다 못한 이창석이 넌지시 은후에게 한마디 건넸고, 은후는 이창석의 조언을 받아서 평소와 다르게 말을 돌리지 않고 직구로 건넸다.

“병? 술 말하는 거야?”

“어, 내가 만드는 술.”

이하연은 은후가 어떤 사업체를 차렸는지, 또 이창석과 어떤 동업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좋은 술일까?’

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이하연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딱히 싫어하는 건 또 아니지만.’

술, 그냥 그저 그랬다.

달콤한 유의 칵테일이라면, 또 누군가와 마시느냐에 따라 나쁘지 않기는 하지만.

“하연이가 아직 고민 중인 것 같으니 찾아뵐 때 말씀드리겠습니다.”

“하하, 그렇게 하세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절대 강요는 아닙니다. 그나저나 만약 거절하면 어떤 걸 준비해야 하나.”

“굳이 준비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번 일정에 이런저런 배려를 해 주신 걸 잘 아는데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더 뭔가 준비를 해 놓아야겠군요.”

잠시 은후와 이원석은 서로의 얼굴에 금칠을 해 준 뒤 헤어졌다.

* * *

한창 해가 중천에 걸렸을 무렵이었다. 하지만 겨울이 본디 그렇듯 해가 빨리 떨어지는 법. 하물며 여행을 갔을 땐 더더욱 그 체감이 크기 마련이었다.

더불어 몽골이라는 나라의 특성상 관광지를 찾거나 어떠한 활동을 하기 위해서든 먼 거리를 이동해야 했다. 그래서 바삐 움직여야 하겠지만.

‘다들 느긋하네.’

이하연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따라오는 경호원과 현지 가이드도.

은후는 이런 한가함이 마음에 들었다. 하물며 연인과 함께하는 여행이었기에 더더욱. 물론 단둘이 아니란 게 조금 마음에 들지 않기는 하지만.

‘신경 끄면 되겠지.’

이하연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주위를 두리번두리번하는 모습에 절로 은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은후야.”

“응?”

“배 안 고파?”

“그냥저냥. 배고파?”

“좀?”

그럼 뭐라도 먹어야지.

몽골 여행에 관하여 인터넷을 통해 간단히 조사는 해 왔지만 딱히 많은 정보는 없었다. 비교적 해외여행이 흔해진 시대라고는 하지만 몽골은 아직 마이너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후는 뒤에 따라오던 현지 가이드를 불러 물었다.

“점심을 먹어야겠는데요. 추천할 만한 곳이 있을까요?”

한국어와 영어를 제법 능숙하게 구사한다고 들었던 가이드가 은후에게 되물었다.

“Lunch?”

“Yes. Could you recommend…….”

하지만 영어를 버벅거렸다.

‘정확히 잘 못 알아듣는 것 같은데.’

한국어로 물어도 짧은 단답만 돌아오는 게 제대로 된 대화가 어려운 것 같았다.

“점심.”

“오! 점심. 알겠습니다.”

이게 능숙이라고.

은후가 함께 온 경호원을 빤히 바라봤다.

“그게, 한국어와…… 영어를 둘 다 구사하는 현지인 중 그나마. 죄송합니다. 안 그래도 한국인 몽골어 통역사를 요청해 놓았습니다.”

뭐가 어떻게 된 것일까.

“저도 방금 대화하면서 알게 되어……. 죄송합니다.”

변명은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뒤처리는 해 놓은 것 같았기에 은후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가이드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몽골어로.

“한국인이 먹을 수 있는 괜찮은 가게 추천해 줄 수 있습니까?”

“오! 몽골어를 할 줄 알아요?”

“조금요.”

“조금이 아닌 것 같은데요. 이렇게 능숙한 몽골어를 구사하는 사람은 통역 말고는 못 본 것 같은데, 통역사는 아니죠?”

은후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몽골어도 할 줄 알았어?”

“정말로 조금만. 기내에서 같이 책 봤잖아.”

“아, 그 책? 원숭이도 배울 수 있는 몽골어?”

“어.”

여행자를 위한 회화책.

그 책을 은후는 통째로 외웠다.

그러니 간단한 의사소통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슬슬 식사할 때가 됐죠. 가시죠. 제가 좋은 곳을 안내하겠습니다.”

가이드가 그렇게 말한 뒤 우물쭈물하다가 고개를 푹 숙이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영어와 한국어를 그렇게 썩 잘하는 편은 아니라서요.”

짙은 미안함.

최소한 예의를 어디 가져다 내버리고 철면피를 깐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그게…….”

좋은 날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은후는 오늘이 좋은 날이었으면 좋겠다고 여겼다. 이하연에게 미안해서였다. 너무 걱정을 끼친 것 같아서. 그래서 남은 기간은 이하연에게 충실한 건 당연했고.

‘좋은 게 좋은 거…… 겠지.’

괜한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굳이 변명을 들어 줄 필요는 없었다. 일단 사과는 받았고 뒤처리는 경호원에게 말을 해 놓으면 그만이니까.

“제가 따로 말씀은 안 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고명석 씨라고 했던가요?”

“네.”

“고명석 씨가 딱히 죄송할 이유는 없죠.”

“그래도요.”

“왜 이 가이드가 붙었느냐에 관해선 굳이 묻지 않겠습니다. 중요한 건 더는 사고가 일어나지 않은 것. 이따가 제대로 된 통역사가 도착하는 것, 두 가지니까요.”

“그렇죠.”

“그나마 제가 몽골어를 좀 익혀 둬서 다행이네요. 복잡한 말은 무리입니다만.”

고명석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상황이 정리된 것 같자, 이하연이 다가와서 물었다.

“이제 된 거지?”

“응, 밥 먹으러 가자.”

다행히 밥은 맛있었다.

도착한 곳은 현지인도, 그리 많지 않은 관광객도 자주 찾는다는 맛집이었는데, 식사 시간이 지났음에도 사람이 꽉 차 있었다. 하지만 가이드는 무슨 재주가 있었는지 금세 자리를 만들어 왔다.

“이거 맛있다. 골야시라고 했지?”

“응.”

양고기나 소고기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서 삶은 뒤 밥과 소스를 곁들여 먹는 음식이었다.

“한국인 중에서 싫어하는 사람은 못 봤어요.”

그 외 양고기 죽이라는 반탕이나, 양고기 튀김 만두인 호쇼르 등등이 식탁에 깔렸다.

“그, 음…….”

하지만 이하연은 처음 나온 골야시를 제외하고 다른 음식은 거의 맛을 보지 않았다. 평소에 음식을 먹을 때 청결을 중요시하는 이하연의 성격상 아무래도 손이 잘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전체적으로 깨끗하지가 않았다.

문화의 차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이 집만 그런 것일까. 아마 아직은 우리나라와 비슷한 수준으로 음식에 관해 청결을 요구하지 않는 나라여서겠지.

“앞으로 음식은 내가 만들어 줄게.”

“……응?”

“제대로 못 먹고 있잖아.”

“아…… 그, 티 났어?”

“많이. 상태가 좀 그렇지?”

“표정 관리가 잘 안 됐네. 미안.”

“미안할 게 뭐가 있어?”

처음에 골야시를 맛있게 먹었던 것도 일단 배가 고파서 주위가 잘 눈에 안 들어왔기 때문이리라. 조금 배가 찬 이후엔 식탁을 비롯한 그릇이나 식기의 상태가 눈에 들어왔을 것이고.

“나가자.”

“응?”

“억지로 먹으려다간 탈 나겠다.”

“……응.”

이하연은 은후의 배려를 거절하지 않았다. 그리고 웃었다. 은후가 자신을 그만큼 신경 써 주고 있다는 걸 느껴서, 굳이 뭔가를 더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느낌이었다.

갑자기 기분이 부쩍 좋아져서 달라붙는 이하연의 모습에 은후도 속으로 한숨을 내쉬면서도 웃을 수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경호원과 가이드는 눈치를 살피다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점심을 어찌어찌 해결했고, 그사이에 통역사가 도착했다. 이후 은후 일행이 이동한 곳은 시내에서 제법 떨어진 곳이었다. 그곳에 조그마한 부족이 모여 사는 게르가 있었다.

“어서 오세요.”

목적은 독수리 사냥 체험.

전통적으로 몽골은 독수리를 길들여 사냥에 썼다. 그 이야기를 접한 이하연이 호기심을 표했고, 오늘 오후 일정은 독수리 사냥 체험으로 결정되었다.

마침 근처의 한 부족이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마음먹고 독수리 체험을 관광화할 예정이었다고. 본격적으로 장사를 시작한 건 아니어서 손님을 받지는 않는 상태였지만.

“그, 제가 태어난 곳이 여기 게르입니다. 사죄의 의미로 돈을 받지는 않겠습니다.”

가이드가 자고 나란 곳이어서 가능했다. 물론 가이드가 안내한 부족을 고집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굳이 거절할 필요도 없었다. 사죄의 의미라기에 은후는 잠자코 가이드의 안내를 따랐다.

통역을 거치지 않고 더듬더듬하면서도 최대한 한국어로 말을 하려는 노력이 가상하기도 했고. 통역사가 함께 있는데도 굳이 저러는 이유는 아마도 미안해서겠지만.

‘애초에.’

그러지 않았으면 될 것을.

하지만 그렇게 따지고 들었다면 아까 끝장을 봤겠지.

은후는 눈빛을 반짝이며 주위를 연신 둘러보는 이하연의 얼굴에 가이드에게 신경을 껐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으니까.

“와! 저 독수리 엄청 크다!”

오랫동안 전문적으로 독수리를 키워 왔다는 부족답게 적잖은 수를 보유하고 있었다. 개중에서도 가장 덩치가 크고 유독 눈에 띄는 독수리를 바라보며 이하연이 눈빛을 빛냈다.

“하하, 알아보시는군요.”

이름은 검은 벼락이라고.

“아쉽게도 사람을 따르는 녀석은 아니라서요. 저희 할아버지 외엔 검은 벼락이 따르는 사람이 없거든요. 저도 알고 지낸 지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까칠해요.”

가이드가 잠깐 고민하다가 어디론가 달려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나이 먹은 노인과 함께 나타났다.

“손님이 왔으면 말을 해야지!”

“아, 할아버지. 저도 다 컸는데……!”

노인이 은후를 바라보더니 툭 내뱉었다.

“귀인이 오셨구려.”

노인의 몸 주위를 은은하게 감돌고 있는 마나.

은후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검은 바다라고 하오.”

“이은후입니다.”

“우리 말을 할 줄 아시오?”

“조금은요.”

“허허, 그나저나 우리 손자가 폐를 좀 끼친 모양이오만. 내, 대신 사과드리리다.”

“이미 사과는 받았습니다.”

“딱히 받은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오?”

노인이 무심한 말투로 답했다. 그러다가 가지고 온 지팡이를 땅에 내려놓으며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미안합니다.”

“……사과는 당사자가 하는 법입니다만. 아무리 가족이라고 해도 제가 노인장의 사과를 받을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손자의 실수에 내 욕심도 끼어 있었으니 나도 당사자라면 당사자이지요.”

“받아들이겠습니다.”

묘한 두 사람의 대화에 주위의 이목이 쏠렸다.

“그나저나 저 처자가 검은 벼락을 보고 싶어 한다고 들었습니다. 별거 아니지만, 사죄의 의미로 한 번 다뤄 보시겠소?”

“위험하진 않겠습니까?”

“내가 함께 있으면 괜찮을 거요.”

은후가 이하연에게 의견을 물었다.

“아니, 그냥 보는 거로 괜찮아.”

“그래?”

“저번에 그렇게 내가 잔소리했잖아. 걱정 끼치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내가 그러면 안 되지.”

“응?”

“은후, 지금 네 눈에 쓰여 있거든.”

걱정된다고.

은후가 멋쩍게 웃었다.

애초에 여기 있는 독수리가 모조리 날뛰어도 이하연을 털끝 하나 안 다치게 할 자신이 있지만, 그와 별개로 걱정하는 마음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복잡한 몽골어는 못 한다고 하지 않았어?”

“그게 말이지.”

은후가 무어라 말을 하려던 찰나, 검은 바다가 독수리 검은 벼락을 어깨에 올리고 안대를 벗겼다. 검은 벼락이 한 차례 가볍게 날갯짓을 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고 은후와 눈을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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