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7화
첫눈이 내린 이후 한동안 싸늘한 바람만 몰아쳤다. 그러다가 전북대학교의 2학기 기말고사가 끝나는 어느 날, 정확히는 심리학과의 시험이 끝나는 날.
“눈이다.”
“그러게?”
다시 눈이 찾아왔다.
“야, 그러고 보니 너 그거 들었냐?”
“뭘?”
“덕진 공원에 거대한 로봇 눈사람.”
“아, 그거 친구가 말해 줘서 들었음. 직접 못 봐서 아쉽더라.”
일전 은후가 기후 조작으로 다양하면서도 적잖은 양의 눈을 만들어 낸 후 만든 로봇 눈사람이 전주 일대에 화제가 되었다. 수호령이 추운 겨울임에도 놀러 오는 아이들을 조금 더 웃게 하고 싶다는 부탁에 은후가 흔쾌히 수락한 것이다.
‘와! 아빠, 저거 좀 봐!’
‘멋있다…….’
‘짱이다.’
‘나, 사진!’
약간의 고민은 있었다.
혹여 어떤 문제가 생길까. 하지만 딱히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고작해야 눈사람 아니던가. 물론 보통 크기의 눈사람이 아니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고작해야 눈사람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봤을 때 수준 높은 대한민국에서도 사건이 끊임없이 발생하기 마련이었다. 살인이나 강도와 같은 강력 범죄부터 공중파는 물론, 인터넷이란 바다를 점령한 모 유명 연예인의 마약 스캔들 등.
그런 사건에 비하면 느닷없이 나타난 거대한 눈사람 정도는 애교에 불과했다. 만약에, 정말로 혹여라도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직접 수습하면 그만이었으니.
“어, 하연아. 어어, 그럼 이따가 집 앞에서 봐.”
은후는 시험을 마치고 잠깐 덕진 공원에 들렀다. 몽골에 성호도 함께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음악적 영감을 얻기 위하여 외국에도 나가고 싶다는 부탁. 그런 성호를 수호령이 부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우, 나도 가 보고 싶다.”
하지만 덕진 공원에 매인 몸, 그럴 수 없다는 걸 수호령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울상이었던 얼굴을 애써 활짝 편 후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런 투정을 부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사치라는 걸 수호령은 잘 알고 있었다.
‘은후가 아니었다면. 이런 말조차 할 수…….’
그런 수호령의 상념이 은후가 건넨 말에 끊겼다.
“언젠가.”
“응?”
“나갔다 오자. 그렇게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않을게.”
“외국을?”
“응.”
“어떻게?”
은후가 빙그레 웃었다.
“잘.”
이름을 지어 준 뒤라면 어떻게든 방법이 생기리라.
‘처음에는 이 근방을.’
나중에는 대한민국을, 최종 목표는 일정한 기간만이라도 외국에서 수호령이 활동할 수 있게끔. 물론 그렇게까지 되기엔 오랫동안 준비하고 노력해야겠지.
‘그래도 잠시 외국을 구경하고 올 수 있을 정도라면.’
그리 머지않은 시기에.
“……믿어도 돼?”
“그럼.”
은후가 빙그레 웃었다.
“외국은 모르겠지만 국내라면 정말 얼마 안 남았어. 이르면 내년 봄, 늦어도 여름 중에는.”
“정말로?”
“개구리한테 고맙다고 해. 나 혼자만이었다면 더 늦어졌을 테니까.”
“개굴아!”
수호령이 개구리한테 오도도도 달려가서 꼭 껴안았다. 개구리가 툴툴거리며 입을 열었다.
“내가 그리 크게 도와준 건 없었던 거 같은데.”
“시간을 단축해 줬으니까 도움은 도움이지.”
“하여간 잘나서는.”
“잘난 건 사실인데?”
정말로 사실이라서.
“하여간.”
“너무 자격지심 가지지 말고.”
개구리가 어깨를 으쓱했다.
한때는 이해할 수 없어서 은후라는 인간이 두려웠다. 인간인지도 처음엔 믿기지 않았다. 사실 지금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건 함께 지내며 은후의 심성을 알게 되었기에.
‘몽골에서 돌아오면 그 친구에게 한번 데려가야겠어.’
그래서 개구리는 내심 은후와 어느 정도는 친해졌다고 여겼다. 그리고 그건 개구리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은후도 개구리가 꽤 편했다. 게다가 개구리가 힘을 다루는 방법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종종 마법적으로 영감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은후가 바라보기에 개구리가 마나를 다루는 방식은 원시적이었으나 정교했다. 그 정교함의 출처는 친구들이라고 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아 굳이 묻지는 않았다.
‘그건 중요하지 않으니까.’
게다가 은후와 개구리는 공동 목표를 가지고 있었으니, 수호령의 자유로운 활동이라는.
대부분은 은후가 주도하고 힘을 썼으나 개구리가 도움이 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자연스레 친근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다른 낙원의 주민들과 다르게 은후는 개구리를 꽤 편하게 대하는 편이었다. 더불어 자신이 없을 때 낙원에 무슨 일이 생겨도 개구리라면 최소한 최악은 막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혹시 나 없을 때 무슨 일 생기면 알지?”
“뭐, 그런데 그렇게까지 대비할 필요성이 있나 싶긴 한데.”
“만사 불여튼튼. 대비란 최악을 가정하고 대비하는 것부터란 게 내 신조야.”
“하여간.”
개구리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이 심해도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지만.’
개구리가 며칠 전 은후가 건네준 아티팩트를 떠올리며 내심 고개를 저었다.
* * *
차를 몰고 은후는 용산으로 달렸다. 전주를 벗어나자 흩날리던 눈발이 금세 사라졌다. 원래라면 그냥 차를 끌지 않고 기차를 타려고 했다.
전주와 용산, 용산에서 인천 공항까지의 거리를 생각하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게 훨씬 편했으니까. 일반적으로라면 말이다. 하지만 마나를 다룰 수 있는 은후에게 있어서 체력적인 건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차를 끌었다. 체력과 약간의 귀찮음만 감수한다면 차를 끌고 가는 게 편하기는 했으니까. 물론 은후라면 그냥 전부 무시하고 홀로 하늘을 나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하연이가 있으니까.’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면 하연이가 다소 불편함을 느낄 테니까.
‘은근히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쓴단 말이지.’
겉으로 아닌 척하지만, 본인도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무의식적으로. 그건 아마도 외모 때문일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자주 쏠려서.
‘그래서.’
물론 딱히 문제가 될 건 없었다. 그러나 이하연이 무의식적으로 느끼는 사소함마저 은후는 신경 썼다. 이번 여행은 처음으로 연인으로서 가는 거니까.
‘정말로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즐거웠으면.
물론 다른 일행들도 있었기에 그러긴 어려울 터였다. 공식적으로 함께하는 일정이 끝난 뒤라면 모를까. 그러니 조금이라도 편하게. 그런 생각을 이어 가며 은후는 차를 몰았다.
이제는 다소 익숙해진 길.
가는 시간이 꽤 길다고 느끼는 건 조금이라도 빨리 만나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 도착했어.
은후는 이하연의 집 앞에 주차한 뒤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잠시 후 이하연이 모습을 드러냈다. 은후가 차에서 내려 이하연에게 다가가며 웃으며 물었다.
“왔어?”
“응, 그런데 질문이 좀 이상한데.”
“뭐가?”
“왔냐고 묻는 건 내가 해야 하는 질문 아닐까?”
“그게 중요한가?”
“아니이. 그냥 뭐, 그렇다고.”
시답지 않은 이야기에 서로가 웃었다.
“그나저나 몽골도 겨울에는 엄청 춥다고 하는데, 괜찮을까?”
“뭐가?”
“아니, 이번에 몽골에 가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스타더스트 때문이잖아. 추우면 달리기 힘들 것 같은데. 이 시기면 낮에도 영하권이라고 하더라고.”
“그건 어쩔 수 없는 게 스타더스트가 슬슬 한계라서.”
몽골 하면 드넓은 초원과 사막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그래서 연중 무더운 기후라고 여기기 쉽지만 그렇지 않았다. 한 절기를 제외하면 영하권으로 떨어지는 날이 부지기수.
“겨울이라고 말이 달리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그리고 스타더스트라면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고 할걸?”
“그러려나.”
이하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스타더스트를 떠올렸다.
‘멋졌지.’
은후와 함께 호흡을 맞추며 달리는 스타더스트는. 그래서 좀 질투도 났다. 하지만 그게 연애 감정은 아니란 걸 알았기에 그 질투는 잠깐뿐이었다.
아주 잠깐, 그렇게 이하연이 스타더스트에 관해 떠올리는 사이 은후는 차의 트렁크에 짐을 실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보조석의 문을 열어 주고 언제나처럼 이하연이 올라탄 후 안전벨트를 매어 주었다.
‘으우.’
처음도 아닌데, 몇 번이나 은후가 안전벨트를 매어 줬는데.
이하연은 조금 부끄러웠다.
‘연인이 되어서 처음.’
아, 처음은 아니지.
‘전주에서도.’
은후의 얼굴을 바라보면서도 이하연은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은후와 연인이 되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고, 문자도 열심히 하고, 목소리가 듣고 싶으면 일전과 다르게 그냥 전화를 걸지만.
‘연인이니까.’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그냥 전화를 걸 수 있다는 사실이 잘 실감이 나지 않아서. 그때 이후로 이하연은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며 사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시청자들에게 한 소리 듣기도 했다. 무슨 좋은 일이 생겼냐며. 부끄러워서 그냥 얼버무렸지만 어지간히 티가 나는 모양이었다.
‘엄마나 아빠도 단번에 알아봤고.’
친구들도.
차가 도로를 달린 지 얼마나 지났을까. 이하연이 문득 정신을 차리니 도로 한가운데였다. 이하연은 태연함을 가장하기 위해 며칠 전 시청자들에게 들었던 전주의 한 사건을 언급했다.
“아, 맞다. 전주에서 큰 로봇 눈사람이 나타났다던데.”
“그거, 사진 찍어 뒀어.”
“사진?”
“혹시 기억해? 눈사람 만들자고 했던 거.”
“응? 그런 말을 했었어?”
“어, 엄청 예전이긴 한데.”
이하연이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기억이 나질 않았다.
“우리 중학교 졸업할 즈음에, 같이 게임하면서 로봇 대전 게임 나온다고. 그래서 눈사람 만들자고 했었어.”
“그때면 한창 레파 하고 있었을 때?”
“맞아.”
“…….”
은후가 피식 웃었다.
“예전 이야기니까, 잘 기억 안 날 수도 있지.”
그건 싫은데.
은후와 관련된 추억인데.
그래서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던 이하연의 표정이 휙 바뀌었다.
“눈사람 이벤트!”
그래,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기억이 나서 내가 만들었어.”
“네가? 인터넷에서는 무슨 귀신이 만들었냐면서, 이런저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나돌던데.”
이하연은 깜짝 놀랐다.
“어떻게 만들었어?”
“그냥, 뭐어, 잘?”
“그게 뭐야?”
“나중에 같이 만들면 알 수 있을지도?”
“혼자 안 만들겠네.”
“그치.”
어린 시절 가볍게 나누었던 약속을 기억하고 있는 은후. 그게 이하연은 견딜 수 없이 좋았다. 나를 이 정도로 생각해 주고 있구나 싶어서.
“오셨습니까.”
이윽고 도착한 인천 공항. 그리고 일반적인 승객들과 다르게 은후와 이하연은 동물들이 해외에 나가기 전에 머무는 곳으로 향했다. 출국 전 스타더스트를 한 번 만나기 위해서였다.
해외로 이동하는 건 인간 외 다른 동물들에게 있어서 큰 부담이기 마련이었다. 특히 매우 예민한 말이라면 더더욱. 그래서 관련 직원들, 특히 전주 승마장의 이들은 매우 민감해져 있는 상태였다.
“워워.”
스타더스트도 마찬가지였고.
하지만 스타더스트는 은후의 모습을 확인하고 안절부절못하던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푸르릉.
“조금만 있으면 돼. 정말로 조금만.”
그러면.
‘달리다가 죽을 수 있을 거야.’
은후가 전달한 의지에 스타더스트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그때까지 참을 수 있지?”
스타더스트가 가볍게 발을 굴렀다.
그 광경에 다른 직원들은 물론 이하연도 나지막이 감탄했다. 단순한 몇 마디에 곧장 진정하는 말. 얼마나 서로 교감하고 있으면 그럴 수 있을까.
잠시 후, 비행기가 하늘을 날았다.
몇 시간 후, 몽골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