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6화
전국적으로 내린 첫눈은 사람들에게 잠깐의 인사만 건네고 사라졌다. 시간으로 따지면 한두 시간 정도. 하지만 국내에서 전주는 예외였다. 은후가 마법으로 기후를 조작한 여파로 반나절 가까이.
이에 관하여 관련 학계 및 뉴스에서는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며 떠들어 댔으나 대부분 사람에게 그리 와닿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재해 수준이라면 모를까 그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성호 형! 또 기타 칠 거야?”
“글쎄.”
수호령은 낙원의 주민들과 다 같이 눈사람을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하기 싫은 주민까지 함께 하자고 할 생각은 없었다.
“가만히 있을 거면 같이 만들자!”
“흐흠.”
첫눈.
이러한 기상 현상은 음악적으로 어떤 영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하물며 귀신이 된 이후 처음으로 맞이한 눈이라면. 그러나 성호는 음악에만 미쳐서는 한계가 있다는 걸 알았다. 어느 정도는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지 않으면.
- 넘치면 모자란 것만 못할 때도 있는 법입니다. 때로는 그래야 할 때도 있겠지만요.
성호는 일전 자연이란 배경에 음악을 조화시킨 헨리 엘가의 곡 때문에 슬럼프를 겪었다. 정확히는 생각지도 못한, 너무 충격적인 일이라서. 그때 은후가 건넨 조언은 성호에게 적잖이 도움이 되었다.
“가자.”
“야호! 이모! 삼촌!”
낙원에 기본적으로 머무는 주민은 수호령을 비롯하여 성호와 연후. 은후를 비롯한 그 외의 주민은 없는 경우도 꽤 많았다. 그런데 오늘은 낙원에 모든 주민이 모였다.
“눈이라. 보통 눈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제.”
“그러게요. 그나저나 령이가 부르는데요?”
“큼.”
“여보?”
“귀찮은디. 음식이나 좀 준비할랑께.”
그러나 도깨비도 어느새 달려온 수호령의 조름에 결국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아핫!”
눈을 뭉치고.
“뀽꿍아! 아이, 거기를 밟고 뛰면 어떻게 해!”
페럿과 투덕거리면서 열심히 눈사람을 만들고.
‘좋네.’
은후는 그런 광경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마나를 움직였다. 아주 오래전. 은후도 눈사람을 만든 적이 있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기 직전.
눈이 펑펑 내리던 날.
학급의 이들이 모두 모여서 거대한 눈사람을 만들어 보자고. 그래서 몇 시간에 걸쳐서 2m를 넘는 눈사람을 만들었었다. 모양은 삐뚤어졌지만 크기 만큼은 커서.
‘그래서.’
그 이야기를 이하연에게 했었다.
- 나도! 나도 눈사람!
- 언제 같이 한번 만들까?
- 언제?
- 뭐. 언제 한번 만나면?
- 그래. 그런데 만나면 무슨 눈사람 만들까?
- 눈사람이 눈사람이지. 눈사람에도 종류가 있어?
- 에이. 그냥 다 만드는 눈사람이면 재미없지. 로봇 어때?
- 로봇?
게임 하면서 나누었던 시답지 않은 이야기.
왠지 모르게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서.
‘나 참.’
은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도 모르게 떠오른 과거의 기억이라.’
그 정도로 이하연을 신경 쓰고 있다는 증거였다.
- 요번에 새로운 로봇 대전 게임 나온다더라.
- 무슨 유명한 애니메이션 기반으로 만들고 있다는 그건가?
- 그럴걸?
- 그래서 그 로봇을 모델로 눈사람을 만들자?
- 그렇지. 이제야 이야기가 통하네.
- 약속?
- 약속까지 해야 할 일이야?
- 그건 아닌 것 같은데.
- 하여간. 아니, 눈사람 이야기해서 그러는데 이번에 레파에서 이벤트 몹으로 눈사람 나온다더라.
- 설정상으로 그게 말이 되나?
- 걔도 만들자.
- 아직도 눈사람 타령이야?
- 뭐 어때. 눈사람 좋잖아. 너 못 만나면 혼자라도 만들 거야. 아무튼 약속이다?
어린 시절.
가볍게 말했던 약속.
당시에는 진심이었을지언정 지켜지기 힘든 약속이었다. 거기에 더불어 그런 추억은 정말 강렬하지 않은 이상 어느 순간 잊기 마련이니. 솔직히 은후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마법사가 아니었다면 떠올릴 수 없었겠지.’
하연이는 기억하고 있을까.
‘기억력은 평범하니 가능성은 작나.’
홀로 기억하고 있는 과거의 한 조각일까.
‘뭐.’
그러면 또 어떤가.
‘기억하고 있다면 좋고.’
아니라면 말해 주면 되는 일.
은후가 절로 떠오른 과거를 회상하며 정교하게 눈사람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눈을 뭉치고. 모양을 다듬고. 그리고 일전에 산 카메라를 리어카에서 꺼내 사진까지 찍었다.
“오! 은후가 마법을 쓴다!”
수호령은 비유적으로 말한 것이었으나 진정한 의미에서 정답이었다.
“오오!”
저절로 눈이 뭉쳐치고 형상을 갖추어 나가는 건 수호령은 물론, 다른 주민들에게도 퍽 신기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완전 멋져!”
“그러게. 로봇?”
“옆에는 무슨 괴물 같은데. 조금 징그럽네요. 너무 정교하게 만들어져서요.”
“허흠. 이런 괴물이 한반도에 있었남?”
“저는 처음 보는데. 은후 도령이 예전에 직접 싸워 본 괴물이 아닐까요.”
주민들은 은후가 만든 눈사람을 바라보며 쑥덕였고. 은후는 그저 웃으며 딱히 답을 돌려 주진 않았다.
“령아.”
“응?”
그리고.
“앗!”
수호령을 눈사람 로봇 어깨에 올린 후 마나를 움직였다.
“와앗!”
로보트가 걷기 시작했다.
수호령이 환히 웃으며 소리 질렀다.
“움직인다!”
어느새 옆에 다가온 연후가 슬쩍 은후에게 말을 걸었다.
“저어.”
“네. 말씀하세요.”
“저도 이따가 좀 타 볼 수 있을까요?”
“눈사람을요?”
“……네. 이런 말 하기 부끄럽지만 진짜 어렸을 때 꿨던 꿈이 로봇 조종사였거든요. 왠지 저 모습을 봐서 그런지 그때 생각이 나네요.”
그때.
“공룡은 어때?”
멀찍이 떨어져서 홀로 눈사람을 만들던. 아니, 눈 공룡을 만들던 개구리가 다가왔다.
“공룡?”
“응, 공룡.”
개구리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곳에서는 은후가 만든 높이 약 3m 정도의 눈 공룡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어때. 멋지지?”
개구리가 으스대며 어깨를 활짝 폈다.
“공룡. ……멋지네요.”
연후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고.
“후후.”
개구리가 뿌듯하게 미소 지으며 자신이 만든 결과물을 바라봤다. 은후가 저지른 일을 보고 약간의 영감을 얻은 개구리가 저 나름대로 힘을 쓴 결과물이었다.
* * *
며칠 후.
은후는 전주 승마장을 찾았다.
곧 있으면 몽골로 출국이었다. 그래서 슬슬 스타더스트를 인천 공항 쪽으로 이송할 계획이 잡혀 있었다.
“뭐가 불만이야?”
그런데 스타더스트의 컨디션이 썩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정확히는 기분이 안 좋은 편이랄까. 이런 사소함이 말의 컨디션에 영향을 끼치기 마련이어서 전주 승마장에선 은후의 도움을 요청했다.
기껏 몽골까지 갔는데 스타더스트의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문제가 될 테니까. 은후도 기꺼이 전주 승마장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스타더스트는 오랜만에 은후를 만났지만 계속해서 푸르릉거렸다.
“못 달려서?”
은후가 피식 웃으며 스타더스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전하구나, 넌.”
언제나 달리고 싶다고.
스타더스트의 기분이 좋지 않은 건 한동안 은후가 보이지 않았던 것과 더불어 달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만간. 정말로. 그때라면 죽을 때까지 달릴 수 있을 거야.”
비유가 아닌 문장 그대로의 의미였다.
푸르릉.
- 정말?
“그래, 정말로.”
그리고.
- 죽어서도.
죽음 이후에도 달릴 수 있을 거라고.
- 그때는 원 없이.
스타더스트가 고개를 치켜들며 발을 굴렀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스타더스트의 전담 직원이 활짝 웃었다. 동시에 속으로 씁쓸해 하며 은후에게 말을 걸었다.
“이야. 확실히 은후 씨가 오니 완전 표정 핀 거 보이세요?”
함께한 세월은 자신이 더욱 긴데.
그런데 여전히 자신에게는 쌀쌀맞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은후를 제외한다면 그나마 자신이 제일 친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완전히 자신에게 마음을 열지 않은 스타더스트.
‘그래도.’
자신에게도 마음을 열었다면 그건 또 그것대로 씁쓸할지도 모르겠다고. 스타더스트의 전담 직원은 그러한 생각을 저도 모르게 했다.
손에 넣을 수 없는 아름다움.
잡히지 않았기에 받는 월급 이상의 노력과 정성을 쏟았다. 마음까지도. 게다가 스타더스트가 마음을 연 사람은 은후였다. 솔직히 처음에 질투도 났다.
왜 내가 아닐까.
하지만 스타더스트와 함께 호흡을 맞추며 달리는 은후의 모습을 본 뒤로 절로 납득했다.
‘아.’
그래서.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이번에도 볼 수 있겠지.’
몽골로 간다고 했다.
스타더스트의 마지막 질주를 위하여.
그게 못내 기뻤다.
동시에 아쉽기도 했다.
마지막이 될 테니까.
직원은 스타더스트의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몽골로 갈 준비는 잘 되어 가고 있나요?”
“그럼요. 저희 전주 승마장 측에서도 얼마나 신경을 쏟고 있는데요. 게다가 일이 좀 커졌다고 해야 하나요? 그래서 더 그렇죠.”
“일이 커져요?”
“아.”
스타더스트의 전담 직원이 잠깐 멈칫한 후 입을 열었다.
“은후 씨에게는 말해도 괜찮겠죠. 이원석 씨가 저희 업계에서 발이 넓은 건 알고 계시죠?”
“네, 들었습니다.”
“스타더스트 사랑으로도 유명하시거든요. 그 이원석 씨가 스타더스트와 함께 몽골로 간다는 소문이 퍼져서요. 그래서 어떻게 하다 보니 국내 기수분들도 함께 하게 되었거든요.”
어차피 은후도 알게 될 일이라서 직원은 편하게 이야기했다.
“그래도 내밀한 사정까지 제 입으로 말하기는 좀 그렇네요.”
“복잡한 일인가요?”
“그, 글쎄요. 나름대로는요?”
“알겠습니다.”
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물어볼 필요는 없겠지.’
알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그때 전주 승마장의 후원자 이원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십니까.”
“네, 안녕하세요.”
“오셨다는 말을 듣고 급히 왔지요.”
“한창 바쁘시다고 들었는데요.”
이원석이 일부러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하하. 그래도 은후 씨가 오셨는데 와 봐야지요. 이번 행사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은후 씨 아닙니까.”
“행사 말입니까.”
“그럼요. 행사죠. 게다가 감사의 인사도 드려야 하니까요. 이번에 모델 제안에 승낙해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네.”
사실 은후로서는 모델 건은 별 생각이 없었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그럼에도 승낙한 이유는 하연이가 원하니까.
“날짜는 저번에 말씀드린 대로…….”
이원석은 굳이 자신이 전달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를 은후에게 말했다. 이렇게 이원석이 은후에게 신경을 쓰는 이유는 환상의 술 때문이었다.
- 하. 내가 그때 말실수해서는. 그나저나 은후 선생이 말 타는 재주까지 있었는 줄은 나도 몰랐군.
며칠 전 전주 유지인 이창석에게 확답까지 들었으니.
- 은후 선생과 친해지려고 애쓰는 건 막지 않겠네만. 만약에라도 피해는 주지 말게. 이용할 생각도 하지 말고. 이건 내 친구로서 하는 충고일세.
- 충고? 경고가 아니라?
- 흥. 경고는 무슨. 선생은 자네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이야. 내가 신경쓰지 않아도…… 뭐. 뒷말은 말 하지 않음세. 친해질 수 있다면야 떨어지는 콩고물이 많을 수도 있겠지. 그런데 너무 이득만 보고 달려들지는 않는 게 좋을 거야.
- 난 다른 건 됐고 술이나 넉넉하게 받았으면 좋겠는데. 솔직히 자네가.
- 아, 됐고. 아무리 친구여도 그건 안 돼. 은후 선생의 허락이라도 받아 오면 모를까. 아, 맞다. 그 몽골 행. 나도 갈 거니까 준비해. 은후 선생이 조금이라도 놀라는 모습을 보고 싶으니까 비밀로 하고.
이원석은 이창석의 말을 허투로 듣지 않았다.
‘뭔가 원하는 게 있는 것 같은데.’
은후는 이원석의 심리를 꿰뚫었으나 그 바라는 바가 묘하게 참 사소한 것 같아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뭘까?’
내게 원하는 바가.
“……그러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뭐.
굳이 신경 쓸 바는 아닌가.
이후 시간이 흘러 은후가 몽골로 갈 날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