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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의 인생 룰루랄라-115화 (115/170)

제115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첫눈인가.’

싸라기눈.

소위 싸락눈이라 불리며 구름으로부터 떨어지는 백색의 불투명한 얼음 알갱이.

‘영하 30도 이하의 차가운 공기에서 만들어지며 모양은 둥글거나 깔때기형. 크기는 약 2~5밀리미터 정도.’

문득 떠오른 정보.

눈 종류는 아는 사람만 알겠지만 꽤 다양했다. 그리고 은후는 눈의 갈래에 관하여 상세하게 알고 있었다. 그건 어머니가 눈을 매우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비나 눈 따위의 기상 현상에 관하여 이런저런 설명을 많이 듣고 자라 왔다. 물론 어렸을 때 과학적으로 어머니가 이렇게 상세한 설명을 하지는 않았다.

눈은 구름이 내리는 선물이라고, 그런 식으로 늘 말씀하셨다. 그러다가 학교에 다니고 호기심이 생겨서 직접 찾아보고, 그렇게 알게 된 지식들이었다.

‘여전히 좋아하시려나.’

어느 순간부터 그러한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었는데.

‘같이 봤으면.’

어머니와.

‘아니면 하연이와 봐도 괜찮았겠고.’

아쉽게도 이하연은 은후의 집에서 하룻밤 보내고 바로 용산으로 올라갔다.

‘하루 더 있으면 내가 못 견디겠는걸.’

젊은 남녀가 단둘이 밤새 시간을 보내며 아무런 일이 없었다. 심지어 연인 사이임에도. 물론 두 사람 중 아무나 그런 마음을 먹었다면 말이 달라졌을 터.

그럼에도 둘 다 그러지 못한 이유는 조심스러워서.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너무 강하다 보니 쉽게 손을 뻗지 못했다. 그래서 아쉬웠다. 동시에 만족스럽기도 했다.

‘나중에 그럴 기회는 또 있겠지.’

은후는 약간의 아쉬움을 털어 버리고 덕진 공원으로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평소와 다르게 차를 끌지 않고 걸어가는 이유는 눈 내리는 풍경을 즐기기 위함이었다.

은후의 집에서 덕진 공원까지의 거리는 조금 애매했다. 차를 끌면 매우 금방이지만, 걸어가기에는 약간의 시간이 걸리는 거리. 어떻게 보면 적당하다면 적당한 거리랄까.

‘이쪽 길을 이용하는 건 진짜 오랜만이네.’

얕은 오르막길을 올라가는 샛길, 그 샛길 아래로 흐르는 천, 그리고 그 아래로 떨어지는 하얀 알갱이들. 은후가 잠시 멈춰 서서 물끄러미 천을 바라봤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개굴.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한창 겨울잠을 잘 때로 기억하는데.

“도령.”

“개구리?”

보통 평범한 개구리가 아니라, 천 년 묵은, 이제는 낙원의 주민이 된 개구리였다.

‘내가 눈치채지 못했어?’

물론 적대감이라던가 공격할 의도가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보통은 그러지 않더라도 어떠한 존재의 접근을 눈치채지 못하는 일은 거의 없었는데. 특히 현대에 와서는 더더욱.

그런 이상함을 눈치채자, 주위의 변화된 모습을 인식할 수 있었다. 애초에 도시의 중심에 있는 얕은 물줄기였다. 강이라고 부르기에도 뭐한. 수질도 그리 깨끗한 편은 아니었을 터.

“혹시 이곳을 영역으로 삼았어?”

“역시, 은후 도령은 눈치챘구려.”

정령이 오랫동안 머물거나, 혹은 의도적으로 일정한 범위를 자신의 구역으로 삼고자 하면 그 의도에 따라 이런저런 부가 효과가 나타났다. 아마 개구리가 이곳에 의도한 바는 은신이지 싶었다.

“은신이라.”

“어떨 때 은후 도령은 몇백 년 전의 도사처럼 보인다니까. 사실은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놀래 주려고 했는데 왠지 그러면 들킬 것 같았고.”

“들켰을걸.”

“칫.”

“그나저나 이곳을 왜?”

딱히 영맥이 흐르는 곳도 아닌데.

“어제 령이가 그러더라고. 덕진 공원에 오다가 한 아이의 아버지가 이곳에서 크게 다쳤다고. 다행히 죽지는 않았지만.”

“그런데?”

개구리의 말투가 갑자기 바뀌었다.

‘이제 와서 보니 의도적으로 그러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이유가 뭘까.

그냥, 이라고 말하기엔 분명히 어떠한 인과가 있을 것이 분명하다고 은후는 판단했다. 그건 마법사로서의 직감에 근거한 것이지만 은후는 그 감을 무시하지 않았다.

“뭐,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만 해도 별생각 없었지.”

하지만 딱히 중요한 건 아니라, 그저 기억만 해 두고 개구리의 말에 집중했다.

“령이도 자신의 구역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니까 별 개의치 않았고, 아이가 아니라 아이의 아버지가 다친 것이기도 했고. 그런데 은후 도령도 알지? 령이의 영역이 늘어난 거.”

“……알지.”

모를 리가.

아마 이름을 지어 주면 더 늘어날 터. 물론 중심이 되는 건 쭉 덕진 공원의 부지겠지만, 간접적으로 미약하게나마 영역이 확장될 건 분명했다.

“아마 령이라면 늘어난 범위의 아이들도 신경 쓰지 않을까?”

“쓰겠지.”

“그런데 덕진 공원이 아니라면 힘이 부칠 수도 있을 거야. 그럴 일은 보통 드물겠지만. 죽을 정도의 상처라면 또 모를까. 하지만 확실한 건 새로 생긴 영역에서 힘을 쓰려면 평소보다 힘들 거란 말이지.”

그래서.

“나도 한 손 좀 보탤까 싶어서. 물이 있는 곳이라면 지금의 나는 꽤 강하다고.”

평소와 다르게 꽤 진지한 말투였다.

‘하기야.’

개구리가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비가 오는 날 전주에 물과 관련된 거대한 재해를 가져올 수 있을 정도니.’

실제로 일어난다면 은후가 아니라면 막을 수 없는 재앙이 될 것이다.

“뭐, 내가 힘을 제대로 쓸 수 있게 된 것도 다 은후 도령 덕분이지만.”

은후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래서 최근 들어 그렇게 빨빨거리며 돌아다녔나.”

“빨빨은 무슨.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지.”

“친구들의 생사 확인이라든가?”

“……흥, 다 알고 있으면서.”

긴 세월, 현대화가 되기 이전에 개구리는 참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 그 와중에 많은 친구도 사귀었다. 인간 외에도 지성이 있는 영물이나 요괴나 괴물들과.

개중에 인간의 기준으로 따지면 악도 선도 혼돈도 중립도, 참 다양한 이들이 존재했다. 하나 지금까지 살아남은 존재는 거의 없었다. 그 살아남은 존재마저도 소멸 일보 직전이었다. 개구리는 그게 조금은 씁쓸했다.

‘아무리 죽음이 순리라지만.’

은후가 개구리에게 툭 말했다.

“어지간하면 데려와.”

“……그래도 최소한 피해는 안 끼쳐야지. 령이를 생각하면 더더욱.”

“데려온다고 전부 주민으로 받아 준다는 의미는 아니었는데.”

“거야 당연한 소리를. 하지만 1차적으로 걸러야지. 령이의 판단 기준은 인간에 꽤 근접한 편이니까.”

“령이가 마음에 들면 된다?”

“아닌가?”

은후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맞지.”

애초에 낙원을 만들게 된 이유도 결국 수호령 때문이었으니까.

“심각한 이야기는 이쯤 하고, 얼른 공원으로 가자고. 령이가 기다리고 있을걸?”

“기다리고야 있겠지만 지금쯤 신나지 않았으려나.”

눈이 내리고 있으니까.

개구리가 눈을 가늘게 뜨며 주위를 둘러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은후에게 물었다.

“공원에 함박눈이 내리면 령이가 좋아할까?”

“아마도?”

아, 은후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이 물길에 축적한 힘을 사용하려고?”

“뭐.”

“깜짝 파티로 쓰기엔 좀 아까울 것 같은데.”

“령이가 기뻐한다면 그거로 좋지.”

그 말에 은후도 동의는 하지만.

“애꿎은 힘 낭비하지 말고, 내가 할 테니까.”

“은후 도령이?”

잠깐의 기후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라면야.

‘그것도 흐름에 탑승하는 거라면.’

가뭄에 비를 내리는 정도의 큰 규모는 아니었다. 그 정도 일을 벌이려면 은후도 단단히 준비해야 했다. 하지만 눈이 내리는 날 좀 더 많은 눈을 내리게 하는 것이라면야.

‘기왕이면 눈의 종류도 다양하게 하면 재밌겠어.’

은후가 마나를 일으켰다. 그리고 덕진 공원으로 향하면서 대기의 흐름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그 광경에 개구리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미친.’

은후 도령이 대단한 사람일 줄은 알았지만.

‘어디 대라신선이라고 해도 믿겠네.’

이 정도 일을 본신의 힘으로 간단하게 발휘할 줄은.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커져 가는 힘, 바뀌는 대기의 흐름. 그 중심에는 은후가 있었다. 이 정도의 힘을 단순히 수호령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눈을 만든다는 데 쓴다는 게, 개구리는 좀 믿기지 않기도 했다.

‘내가 생각했던 규모의 몇 배 이상이야.’

개구리도 할 수는 있었다.

‘할 수야 있겠지.’

예전에 은후를 만나기 이전에라도. 다만 그 이전이라면 죽었을 것이고, 지금이라도 꽤 긴 시간을 끙끙 앓아야 할 것이다.

이윽고.

“은후다!”

은후가 대기의 흐름을 만지작거리며 덕진 공원에 도착했다.

“개구리! 요새 어디 갔었어? 잘 안 보이던데.”

“하하.”

개구리가 어색하게 웃었다.

‘령이도 눈치는 챈 거 같은데.’

은후를 믿는 모양인지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자신은 미약하게 떨리는 손을 주체할 수가 없는데.

“령아.”

은후가 물었다.

“눈이 더 내리면 좋을까?”

“……으음.”

뭔가를 눈치챈 수호령이 골똘히 고민했다.

“반반? 올해 첫눈이라서 좋기는 한데 눈사람을 만들 수 없어서 좀 아쉬웠거든. 그래도 너무 추우면 아이들이 불편해 하니까. 아플 수도 있고.”

그리고 너무 눈이 많이 내리면 아이들이 오지 않으니까.

“그건 좀 섭섭할지도. 응, 그러니까 너무 안 내렸으면 좋겠다.”

“그럼 잠깐 내렸다가 사라지면 괜찮겠네?”

“어…… 그러면 좋겠지?”

“좋아.”

은후가 손을 가볍게 하늘로 뻗었다. 하지만 그 가벼운 손짓과 다르게 하늘은 크게 변했다.

“응?”

갑자기 덕진 공원을 중심으로 하늘에 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

개구리가 표정을 더욱 굳히며 하늘을 바라봤다.

‘이 정도의 힘을…… 이렇게 가볍고 부드럽게 다룬다고?’

하지만 개구리의 생각과는 좀 달랐다. 단순히 마나를 다루는 게 아니었다. 이세계에서 긴 세월 수많은 인간들이 쌓아 올린 마법이라는 학문의 총아, 일종의 법칙.

이윽고 은후의 손에서 마나의 흐름이 정밀하고 치밀하게 일종의 형상을 갖추었다.

‘웨더 컨트롤.’

날씨 조작, 거기에 약간의 양념을 더해서, 함박눈, 싸락눈, 가루눈, 진눈깨비 등 다양한 종류의 눈이 덕진 공원에 흩날리기 시작했다.

“와!”

수호령이 눈을 반짝였다.

“하.”

개구리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짧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아름답다.’

수호령은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눈의 향연에, 개구리는 은후가 다룬 웨더 컨트롤이라는 마법의 흐름에, 서로가 다른 걸 보며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나도 배울 수 있을까.’

개구리가 중얼거렸다.

“개굴아!”

“……어?”

“눈사람 만들자!”

“어어.”

“은후도!”

은후가 피식 웃으며 가까이 다가와 신나게 폴짝폴짝 뛰는 수호령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은후가 한 거지?”

“아마도?”

“아마도는 뭐야. 그래서 이 눈은 언제까지 있을 수 있어?”

“령이가 원하는 시간까지……는 장담 못 하겠는데. 너무 길게까지는 힘들어서. 사라지게 하는 건 당장에라도.”

“좋아! 일단 그럼 눈사람부터!”

수호령과 은후가 손을 잡고 공원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개구리는 그 모습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뒤따랐다.

‘은후 도령이 나쁜 사람도 아닌데 뭐.’

그게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 * *

그날 오후.

“LBS 8시 뉴스에서 전해 드립니다. 오늘 오후 전주의 덕진 공원에서 갑작스러운 기상 이변이 발생했습니다. 약 2시경 갑작스럽게 덕진 공원 상공에 구름이 몰려들며 많은 눈을 쏟아붓기 시작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도 찾기 어려울 정도의 드문 일로서…….”

(중략)

“……게다가 LBS에서 취재한바, 내리는 눈의 종류도 참 다양했다고 합니다. 현장 알아보겠습니다. 이현미 기자?”

“네, 기자 이현미입니다. 현재 저는 덕진 공원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현장 보면서 설명하겠습니다. 느닷없이 눈이 내린 건 이해할 수 있지만…….”

덕진 공원에 은후가 불러일으킨 사태가 공중파 뉴스까지 타게 되었다. 공중파 뉴스까지 타게 된 이유는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다양한 종류의 눈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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