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0화
김현석의 아쉬움에 우현도 또한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다시 들을 수 없다는 희소성으로인한 안타까움이 음악으로부터 느낀 만족감을 더욱 배가시키긴 했다.
아스라함.
하나 다시 들을 수 없다는 게 더더욱 아쉬웠으니.
“종이와 펜 좀 빌릴 수 있을까요?”
“네?”
갑작스러운 은후의 요청.
‘최대한 기억을 살려서 악보라도 그리려고 하려는 걸까.’
이 상황에서 종이와 펜을 요구하는 이유는 뻔했다. 하지만 우현도의 추측에서 명백하게 틀린 점이 있었다. 그건 은후의 기억력이었다. 은후가 그러고자 할 마음만 있다면 몇십 년 전의 일이라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고작 몇 분 전의 일이라면 굳이 마나를 움직일 필요도 없었다.
“오선지가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없네요.”
“바에 그런 것까지 바라는 건 좀 그렇죠?”
은후는 가볍게 우현도의 말을 받으며 받은 펜으로 줄을 그었다.
슥슥, 가볍게.
‘그림을 그렸나?’
매우 반듯하면서도 올곧은 선이었다.
‘잘 모르겠네.’
분명히 손으로 그리고 있는데. 마치 기계로 찍어 내는 듯한 느낌을 받는 건 어째서일까.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인위적이라기보다 자연스러운 감성이 강했다.
‘참 신기한 사람이란 말이지.’
분명히 친구에게 듣기엔 평범했는데. 하지만 역시 사람을 판단하는 일은 직접 겪어 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 그런 세상의 진리를 새삼스레 깨달으며 우현도가 진지하게 은후의 손끝을 주시했다.
하지만 만약 우현도의 생각을 김현석이 알았다면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적어도 김현석이 아는 은후는 이렇게 다재다능하면서도 신비한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적당히, 어디에서나 흔히 볼 법한 그런 인물이었다. 우연히 얽힌 사건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 오지도 않았을 터.
‘그나저나 고민을 하나도 안 하네.’
기억을 더듬다 보면 헷갈릴 만도 한데. 하물며 즉흥으로 연주했던 악보를 되살리고자 한다면.
‘다 됐다.’
은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악보를 다시 한번 훑었다. 점검의 의미가 아닌 악보의 전체적인 맥락을 짚어 보기 위해서였다.
‘어때요?’
은후가 성호에게 물었다. 성호는 한참 동안 악보를 바라보다가 뭔가 후련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좋네요. 이게 방금 제가 연주한 곡이란 말이죠? 은후 씨 아니었으면 어떻게 살았을까요. 아, 지금은 귀신이니까 살았다는 건 좀 이상한가?’
‘이상한 건 아니죠. 정령에게도 생명이 있으니까요.’
‘생명, 생명. 정령도 생명체죠. 그런데 귀신은 생명체가…… 어, 음.’
‘정령에게 있어서 생명이란 정의를 어떻게 내려야 할까, 그건 어느 정도 결론이 났어요.’
‘결론이요?’
‘네, 관심이 있다면 나중에 자세하게 설명해 드리죠. 그러니 일단 악보에 집중을.’
‘…….’
평소와 다르게 음악이 아닌 다른 주제에 관심을 두는 성호였다. 그건 아마서 취해서겠지. 그래서 성호는 평소에 속에 담아 두었던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좋아요, 좋아. 잘은 모르겠지만. 아니, 알기는 알겠는데. 하여간 이 곡, 닮았죠? <비와 사랑>에.’
‘네.’
하지만 결이 다르다고.
설명하려 들면 은후는 합리적인 이유와 예시를 충분히 들 수 있었다. 하지만 뒷말을 삼켰다. 마법사가 아닌 정령인 성호에게 있어서 굳이.
‘그래.’
굳이 알 필요가 없는 것들이었다.
그저 느끼면 그것으로 족했다.
‘조금은.’
쓸쓸할지도.
마법이란 근본적으로 홀로 걷는 길이었다. 하나 동시에 함께하는 길이기도 했다. 그 대상은 동료일 수도, 적일 수도, 혹은 아예 상관이 없는 사람일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마법사.’
그런 의미에서 은후는 오롯하게 홀로 걸어야 했다.
현대에 마법사는 은후뿐이었으니까.
그게 아주 조금, 아주 조금.
‘뭐.’
어쩔 수 없는 일.
제자를 받을 생각도 없었고.
‘다시 한번 연주해도 될까요?’
‘좋죠.’
은후가 기타를 잡았다.
같은 곡이 다시 한번 연주되었다. 하지만 관객들은 다시 한번 곡에 푹 빠져들었다.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 * *
다음 날, 예정과 다르게 은후는 차를 이끌고 근처 대형 마트로 향했다. 원래라면 은후가 용산으로 올라가려 했으나, 이하연이 반대한 것이다.
‘이번에는 내가 내려갈게.’
근래에 은후가 항상 올라왔으니까.
‘이번엔 내가 가야지.’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데.’
‘어떻게 신경 안 써. 가까운 거리도 아닌데.’
‘괜찮다고 말해도 안 듣겠네.’
‘응. 네가 괜찮아도 내가 안 괜찮으니까. 거기다가 집도 샀다며? 집들이 해야지.’
사실 그런 핑계가 없어도 내려갔겠지만.
‘첫 손님은 나지?’
‘처음은 아닌데.’
‘그럼 누구?’
‘어머니.’
‘아.’
순간적으로 솟구치려던 질투가 팍 가라앉았다.
‘으응. 어머니면, 뭐어.’
‘시간 맞춰서 역으로 갈게.’
‘응.’
은후와 이하연은 이른 아침에 그런 대화를 나누었다.
‘뭘 입지?’
예약해 둔 기차 시간에 맞추어 나가려면 슬슬 결정해야 하는데.
‘좋아.’
이게 좋겠다.
‘속옷은.’
깔끔하게.
‘어, 음.’
그,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아니.’
은후가 그러지 않을 거란 건 알았다. 연인에 가까운 사이였으나 아직 명확하게 언어로 정돈하지는 않았으니까. 그리고 사귄 직후에 은후가 그럴 것 같지도 않았고.
‘난 그래도 괜찮은데.’
오히려 그랬으면 하는 바람도 있지만, 은후는 자신을 소중하게 대했다.
언제부터인가, 명확한 시점은 잘 모르겠지만. 처음에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그 또한 관계의 발전 덕분일까.
‘으.’
하지만 그와 별개로 속옷은 나름대로 중대 사항이었다. 아무런 일이 없어도 마음가짐과 기분적으로도.
‘멀다.’
용산에서 전주, 다소 먼 길이었다.
그래도 길은 명확했다.
객관적으로도, 주관적으로도.
도착해야 할 목적지는 명확했으며, 만나고자 할 사람은 역에 도착하면 바로 만날 수 있을 터.
‘옛날 생각 나네.’
은후를 만나러 전주로 가는 길. 그때에는 그저 단순한 친구 사이. 하지만 그때 은후와 함께 보냈던 시간은 무척 선명했다.
대개 과거는 시간이 흐르면 추억으로 변하고, 그 추억은 낭만이란 이름으로 포장된다. 하지만 이하연이 은후와 함께 보냈던 시간은 진실로 감미로웠다.
‘어?’
사람은 과거를 추억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에 잠길 수 있었다. 좋은 추억이라면 더더욱. 하물며 고통 속에서 바라보는 기억이 아니었다. 희망이란 단어를 품은 미래가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눈이다.’
맑은 날에도, 비가 오는 날에도, 은후와 함께하는 시간이 좋았다.
‘눈이 오는 날에도.’
함께, 좋은 시간을.
행복을.
물론 항상 그럴 수만은 없겠지. 그러니 그렇게 노력하자.
‘어, 응?’
그러고 보니 하나 잊은 것 같은데.
은후를 만나러 간다고, 그저 그것만을 생각해서.
‘선물!’
집들이 선물.
‘어, 으, 어쩌지?’
달리는 기차.
도착하면 마중 나올 은후.
장소를 바꿀 수도, 시간을 옮길 수도 없었다.
‘중간에 내려?’
아니, 그건 또 아닌 것 같은데.
약속 시간을 어기는 건 분명히 은후가 싫어하는 일이니까.
행복했던 추억이 머리에서 순식간에 사라지고 이하연의 머리에 어지러움이 가득 찼다.
* * *
이하연이 달리는 기차 안에서 은후를 생각하고 있을 때, 은후는 어머니와 함께 익산에서 전주로 오는 길이었다. 집을 샀다는 은후의 말에 어머니가 한번 보고자 했던 것이다.
“아들이랑 드라이브도 하고 좋네.”
“처음이죠?”
은후의 어머니가 조그맣게 웃었다.
“그래, 처음이지.”
아련한 표정을 지으며 어머니가 말을 이었다.
“네 아빠도 뿌듯해 하셨을 거야.”
“…….”
“어느새 보란 듯이 회사도 차리고, 집도 사고. 원래는 집을 지을 예정이었다고 했지?”
“네, 시간이 너무 걸려서 일단 하나 샀어요.”
부담이 없기에 가볍게 할 수 있는 말. 금전적으로 여유가 없으면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
“따로 빚내서 하는 사업도 아니라서 넉넉해요. 그러니까 어머니가 원하시면 언제든지 일 쉬셔도 괜찮아요.”
“엄마, 아직 젊어.”
“알아요. 당장 일 그만두시라는 게 아니라 그냥 알아두시라고요. 힘드시거나 귀찮으면요.”
그런 선택지가 있다고.
“그나저나 그 친구는 언제 보여 줄 거니?”
“그…….”
은후가 머뭇거렸다.
“네 영상이라고 듣고 깜짝 놀랐다. 처음에 나도 긴가민가했는데.”
워낙에 유명해진 은후가 이하연과 함께하는 영상. 아무리 들어도 은후의 목소리 같다고, 또 뒤태가 똑 닮았다며 숍의 한 손님이 은후의 어머니에게 영상을 보여 줬다. 그리고 은후의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임을 확신하고 물었다. 그 영상의 주인공이 네가 맞냐며. 차마 거짓말은 할 수 없었기에 은후는 긍정했다.
언제부터인가 부쩍 커 버린 아들의 머뭇거림에 은후의 어머니는 웃었다. 은후가 누군가와 만나는 걸 딱히 무어라 할 생각은 없었다. 범법자라든가, 정말 쓰레기와 같은 인성을 지녔다면 모를까.
애초에 젊은 나이가 아닌가. 살아가면서 남녀가 사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나, 헤어지는 것 또한 그러했다. 그러니 진지한 이야기를 꺼내는 건 시기상조.
“가벼운 사이는 아닌 것 같던데?”
“네, 뭐어, 그렇죠.”
그럼에도 이렇게 자꾸 묻는 건 이럴 때만큼은 아들이 어린애 같아서. 그래서 굳이 오늘 집을 본다고 살짝 억지를 부렸다. 오후에 그 친구가 온다고 했던가.
‘궁금하기는 한데.’
일찍 자리를 피해 줘야지.
아들도 그 친구도 부담일 테니까.
그 정도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어느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도착한 집. 은후의 어머니가 꼼꼼히 살펴보며 말했다.
“깔끔하게 잘했네?”
“그럼요. 누구 아들인데요.”
집을 산 지 고작 며칠, 기본적인 인테리어는 건드리지 않고 도배만 새로 했다. 그리고 필수적인 것들만 들여놓았다.
“인테리어가 좀 낡은 것 같긴 하다만. 새로 하는 게 낫지 않았겠니? 좀 더 늦으면 돈을 떠나서 하기 힘들 텐데.”
“제 손으로 하려고요.”
“직접?”
“네.”
“음. 그래. 다 생각이 있겠지.”
변명이 아니었다. 실제로 굳이 다른 걸 건드리지 않은 이유는 은후가 직접 집 내부에 손을 대기 위함이었다. 마법적으로 이런저런 조치를 하기 위해서.
‘연못도 하나 만들어야 하니까. 영맥의 흐름을 끌어와서 결계를…….’
순간적으로 이어지는 상념.
은후는 사고의 흐름을 두 개로 나누었다.
하나는 집에 관하여, 다른 하나는 어머니에게.
“엄마는 이만 가 볼게.”
“벌써요?”
“엄마도 약속이 있어서.”
일부러 잡은 약속이었다.
“모셔다 드릴게요.”
“괜찮아. 집들이 준비해야지?”
“딱히 준비랄 것도 없는데요.”
한창 실랑이 끝에 은후가 졌다. 어차피 근처로 친구가 데리러 온다고 했으니, 굳이 마중이 필요 없다면서.
“근처가 어딘데요?”
“덕진 공원. 여기서 조금만 걸으면 되잖니?”
덕진 공원이라.
“잘됐네요.”
“뭐가?”
“그런 게 있어요. 거기까진 그럼 같이 가요.”
우연이라지만 기회가 닿았다. 그러니 낙원의 주민들에게 어머니를 소개하는 것도 좋겠지 싶었다. 물론 서로가 대면하게 하게끔 하는 건 아니고, 주민들만이 어머니를 인식하게 되겠지만서도.
‘하연이 기차 도착 시간이 3시 20분이랬나.’
시간은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