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의 인생 룰루랄라-108화 (108/170)

제108화

살아가면서 겪는 감정의 변화는 사람으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감정의 기복이 없다면 어찌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생명체라면 응당 당연한 일. 그런 점에 있어서 정령, 개중에서도 인간으로부터 비롯된 귀신의 감정은 이질적이기 마련이었다.

특히 현대에서 탄생한 귀신이라면 더더욱. 평범을 초월한 어떠한 집착이나 소망이 없다면 정령이 될 수 없음이니. 그래서 성호는 한동안 낙원에서 겉돌았다.

‘은후 씨가 말해 주었던 마나라는 특별한 힘을 이용한 게 아니야.’

‘그저 순수한 소리로만 이룩한 조화, 아니, 소리가 아니라 노래, 노래가 아니지. 음률이야. 그러니까…….’

관심사나 주제가 처음부터 일관적으로 노래에 있었지만.

‘령아, 내가 기타 쳐 줄까?’

‘연후 씨 인생을 즐겨야지. 인생을 즐기려면 노래만 한 게 없다니까? 아, 이제는 귀생인가?’

성호는 낙원의 주민들과 어울리기를 참 좋아했다. 생전에 가질 수 없던 인연들과 함께하는 건 성호에게 음악적 영감을 끊임없이 가져다주었으니까.

하지만 <비와 사랑>에서 받은 충격은 한동안 성호를 미치게 하였다. 단순한 집념만으로 이룰 수 없는 어떠한 경지였기에. 그래서 다들 성호를 배려해 주었다. 온전히 음악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어, 밥이라도 가져다줘야 하지 않을까?’

‘아니, 그냥 저대로 내버려 두는 게 훨씬 나을 거야.’

‘그래도오. 은후가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령이가 가 볼래?’

‘응.’

이따금 수호령이 챙겨다 주는 밥.

‘괜찮아?’

‘음, 그러게요.’

그때마다 성호는 흐릿하게 웃었다. 오늘의 하늘처럼. 여전히 흐릿한 하늘이었다. 하지만 근래의 성호가 가졌던 심각함이 어느정도 사라진 날이었다.

“밥, 저도 먹어도 될까요?”

“오!”

수호령이 반색하며 눈빛을 반짝였다.

“이제 괜찮아?”

“뭐어.”

“내가 삼촌한테 얼른 받아 올게!”

“괜찮습니다.”

수호령이 여전히 걱정스레 바라봤다.

“정 그러면 같이 갈까요?”

“응!”

눈동자에 담긴 건 염려.

그 감정의 색은 꽤 짙었다.

‘이전에는 아니었지.’

처음에 수호령을 만났을 때.

‘나도.’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수호령도 마찬가지였다. 은후가 데려온 동류였기에 흥미가 있었으나 딱 거기까지였을 뿐.

‘아마 그 무렵에 내가 사라져도 그냥 그렇구나, 안됐다, 그렇게 한마디 말하고 잊지 않았을까.’

성호 또한 그러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요.”

“연후 씨.”

“이제는 좀 괜찮아진 것 같은데요.”

“뭐.”

“애도 아니고, 걱정 좀 그만 끼쳐요.”

“하하, 연후 씨가 그렇게 말하는 거예요?”

수호령의 손을 잡고 도깨비에게 가는 짧은 길. 찰나의 생각. 그사이 다가온 연후.

‘얘도.’

날 걱정했나.

“하.”

뭐어, 그래도 썩 나쁜 기분이, 아니, 조금은 마음이 근질거렸다.

“옴뇸뇸. 오! 이제야 사람다운 얼굴이야?”

식당에서 본연의 모습으로 뭔가 열심히 먹는 개구리가 성호에게 말을 걸었다.

“원래 사람…… 사람은 아니었는데.”

“귀신의 근본은 사람이지.”

“귀신이든 사람이든 오늘부터 제대로 먹기로 한 겨?”

“여보, 이따가 빙수나 만들어 먹을까요?”

“갑자기 웬 빙수?”

“왠지 모르게 생각나서요. 오늘 후식은 빙수로 해요.”

“그려, 임자가 먹고 싶다고 했으니 만들어 줘야제.”

느닷없는 구미호의 말.

“빙수!”

호들갑을 떠는 수호령.

“내가 예전에 만들어 둔 인절미라도 좀 가져올까? 빙수에 인절미만큼 어울리는 게 없는데.”

“개구리가 만든 거면 너무 오래되어서 상하지 않았을까?”

“에이, 내가 그것도 모를까. 아, 맞다. 팥도 만들어 둔 게 있는데, 남았던가? 그런데 도깨비가 팥을 먹어도 돼?”

“허흠, 빙수에 항상 팥이 올라가는 건 아니제. 그리고 도깨비가 팥을 먹지 말라는 법이 어딨으?”

“예로부터 팥은 도깨비 퇴치에 이용되었는데.”

“그래서 먹으면 따끔따끔하지만 말이여. 그만큼 별미가 없제. 크, 빙수에 술이라도 한잔해야겠구마.”

“과음은 안 돼요?”

언제나처럼 낙원에서 벌어지는 중구난방의 대화였다.

‘그나저나 그때 내 말을 기억해 줬나.’

구미호는 수호령과 남편인 도깨비, 은후를 제외하면 언제나 표정이 비슷했다. 하지만 표정만 그러할 뿐, 은근히 낙원의 주민을 챙겼다. 그건 함께하다 보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며칠 전이었더라. 구미호가 뭘 먹고 싶었냐고 물었고, 나는 빙수를 먹고 싶다고 했지.’

다시 주제는 귀신이 사람이냐로 돌아왔다.

“아무리 봐도 귀신은 사람이 아니제.”

“음, 인간은 아니어도 사람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거, 철학적인 답변인데.”

“철학적이라기보다 일전에 은후 씨가 말했거든요.”

“인간과 사람에도 차이점이 있나?”

“글쎄요. 저도 그것까진 잘. 여하튼 자신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건 결국…….”

그때.

“오래된 논쟁거리였죠.”

은후가 모습을 드러냈다.

“은후다! 뭐지?”

수호령이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언제 왔어? 왜 몰랐지.”

그야 모를 만했다.

자신이 없을 때 낙원의 상황은 어떠할까, 서로 잘 지내고 있을까. 특히 성호, 요새 상태가 좋지 않은데. 그래서 몰래 상황을 살피고자 스스로를 감추고 낙원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은후는 굳이 그런 뒷사정을 설명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육체를 예를 들었고, 누군가는 정신을 말했습니다. 또 누군가는 육체와 정신의 조화를 말했죠. 그 외 기상천외한 기준점도 참 많이들 말하더군요.”

현대의 기준은 잘 모르겠지만, 이세계에서는 그러했다.

여전히 신분 체계가 세계의 기준점으로서 작동하고 있었으며, 과학이 아닌 마법과 이능이 넘치는 세상이었다. 강해지고자 정령과 융합하는 마법사도, 오거의 힘줄을 이식하는 전사도 있었다.

“오답도 있었지만 정답도 꽤 많았습니다. 틀림이 아닌 다름으로서, 개중에 모두가 공감하는 정답이 있었죠.”

의지와 인식.

“애초에 다른 종이 인간이 되고자 한다면 모를까, 처음부터 사람이었던 존재가 여전히 자신을 인간으로 인식하고 그러고자 원한다면.”

그러면 인간이라고.

“세부적으로 설명하려면 며칠을 논해도 부족하겠지만 요점은 인식과 의지죠. 그러니 성호 씨가 자신을 인간으로 인식하고 그러하길 바란다면 인간입니다.”

“귀신은 정령이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그리고 정령은 인간이 아닐 텐데요. 아무리 제가 인간이었다지만 지금은, 어, 그러니까.”

성호가 언젠가 스치듯 들었던 말. 성호의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이런 문제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는데. 은후는 그런 성호에게 싱긋 웃으며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인간이란 카테고리에 정령이 포함될 수 없을까요?”

“네?”

“고민해 보세요.”

“어? 네?”

“그 고민이 성호 씨에게 도움이 될 겁니다.”

“어떤 도움요?”

“음악에요. 아마도 꽤 많이요.”

“…….”

다른 이의 말이었다면 코웃음을 치고 말았겠지만, 은후의 말이었다. 그래서 성호는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대충 진지한 대화가 끝났다는 걸 눈치챈 수호령이 외쳤다.

“밥! 우리, 밥 먹어야지! 은후도 얼른 앉아!”

“그래요, 우리 령이 말대로 다들 밥부터 먹죠. 골치 아픈 이야기도 대충은 끝난 것 같으니까요.”

수호령의 외침과 부드러운 구미호의 말에 예외는 성호뿐이었다. 은후의 질문에 다시 고민하려고 미간을 구기고 있었다. 은후가 픽 웃으며 성호의 이마에 딱밤을 한 대 가볍게 때렸다.

“윽.”

“다음에요.”

성호가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은후를 노려봤다.

음악, 음악에 대한 도움.

그게 어떤 도움이 될지는 몰라도, 그런 힌트를 방금 줬으면서도. 하지만 은후는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이것도 마찬가지예요.”

“뭐가요?”

“밥을 먹는 것도.”

“음악에 도움이 된다고요?”

“네. 사람도, 인간도 밥을 먹죠.”

“그거야 당연한, 대체 밥을 먹는 게 내 음악에 무슨 도움이…… 어?”

은후의 말에 뭔가를 느낀 성호의 표정이 굳었다.

“항상 음악만 바라보다간 오히려 음악에서 멀어지는 법이죠. 집착은 결핍으로 이어지니까요. 애초에 집착하지 않으면 결핍이 일어날 일도 없겠습니다만.”

그건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와 같은 논쟁일 뿐.

“일찍이 어떤 현자가 말했죠. 욕심은 채울 때가 아니라 비울 때 열린다고.”

에피쿠로스, 기원전 그리스 철학자가 남긴 명언.

은후에게 깨달음의 단초가 되었던 말. 그 말에 성호도 뭔가 느끼는 바가 있었다.

“때로는 반대로 채워야 할 때도 있겠습니다만. 그러니 배부터 채울까요?”

“그래! 요새 뭐 거의 안 먹었잖아!”

은후의 말에 여전히 눈치 보던 수호령이 성호의 손을 잡아당겨 자리에 앉혔다. 성호는 수호령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밥은 맛있었다.

후식으로 만들어 준 빙수는 더더욱.

‘그나저나 팥은 없네.’

도깨비가 분명히 아까 팥도 맛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한번 먹어 보고 싶었는데.

‘신기……한가.’

처음이라서.

식사하면서, 식사가 끝나고 후식으로 나온 뒤에도 계속 이어진 어떠한 빙수가 제일 맛있느냐는 논쟁. 언제부터 그런 장난스러운 말다툼이 이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팥이 진리지!”

“난 팥보다는 꿀하고 과일 들어간 게 더 맛있는 것 같은데.”

“어허, 어린애 입맛이군.”

“나는 어린애……가 아니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이는 꽤 많은걸!”

주축이 되어 싸우는, 아니, 노는 건 개구리와 수호령이었다.

‘참 쓸데없는 논쟁이야.’

하지만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성호도 은근슬쩍 그 논쟁에 참여했다. 도깨비가 계속 만들어 주는 다양한 종류의 빙수를 맛보면서.

“개인적으로는 미숫가루와 연유의 조합이 제일 나은 것 같은데요.”

“팥에 연유가 더 낫지 않은가?”

“흠.”

“꿀에 연유!”

어떠한 빙수가 제일이냐.

그 논쟁은 한참 이어졌다.

해가 질 때까지.

* * *

그날 저녁.

“그래서 은후 씨는 어떤 파예요?”

“그 논쟁 아직도 합니까.”

무대가 있다는 말에 성호는 눈빛을 반짝이며 은후를 따라나섰다.

“나름 중요한 문제가 아닐까요.”

“딱히 중요한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요.”

“중요한 문제 맞는 것 같은데.”

일전에 신세 졌던 카페 사장 김현석과의 약속 장소로 차를 몰며 은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쩌다가 빙수에 꽂힌 건지는 모르겠지만.

‘딱히 나쁜 일은 아니니.’

그래서 은후는 적당히 대꾸하며 운전에 집중했다. 그런 은후의 태도를 성호는 알면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 할 말을 열심히 했다.

‘뭔가 깨달은 건 아닌 것 같고.’

일단 고민을 뒤로 미루었나.

‘그것도 하나의 선택.’

은후는 성호의 선택이 꽤 좋다고 여겼다.

‘여긴가?’

전주 삼천동의 강변 공원 근처의 한 건물의 꼭대기라고 했다.

“오, 일찍 왔네?”

“그러게요. 그런데 담배 끊었던 거 아니었어요?”

“끊는 게 어디 있어. 참는 거지.”

“형수님이 뭐라고 안 해요?”

“집에서만 피우지 말라고 하더라. 그나저나 넌 담배 안 피우냐?”

“네.”

“재미없기는.”

은후가 어깨를 으쓱였다.

“들어가자.”

바라고 했던가.

되게 전형적인 느낌이었다. 어느 구시대 냉전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느낌의 바. 일부러 그런 느낌을 풍기기 위하여 인테리어에 신경 쓴 느낌이 팍팍 났다.

‘피아노도 있네요. 이따가 연주해 줄 수 있을까요?’

성호의 질문에 은후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이 된다면.’

이런 곳에서 기타 연주라.

‘관객이 없어서 좀 그렇지만 진짜 마음에 드네요. 당장에라도 기타 치고 싶은데.’

‘조금만 기다려요.’

오랜만에 진짜 육체로 기타를 칠 생각에 신난 성호를 달래며 주위를 살피던 은후가 눈을 살짝 떴다.

‘그냥 바가 아닌가?’

구름처럼 맴도는 연기의 향연.

담배와는 조금 다른 냄새.

‘시가?’

그냥 바가 아닌 시가 바였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