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7화
한 마리라고는 하지만 말을 옮기는 건 돈과 수고가 적잖이 들어가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이원석이 은후에게 그러한 호의를 베푼 건 크게 두 가지 이유였다.
하나는 은후에게 말했던 대로 자신도 그러길 원했던 것. 이원석은 스타더스트의 팬이었고, 그렇기에 스타더스트가 바라는 대로 달리고 또 달리길 바랐다.
‘스타더스트는 달리다가 죽고 싶어 해요.’
일전에 은후가 했던 말.
가볍게 던진 말이었으나 승마장에서 근무하는 이들에게는 그 말이 꽤 크게 와 닿았다. 그래서 자연스레 소문이 퍼졌다. 스타더스트는 그러고 싶을 거라는 데 다들 동의한 것. 지금까지 의욕이 없었던 건 제대로 된 기수가, 즉슨 자신의 등 위에 태울 만한 사람이 없어서 그랬을 거라는 건 이미 모두 알고 있었다.
이원석은 그걸 일찍이 알고 있었다. 다만 이제는 안심할 수 있었으니. 왜냐하면 은후라는 걸출한 기수가 나타났으니까. 하물며 은후는 확실히 여타 여느 다른 기수보다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적어도 말의 심리를 파악하고 교감을 나누는 분야에 있어서만큼은 말이다.
‘이 말은 너무 마른 건초는 싫다고 하네요.’
‘목욕 좀 하고 싶은 것 같던데.’
마구간에 드나들며 스타더스트가 아닌 말의 상태를 파악해 주었고, 긴가민가하면서도 혹시나 싶어 은후의 말에 귀를 기울인 직원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은후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이원석은 그 말을 전해 듣고 자신의 짐작에 확신을 더했다.
그리고.
‘게다가 환상의 술, 그 술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게 분명하다는 말이지.’
골프 친구인 이창석.
원래도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꽤 유명한 이창석이었다. 그런 이창석은 요새 다른 이유로 더 이름을 알리고 있었다.
바로 환상의 술.
최근 그 술을 이원석도 좀 얻어 보고자 이창석에게 적잖은 알랑방귀를 뀌었다. 그리고 실제로 얻어먹은 결과 장난 아니었고, 그 술자리에서 은후에 관련된 이야기를 했다.
스타더스트에게 새로운 주인이 나타났다면서, 사회적인 합의와 법을 신경 쓰지 않는 말에게 있어서 진정한 주인은 은후뿐이라면서, 사진을 보여 주며 자랑했다.
‘우리 승마장 홍보물 포스터 좀 찍으려고 하는데 잘 안 넘어온단 말이지. 타고 다니는 차를 보면 돈이 부족한 친구는 아닌 것 같고.’
‘돈? 흐, 돈이 부족할 리가 있나. 얼마나 많이 버는 친군데.’
‘저 친구를 아나?’
‘알다마다. 이 술도, 큼. 아니야. 술이나 더 마시세.’
이창석의 말실수로 이원석은 은후의 정보를 얻었다. 그래서 친해지고 싶었다. 딱히 금전적인 이득을 바라는 건 아니었다.
술, 애주가로서 환상의 술을 어떻게든.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어지던 이원석의 상념이 은후의 말에 끊겼다.
“아, 그래요. 동행인 이야기를 하고 있었죠. 얼마든지 함께하셔도 됩니다.”
“그리고 좌석은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제가 구하겠습니다.”
“그래요?”
“퍼스트는 아닐 것 같아서요.”
“아닙니다. 퍼스트 맞아요.”
“네?”
투자할 때는 통 크게.
“동행인이 한 분이라고 하셨죠? 그에 맞춰서 퍼스트 두 자리 확실하게 준비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언제 한번 제가 술을 대접하죠. 안 그래도 이번에 귀한 술을 얻었는데, 혹시 환상의 술이라고 들어 보셨나요?”
“네, 들어 봤죠.”
이원석이 은후의 표정을 자세히 살폈다. 하지만 은후의 표정은 딱히 변화가 없었다.
“그 술이 무슨 술이냐면 말이죠. 요새 애주가들 사이에서…….”
금액을 떠나 물량이 없어서 못 구한다는 점부터, 부자들 사이에서 한창 난리가 났다는 부분까지.
“……L그룹 회장도 극찬했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천금을 줘도 아깝지 않은 술이라며 말이죠. 저도 우연히 기회가 닿아서 맛을 봐 봤는데. 허, 거참.”
어느 순간부터 은후의 정보를 캐내려는 것과 달리 환상의 술에 관한 칭찬을 늘어놓는 이원석이었다. 은후는 피식 웃으면서 적절하게 이원석의 말을 받아 주었다. 자신이 만든 술이 아니던가. 그러니 그런 칭찬은 꽤나 달가웠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맛이 너무 술답다는 겁니다. 물론 이건 단점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장점이라면 장점이죠. 향도 되게 다채롭고요. 다만 개인적인 아쉬움은 달달함이 부족하더란 말이죠. 개인적으로 단 술이 취향이라서요. 물론 취향을 뛰어넘을 정도로 훌륭…….”
그나저나 이 사람.
‘말이 너무 많아.’
그나저나 달달함이라.
‘후속작은 단맛으로 잡아 볼까.’
효과는 뭐로 할까.
숙취 해소는 이미 있으니까.
‘고민이네.’
이세계에서 가장 귀족들의 선호도가 높았던 건 건강과 정력에 관련된 것이었지만.
‘정력.’
음.
‘좀 그런가.’
돈을 벌고자 하면 그것만 한 게 또 없기는 하지만.
‘아니면 부가 효과가 아닌 맛의 본질에 집중할까.’
그것도 아니라면 잠깐 취했다가 바로 깰 수 있어도 괜찮을 것 같고.
“……그래서 그러는데, 혹여 이번 몽골에서 홍보용 포스터 하나 찍을 생각 없으십니까? 계약 조건은 정말로 섭섭지 않게 준비하겠습니다. 기왕이면 그때 같이 오신 여자 친구분하고 찍어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생각은 해 보겠습니다.”
“부디 긍정적으로 고려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 *
며칠 후, 은후는 집을 샀다.
일전의 노부인이 머무는 집의 뒤쪽 골목으로 늘어서 있는 주택가의 거리에 있는 곳이었다. 2층으로 된 전형적인 주택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하하, 고생은요.”
은후의 덕담에 공인중개사 박학서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본디 박학서의 전문 분야는 땅. 그래서 어지간하면 집과 관련된 중개는 거의 맡지 않는다. 하지만 은후의 부탁에 망설임 없이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무조건 잡아야 하는 인맥이라는 것도 있었으나, 은후는 정말로 우량 손님이었다. 어떻게든 한 푼이라도 가격을 깎으려고 이런저런 트집을 잡지 않았으니까.
‘이런 사람이 더 무섭기는 한데.’
평소에 화를 내지 않던 사람이 폭발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무서운 것처럼. 비슷한 맥락으로 한 번 실망하면 다시 의뢰하지 않는 스타일이지 않을까.
“이번 주 안에 전 주인이 집을 비우면 제가 청소까지 싹 다 끝내 놓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마치 자신이 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으나, 정확히는 청소 업체에 의뢰하는 것이겠지. 그 부분을 알면서도 은후는 그냥 그러려니 했다. 어쨌건 자신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것이니까.
단순한 호의. 조금이라도 친해지고 싶어서, 그 외의 다른 목적은 없는 것 같으니까. 만약 이세계였다면 거절했거나 좀 더 면밀하게 살폈겠지만.
‘여기에서는 굳이.’
은후는 박학서와 헤어진 후 학교로 향했다. 왠지 모르게 오랜만에 들른 것 같은 느낌. 사실 그건 느낌이 아니라 실제로도 그러했다. 요새 이래저래 바쁘다는 핑계로 출석도 제대로 하지 않았으니까.
물론 그 과정에서 미리 교수에게 말하고 허락은 받아 두었다. 무단으로 해도 상관은 없었겠으나 그래도 예의상 말은 해 두는 편이 훨씬 좋았을 테니까.
“선배님?”
“오랜만이네.”
“아, 네. 근데 무슨 일 있으셨어요? 요새 계속 수업 시간에 안 보이시던데요.”
“개인적인 일이 조금.”
은후는 일전 조별 과제를 같이 했던 박훈과 간단하게 잡담을 나누었다. 그사이 박훈의 여자 친구 이채린과 박나리가 근처로 다가와 자리를 잡았다.
“바쁘셨어요?”
“조금요.”
으레 나눌 법한 인사를 나누고 몇 시간 뒤면 잊어버릴 잡담을 했다.
“이 옷 어때요? 이번에 새로 론칭한 브랜드인데 디자인이 무척 마음에 들어서 큰맘 먹고 샀거든요.”
“잘 어울리네요.”
박나리는 은후에게 이런저런 말을 걸었으나 이전과 다르게 감정을 확실히 정리했다. 딱히 미련이란 감정도 보이지 않았기에 은후는 편하게 박나리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런데 저 옷.’
어디였더라.
분명히 본 것 같은.
“솔직히 말해서 저도 잘 모르는 브랜드였거든요.”
아, 모델.
그래, 몇 달 전에 이하연과 진행한 모델 촬영. 그 촬영에서 이하연이 입었던 옷 중 하나였다.
“근데 포스터에 선배님 얼굴이 보이길래요, 깜짝 놀랐다니까요?”
“여름에 우연히 기회가 닿아서요.”
“그래서 검색 좀 해 보다가 옷도 예쁘길래 하나 샀어요. 마침 겨울이라서 패딩이 하나 필요하기도 했거든요.”
그런 박나리의 말에 박훈이 잠깐 놀랐다가 왠지 모르게 납득할 수 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선배, 모델도 했어요?”
“뭐.”
그런 일도 있었다.
‘그나저나 모델이라.’
전주 승마장.
이하연.
‘보고 싶네.’
안 그래도 이야기할 게 있으니까, 홍보 모델에 관련해서. 서울로 올라갈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은후는 피식 웃었다. 굳이 직접 만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이야기인데.
‘내가 핑계를 찾고 있구나.’
고작 며칠이었다.
문자는 개인적으로 계속 주고받고 있고, 일방향이기는 하지만 방송으로 얼굴은 보고 있는데. 역시나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는 것과는 달랐다.
은후는 평소와 다르게 교수의 강의를 한 귀로 흘리며 창 너머에 시선을 던졌다. 그렇게 강의의 중반, 은후가 이하연에게 문자를 보냈다. 언제 시간이 괜찮냐고.
- 오늘은 조금 바쁘고 내일은 평소랑 다름 없으니까. 나름대로 한가……한가. 잘 모르겠다. 그런데 무슨 일?
- 데이트 신청?
- 마지막에 물음표는 뭐야ㅋㅋ
- 뭐어, 그냥 보고 싶어서.
은후의 솔직함이 담긴 문자에 잠깐의 텀.
- 그렇게 말하니까 나도 보고 싶다.
- 보면 되지.
- 오늘은 진짜 바쁘단 말이야. 친구들이랑 선약이 있어 가지고. 취소할까?
- 굳이 그러지는 말고. 내일 봐.
- 으, 알았어.
- 그나저나 오늘 일찍 일어났다?
- 그게 말이지…….
그렇게 은후는 한동안 문자를 이하연과 계속 나누었다. 강의가 끝날 때까지. 물론 아예 문자를 주고 받는 데만 신경을 쓴 건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사고를 두 개로 나누어 하나는 강의에 집중한 것. 아까까지는 별로 듣고 싶지는 않았으나 이하연과 문자를 주고 받으며 의욕이 생겼다.
‘불성실하고 강의가 형편없다면 또 모르겠는데.’
나름대로 성실하고 학생에게 짖궂게 구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그게 다 학생들을 위한 애정의 발로였으니. 적절히 선을 잘 지키는 교수이기도 했고. 그래서 호불호가 갈리기는 했으나 대체로 호였으며 학생들에게 인기도 있었다.
‘금방이네.’
수업이 끝나고.
- 그럼 내일 봐. 방송 준비 잘하고.
- 응, 오늘도 방송 봐 줄 거지?
- 글쎄. 아마도?
- 안 보면 좀 서운할지도. 내일 오늘 방송 뭐 봤는지 물어본다? 뭐어, 바쁘면 어쩔 수 없구.
어떻게 할까.
- 야, 언제 보냐?
그때 다른 사람으로부터 마침 문자가 도착했다.
김현석이었다.
일전 은후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신세를 졌던, 그리고 현재를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사장. 은후는 문자를 작성하려다가 그냥 전화를 걸었다.
- 뭐야?
“오늘 볼까요?”
- 얼래? 안 바뻐?
“뭐, 그렇죠.”
- 잘됐네. 친구가 오늘 바 하나 차렸다더라. 공짜 술 마시러 가자.
“바요?”
- 어. 하여간 자세한 이야기는 이따가 만나서 하게. 그리고 너 기타 좀 칠 줄 안다며? 졸라 잘 친다고 들었는데.
은후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졸라가 뭐예요, 졸라가. 나이가 몇인데.”
- 나, 신세대거든?
“신세대는 무슨. 그나저나 그 이야기는 어디서 들으셨어요?”
- 저번에 너 후배들이랑 왔을 때. 여하튼 오픈 기념으로 기타 한 곡? 알바비는 내 넉넉하게 쳐 달라고 할게.
“알바비는 됐어요. 저, 돈 많이 벌거든요?”
- 하여간 얘가 돈 무서운 줄 몰라요.
시답지 않은 가벼운 이야기. 은후는 피식 웃으며 술이나 잘 만들어 달라고 말하며 통화를 끊었다.
‘안 그래도 성호 씨를 위해서 무대가 필요했는데.’
마침 잘되었다.
최근 들어 <비와 사랑> 때문에 정신이 없었는데, 드디어 제정신을 차리고 무대를 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