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의 인생 룰루랄라-102화 (102/170)

제102화

카페 사장이 당황하며 말을 이었다.

“‘환상의 월광’ 편곡 버전이 아니라, 그러니까 ‘환상의 월광’ 말입니다.”

“그게 뭔데요?”

“요새 클래식에 관심을 두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월광〉이죠. 비유로 사용되는 말이 아니라 실체가 있는. 어, 그러니까.”

횡설수설하는 캠핑장 사장의 모습에 이하연이 부가 설명을 덧붙였다.

“저번에 덕진 공원에서 있잖아, 네가 기타로 연주한 〈월광〉.”

“그게 왜?”

“어떤 평론가가 ‘환상의 월광’이라면서 극찬했거든. 외국의 무슨 유명한 사람이라고 하던데.”

캠핑장 사장이 헛기침하면서 이하연의 말을 받았다.

“진 에드워즈입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음악의 헛된 망상을 현실로 불러왔다고 평했죠. 저도 진 에드워즈의 평론을 보고 찾아봤거든요. 브이튜브라는 사이트도 덕분에 알게 되었죠.”

이제야 좀 제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그 편곡자 분이시라고요?”

“네.”

“분명히 취미로 음악을 하신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요.”

“네.”

캠핑장 주인은 뭔가 말하려고 입을 오물거리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리고 은후에게 다가와 말했다.

“저어.”

“네, 편하게 말씀하세요.”

“사인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 네.”

사인이라.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사인을 받아 갈 정도로 인지도가 있나.’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은후의 생각과 다르게 세상은 은후를, 정확히 〈월광〉의 편곡자는 인기가 있었다. 어디까지나 클래식에 관심을 두고 좋아하는 이들에게 한정이기는 하지만. 그건 원곡이 베토벤이어서 그렇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 세계 음악사를 통틀어 손에 꼽히는 위대한 인물. 그래서 붙은 명칭이 악성(樂聖).

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베토벤을 칭송하고 현재까지도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그의 음악을 불멸이라 말하기도 한다. 개중에서 〈월광〉은 베토벤을 대표하는 곡 중 하나였다.

그런 곡을 편곡한다는 건 매우 도전적인 일이었다. 긴 세월 동안 〈월광〉의 편곡을 제대로 했다는 이가 드물었으며 현대에선 거의 시도되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월광〉이 누구도 부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뛰어나게 편곡되어 탄생되었으니. 그래서 ‘환상의 월광’이었다. 당연히 입소문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만큼 은후의 정체를 궁금해 하는 사람도 무척 많은 상태였다.

* * *

하지만 그런 유명세와 사람들의 관심에 은후는 별 관심이 없었다. 신경이 조금 쓰이기는 하지만 그건 약간의 미안함. 의도한 건 아니지만 원래의 주인인 베라메라에게.

‘갚아야지.’

뭐, 직접 런던까지 가서 찾아 보고 탐정에게 시세보다 높은 돈을 주면서 의뢰까지 하였으나 곧 인연이 닿지 않을까 싶었다. 그것보다 지금 중요한 건 이하연과 함께하는 시간이었다.

“조금 추운 것 같은데.”

“침대에 눕는 건? 전기장판도 있는데.”

“그럴까?”

“혹시.”

은후가 이하연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으?”

“열은 없는 것 같으니 감기는 아니네.”

“그, 그렇지?”

“응.”

“침대는 이따가 씻고 누울래.”

“방금까지는 누우려는 생각 만만이었던 거 아니야?”

“그건 그치만.”

마음이 바뀌었다.

이하연이 소파로 가자 은후가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담요를 가져와 이하연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자.”

“응.”

어느새 찾아온 침묵.

분명히 조금 전까지 이런저런 대화를 계속했던 것 같은데. 평소와 다르게 편안하게만 느껴지던 고요함이 아니었다. 뭔가 근질거리는 느낌이랄까.

“이리로.”

“응?”

“같이.”

“…….”

이하연이 담요 한쪽을 들었다. 은후가 조심스럽게 다가가자 이하연이 은후에게 몸을 붙이며 담요를 함께 덮었다.

“해 보고 싶었거든.”

“담요 같이 두르는 거 말이지.”

“응. 언제였더라, 작년 여름이었나 가을이었나. 하여간 작년에 영화를 하나 봤거든. 제목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다만 기억에 남은 장면 하나 있었다.

“남자 주인공이랑 여자 주인공이 동거했거든. 그때 비가 오는 날에 이러고 있더라고.”

그게 뭔가, 왠지 모르게 부러워서 선명하게 기억에 남았다.

“그래서 언젠가 꼭 해 봐야지, 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빨리 할 수 있게 될 줄은 몰랐다.

“이런 건 얼마든지 말해.”

“응.”

이하연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은후에게 고개를 기댔다. 그리고 눈을 감으며 바깥에서 여전히 울려 퍼지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지 않으면 은후의 숨소리가, 살 내음이 가슴을 너무 뛰게 만들어서, 심장이 터지지 않으려면. 그러니까 눈을 감고. 빗소리에 귀를 기울여서 마음을 편안하게.

‘편안하게.’

잘 안 되네.

‘잘 안 되면 어때.’

그래도 편하긴 한데.

이하연의 속마음이 횡설수설했다.

‘졸려.’

오늘을 너무 기대해서.

‘자면 안 되는데.’

제대로 잠들지 못했던 며칠이 이하연이 수마로 이끌었다.

빗소리가 내리는 어느 가을이었다.

* * *

끔뻑 졸다가 깬 이하연이 화들짝 놀랐다.

‘어?’

지금 여기가 어디지?

이하연이 슬그머니 눈을 떴다.

‘아.’

여기 캠핑장이지.

빗소리도 계속 들리고 있었고.

‘해는 떨어졌네.’

다만 어두컴컴했다.

‘은후는.’

의자에서 뭔가 읽고 있는 것 같은데.

“뭐해?”

“책 읽고 있었어.”

은후가 책 표지를 보여 줬다.

<현대의 집>이라는 심플한 제목이었다.

“아, 집 짓는다고 했었지?”

“응. 조금 고민이네. 어떤 느낌으로 지을까.”

이하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 좀 씻을게.”

“밥 먹고 씻는 게 낫지 않아? 고기 먹을 건데.”

“으으, 그럴까. 세수는 하고 올래. 잠이 덜 깨서.”

“이따가 잘 수 있겠어?”

“안 자면 되지.”

“그거야 상관은 없지만. 하기야 이 시간에는 원래 방송하고 있었겠구나.”

이하연이 세수를 하러 간 사이, 은후는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 아까 사 왔던 삼겹살과 항정살. 비가 계속해서 내리지 않았다면 바깥에서 먹었겠지만.

“뭔가 좀 아쉽다.”

어느새 세수를 마치고 온 이하연이 중얼거렸다.

“뭐가?”

“캠핑에서 야외 식사는 진리잖아.”

“그런가. 그래도 빗소리를 들으면서 하는 식사도 나쁘지 않을걸.”

“그것도 그래.”

이하연이 조그맣게 웃었다.

사실은.

‘장소는 상관없는걸.’

은후와 함께라면야.

신나게 떠들 때도, 이렇게 딱히 말없이 식사하는 것도, 전부 좋았다.

기왕이면 장소도 좋으면 더 좋기야 하겠지만 딱히.

“배불러.”

“벌써?”

“응.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가.”

“이따가 먹을걸 그랬나.”

“에이, 나 기다리느라 배고팠을 텐데.”

“그거야 괜찮은데.”

“내가 안 괜찮은걸.”

이하연은 은후에게 먼저 씻고 오라며 등을 떠밀었다.

“뒷정리는 내가 할게.”

고기를 굽는 것도, 아까 요리한 것도.

‘라면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요리는 요리지. 그 정도 맛이면.’

전부 은후가 해 준 것이었으니. 뒷정리는 자신이 하는 게 맞는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직접 요리라도 해 주고 싶었으나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이하연은 요리치였다. 요리는 일종의 과학이고 레시피에 맞추어 만들면 된다고는 하지만, 그게 영 잘되지 않았다. 그래도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괜찮은 요리를 할 수 있게 될 테니까.

‘그때까지 힘내야지.’

은후는 그런 이하연의 배려를 거절하지 않고 씻었다. 그리고 은후가 씻고 나온 사이 이하연은 뒷정리를 마쳤다.

“나도 씻고 올게.”

잠에 다시 들 것 같지는 않지만 일단 잠옷.

그리고 혹시 몰라서 신경 써서 준비해 온 속옷.

‘으흠.’

남녀 둘이서 떠나는 여행.

애초에 제안하면서 이하연은 조금 기대는 했다.

불안과 함께.

하지만 기대감이 더 컸다.

반면에 아무 일이 없을 것 같기도 했다. 먼저 유혹하지 않은 이상 은후가 자신에게 손을 뻗는 일이 이하연은 잘 상상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먼저 달라붙기엔 아직은 부끄러워서.

‘방음은 잘 안…… 되겠지.’

아니.

‘으.’

모르겠다.

일단 이하연은 어지러이 얽히는 자신의 마음을 외면하며 평소보다 긴 시간 동안 씻었다. 머리를 감고 말리는 게 꽤 귀찮을 것 같지만 방금 고기를 먹어서 냄새가 뱄을 터. 그걸 감안해서 머리도 감았다. 씻고 나온 이하연에게 은후가 물었다.

“머리 말려 줄까?”

“응?”

“저번에 그런 로망도 있었다고 했잖아.”

“으응. 그랬지?”

하지만 어디까지나 로망은 로망.

미용사처럼 전문적으로 일을 하지 않는 이상 누군가의 머리를 말려 준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하물며 미용사들도 단골이 아니라면 손님의 입장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경우가 많았고.

“부탁해도 될까?”

“그럼.”

하지만 은후의 손길은 꽤 능숙했다.

적어도 이하연은 불편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다 됐다.”

“땡큐.”

“뭐 할 거야? 벌써 잘 것 같진 않고.”

“그러게.”

뭘 할까.

‘술.’

술이라도 마신다면.

술의 힘을 빌려서 유혹이라도 할까 싶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처음은 가능하다면 멀쩡한 정신으로 하고 싶었다. 편집이라도 할까 싶었지만 여기까지 와서 일하고 싶진 않았고.

“영화나 볼까?”

* * *

은후와 이하연은 밤을 새워 영화를 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짧게 잠을 잔 이후 용산으로 돌아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음에 이하연은 괜스레 아쉬움을 느꼈다.

‘천천히.’

영화를 보면서 꾸물꾸물 은근슬쩍 이하연이 은후에게 들러붙었을 때. 영화의 한 장면에서 키스 이후 제법 적나라한 신이 이어졌을 때 은후가 그렇게 말했다.

‘키스도?’

은후가 피식 웃으며 이하연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헤헤.’

이하연이 그때를 떠올리며 실없이 웃었다.

그날 저녁, 이하연의 어머니가 딸에게 물었다.

“잘 다녀왔어?”

“응.”

“피임은 잘했고?”

“어?”

이하연이 순간 말을 잃었다.

“다 큰 애가 뭐 그리 놀라.”

“아, 아무 일 없었는데.”

“남녀가 단둘이 캠핑장에 가서…… 아, 방음이 잘 안 되어서 안 했나?”

“엄마!”

“얘는 뭘 그렇게 소리 질러.”

“아니, 그래도.”

이하연의 어머니가 혀를 차면서 말했다.

“하여튼 잘해.”

“으으, 알았어.”

“이거, 진짜로 진지한 이야기니까.”

“응.”

이하연의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뒤에서 듣고 있던 이하연의 아버지가 표정을 구기며 물었다.

“캠핑에 같이 간다는 친구가 남자였어?”

“아빠?”

“그래.”

“어어, 뭐어.”

“씻고 왔으면 얼른 자리에 앉아요. 하연이도 다 컸으니 알아서 잘하겠죠.”

“아니, 그래도.”

“그래도는 무슨. 그러면 하연이 평생 혼자 살게 둘 셈이에요?”

“그건 아닌데.”

* * *

며칠 후, 이하연이 캠핑에서 찍었던 영상을 편집해서 하나하나 올리기 시작했다. 개중에서 제일 신경 쓴 영상이 있다면 은후가 피아노 연주하는 영상이었다.

‘반응이 어떠려나.’

다행히 피아노 영상 이전에 관한 내용에 있어서 사람들의 반응은 꽤 호의적이었다. 두 사람의 연애담이 사람들에게 환상을 심어 주고 대리만족의 요소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슬슬 편집자를 구해야 하려나.’

혼자 방송도 하고 편집도 하려니 꽤 힘이 들었다. 프로들에 비해서 확실히 홀로 공부해 가며 편집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고 말이다.

‘하다못해 이번 피아노 영상은.’

크게 편집할 게 없어 보이기는 하는데.

‘어디까지나 그건 내 기준이려나.’

이하연은 고민고민하면서 몇 번을 체크한 후에야 은후의 피아노 영상을 업로드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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