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1화
피아노는 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업라이트였다. 연주회에서나 볼 수 있는 그랜드 피아노와는 다르게 소리도 작고 음의 강약 조절 또한 다양하게 하지 못했다.
또한 현이 그랜드 피아노와는 다르게 가로가 아닌 세로였다. 기술의 현격한 발전은 그 차이를 좁혔고, 피아노를 업으로 삼지 않는 이상 크게 거슬릴 것 없겠으나.
‘못마땅해 하는군.’
악보에 서린 사념은 차이를 느꼈다.
육체가 없고 현실에 물리력을 행사할 수 없었음에도, 아직 은후가 사념을 받아들이지 않은 상태였음에도. 하지만 기뻐했다. 피아노를 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를.’
은후에게 뚜렷한 의사를 표했다.
오롯하게 피아노만을 바라본다.
성호는 음악에 미쳤다.
고통 속에서도 음악만을 바라봤다.
주는 기타.
전주 승마장의 스타더스트는 오롯하게 달리고자 했다.
제 죽음을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런 집념을 연상케 하는 뚜렷한 욕망이었다.
‘조금 잘못 판단했나.’
사념의 주인인 헨리 엘가.
‘얼마나 사랑했을까.’
바다표범인 아내 셀리를.
마나를 인식할 수도 없는 이였을 터인데, 이런 집념을 고작 종이에 남겼다. 자신의 욕망을 죽을 때까지 누를 수 있는 사랑이라.
‘언제?’
은후게 쓰게 웃으며 자신의 육체를 내주었다. 순수한 욕망이기에 그걸 들어준다고 다른 부작용을 염려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집념과 욕망만 뚜렷하게 남은 경우는 드물었다.
‘정령.’
직접 만들어 낼 수도 있겠는데.
은후가 마나를 일으켰다.
‘곧.’
은후의 손가락이 피아노의 건반을 본격적으로 노닐기 시작했다.
헨리 엘가가 남긴 애틋한 사랑을 담은 곡.
비와 사랑.
오늘과 같은 날씨에 딱 어울리는 제목이었다.
* * *
이하연이나 리셉션 카페를 보던 캠핑장 사장이나 은후의 피아노 솜씨를 그리 기대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일단 이하연의 경우는 은후의 기타 실력을 알았다. 음악에 조예가 그리 깊지는 않았으나 그저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울렸다. 거기에 더불어 사람들의 평가도 알았다.
- 제발! 다른 곡 녹화 한 건 없어?!
∟ㅠㅠㅠㅠㅠㅠㅠ 아니, 대체 누군지라도 좀 알려 주면 안 되나?
- 이거 제대로 연주하려면 얼마나 걸림? 곡에 반해서 입문하려고 하는데.
∟몇 년은 투자해야 할걸ㅋㅋㅋㅋㅋ
∟몇 년?! 코드는 그렇게까지 안 어렵다던데.
∟누가 그럼?
∟안 어려운 거 맞음. 제대로 연주하는 게 어려운 거지.
∟그게 말이냐 방구냐.
아직도 매일같이 은후의 연주 영상에는 댓글이 갱신되고, 그걸 보는 건 이하연의 일과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하연은 은후에게 직접 들었다. 어디까지나 기타는 취미로 했다고.
아마 제법 많은 시간을 투자했을 터였다. 하물며 은후는 군대에 가기 이전까지 자신과 게임을 열심히 같이 했다. 그런 은후가 피아노까지 잘 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웠다. 물론 실력이 없진 않겠지. 하나 기타에 비견될 만큼 피아노를 연주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
‘그래도 멋있다.’
아니지.
‘못 친다는 건 너무 섣부른 추측이려나.’
한두 곡 정도 열심히 연습하면 그런 곡에 한정하여 잘 칠 수도 있으니까.
‘음음.’
은후라면 피아노도 잘 칠 거야.
이하연의 감정이 논리를 뛰어넘었다.
한마디로 콩깍지가 씐 셈이다.
그런 이하연의 추측과 별개로 캠핑 사장은 은후의 손가락을 알아봤다. 피아니스트의 손이 절대로 아니었다.
하지만 은후의 피아노 실력이 그런 두 사람의 기대를, 정확히는 캠핑 사장 한 사람의 기대를 정확하게 배신했다. 정확히는 은후의 실력이 아니라 악보에 서린 헨리 엘가의 집념으로 비롯된 것이지만.
비와 사랑.
헨리 엘가가 그런 흔하고 진부한 제목을 지은 이유가 있었다. 애초에 오롯하게 피아노의 연주만 고려된 곡이 아니었다.
배경음을 전제했다.
빗소리.
그러니 비가 내리는 날에만.
혹은 빗소리를 인위적으로 재생해야만 제대로 칠 수 있는 곡이었다. 사실상 자연으로부터 비롯된 무작위적인 소리를 오롯하게 과학으로 담을 수 없으니 날씨에 구애받는 곡이었다.
이따금 빗소리와 춤을 추고, 서로 언성을 높이고, 또 서로 미소를 지으며, 마치 대화를 나누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건 빗소리가 셀리를, 피아노가 헨리 엘가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사랑.
그래, 사랑이었다, 비와 피아노가 나누는.
* * *
‘네 이름은 노노.’
‘노노.’
충분한, 아니, 지독하리만큼의 집념에 은후가 이름을 부여했다.
‘내 이름은 이은후.’
‘이은후.’
‘이름을 받겠니?’
‘받으면?’
‘가끔 피아노를 칠 수 있겠지. 오늘처럼.’
‘받지 않으면?’
‘서너 번 정도는 더. 이후에는 사라지겠지.’
집념은 고민하지 않았다.
‘받을게.’
빗소리 아래 피아노의 정령이 탄생했다.
은후의 마나를 머금고.
은후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 이론이 맞았구나.’
이세계에서 인간의 사념이나 집념을 가지고 인위적으로 정령을 탄생시킬 수 있느냐에 대해 마법사들 사이에 많은 논쟁이 있었다. 이론은 완벽에 가까웠으나 공개적으로 실증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전설이나 떠도는 낭설에는 있었으나 진실로 목격한 이는 없었다. 아마 있어도 숨겼겠지. 그래서 어느 순간 이론은,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은 사라졌다.
‘애초에 재료를 구할 수 없으니까.’
은후는 노노를 만들면서 알아차렸다.
악보에 서린 건 헨리 엘가만이 아니었다. 아내인 셀리의 그리움 또한 담겨 있었다. 자신 때문에 피아노를, 음악을 홀로 간직하고 죽음을 맞이한 남편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이.
‘구체적인 과정은 알 수 없지만.’
은후가 노노를 바라봤다.
노노는 하품을 크게 하며 은후에게 다가왔다. 피아노에 대한 집념보다는 쉬고 싶은 모양이었다. 생명을 갖게 되었고, 방금 기깔나게 피아노도 한 번 쳤으니까 쉬고 싶은 모양이었다.
조금 전과 다르게 한숨 자고 나서도 피아노야 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어디까지나 은후가 살아 있는 동안의 이야기겠지만. 그리고 은후는 노노를 바라보며 한 가지 고민을 하게 되었다.
‘사랑.’
이하연.
좋아하게 되고, 또 언젠가 사랑하게 되고.
그렇다면.
‘수명.’
은후의 수명은 길 예정이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해결해야겠는데.’
적어도 살아가는 동안 이하연과 함께하고 싶었다. 수명에 의한 비극을 바라보기는 싫었다. 당장 급하지는 않지만 언젠가 해결해야 할 일이 아닐까.
‘욕심이기는 한데.’
만약 거부한다면.
‘그건 어쩔 수 없겠지.’
설득하려고 노력하는 수밖에.
누구나 긴 수명을 바라지 않는다는 걸 은후는 잘 알고 있었다. 이하연이 그럴 수도 있지 않은가.
“와!”
그때 은후의 상념을 깨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매우 낯익은.
“브라보! 어, 이렇게 외치는 거 맞나?”
그리고 부드럽고 또 듣기 좋은, 사랑스러운 목소리.
은후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뒤늦게 캠핑장의 사장도 박수를 열심히 쳤다. 섣불리 연주자의 실력을 재단한 자신을 자책하면서.
‘오랫동안 쉬다가 재활하는 피아니스트인가.’
그런 착각과 함께.
‘서비스라도 준비해야겠네.’
오늘 귀가 호강했다.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아내가 이 자리에 없다는 것.
‘그런데 무슨 곡이지?’
클래식에 꽤 조예가 있다고 자부했는데 처음 듣는 곡이었다. 그래서 사장은 잠깐 고민하다가 케이크를 하나 통째로 들고 은후와 이하연이 앉아 있는 테이블을 찾았다.
“서비스입니다. 연주 진짜 좋더라고요.”
“감사합니다.”
은후가 일어나서 케이크를 받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피아노 전공이셨나 보죠? 오랫동안 쉬시다가 재활하시는 것 같던데요.”
“아니요, 취미로 좀.”
“취, 취미요?.”
“네.”
카페 사장이 당황했다.
“큼.”
취미라.
‘아니.’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역시 재능은.’
다만 안타까웠다.
이런 재능을 가진 사람이 피아노를 전공하지 않는다니.
하늘이 내려 준 재능인데.
‘내가 이런 재능이 있었다면.’
카페 사장은 은연중에 솟구친 열등감을 웃으면서 날려 보냈다. 이미 겪어 보지 않았던가.
그놈의 재능.
한때 피아노를 전공했고, 치는 건 이제는 그저 취미로만 남겼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고민과 고통이 함께했다.
부업으로 음악 평론을 하고 있는 김문석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추해지지 말자.’
김문석이 물었다.
“저어, 그런데 곡 이름 좀 알 수 있을까요? 제가 클래식은 꽤 안다고 자부하는데 처음 들어 봐서요.”
비와 어우러지는 음을 상기하면 애초에 노린 것 같던데. 이런 곡을 한 번이라도 들어 봤다면 기억에 남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 세상에 발표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처음 들어 보셨을 겁니다.”
“네?”
“그, 제가 만든 곡이라서요.”
“작곡을요?”
정확히는 헨리 엘가가 만든 곡이지만, 애초에 셀리의 부탁이 그러했으니.
은후의 이름을 빌려서라도 세상에 남편의 유산을 알려 달라는, 권리나 수익은 전부 가져도 좋다고. 하지만 은후는 헨리 엘가의 후손이 있다면 그러지 않으려고 했다.
문제는 헨리 엘가의 후손을 찾을 수 없다는 것. 은혜를 갚기 위해 베리메라와 더불어 탐정에게 겸사겸사 같이 의뢰했었고, 베라메라와 다르게 결과는 빠르게 나왔다.
‘더 찾아보기는 하겠지만, 합법적인 루트로는 발견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후손이 끊어진 것 같지는 않던데 또 모르죠. 대가 끊기는 건 비교적 흔한 일이니.’
그 말에 은후는 자신의 이름으로 곡을 알리고 상황을 봐서 훗날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로 결심했다. 그렇다면 누군가 나타나겠지. 그때 가서 악보의 권리와 수익에 관하여 결정하면 될 일이었다.
‘안 나타나면 어쩔 수 없고.’
은후는 굳이 직접 발품을 팔아 가면서까지 후손을 찾을 필요까진 없다고 판단했다.
“지, 직접이요? 진짜 직접 작곡하셨다고요?”
카페 사장이 한참 동안 침묵 후에 한 질문에 은후는 부드럽게 답했다.
“네, 저작권 등록도 얼마 전에 했습니다.”
“허, 그럼 제가, 아니, 여자 친구분과 제가 처음이겠군요. 이 곡을 들은 사람은요.”
“그렇죠.”
“…….”
카페 사장이 조심스레 물었다.
“혹 제가 평론을 좀 해도 괜찮을까요?”
“평론이요?”
“네, 부업이 음악 평론이거든요. 개인적으로 조그마한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고, 이따금 의뢰도 받고 있습니다.”
“뭐어.”
은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부탁이라면야.
어차피 그런 부탁이 없어도 세상에 곡이 공개된다면 많은 이들로부터 평가를 받을 터.
‘아니, 그건 섣부른 추측이려나.’
유명해지지 않는다면 평가를 받을 수조차 없을 터이니.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그때 이하연이 조심스럽게 끼어들며 말했다.
“이거 영상으로 올려도 돼?”
“그럼.”
“그, 저번에 기타 영상처럼 대박 날 것 같은데.”
“그건 모르는 일이지. 그 연주는 베토벤과 〈월광〉이란 이름값이 있었으니까.”
“에이, 뭘 모르네. 그거 때문에 너랑 내 채널이 얼마나 유명해졌는데.”
중간에 사장이 이하연과 마찬가지로 조심스럽게 끼어들며 물었다.
“기타요?”
“아, 네. 기타를 더 잘 칠……걸요? 맞나? 그, 〈월광〉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나, 어쨌다나. 엄청 유명해졌거든요. 은후가 편곡해서 기타로 친 〈월광〉.”
“호, 혹시.”
카페 사장이 짐작 가는 바가 있어서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환상의 월광’ 편곡 버전?”
‘환상의 월광’은 뭔데.
은후가 고개를 갸웃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