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0화
진부한 말이지만 이하연은 영원과도 같은 찰나의 시간을 보냈다.
다만 이전과 다르게 느낀 것은 편안함.
‘아마 그건.’
은후에게 긍정적인, 거의 고백에 가까운 말을 들어서.
‘사실은 조금 무서웠어.’
네가 거절할까 봐, 내 마음을 받아 주지 않을까 봐.
예전에는 몰랐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이토록 무거울 수 있다는 게.
누군가를 좋아하고 그 마음을 표현하는 게 무서울 수 있다는 걸.
‘걔도 그랬을까.’
이하연은 예쁜 얼굴 때문에 고백도 비교적 많이 받아 봤다.
장난스러운 혹은 가볍게, 때로는 무겁게.
대부분 전자인 케이스가 많았으나 후자의 경우도 없는 건 아니었다.
‘조금 미안하네.’
다만 그 고백들을 모두 거절했다.
이유는 별거 아니었다.
감정이 그리 동요되지 않아서, 고백을 받았음에도 딱히.
그냥 뭐랄까.
‘그래.’
아침에 일어나서 눈을 뜨고 물을 마시고, 그런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아주 잔잔한 마음의 변화와 다름이 없어서. 그래서 거절했다. 하지만 이번에 은후로부터 들은 말은 아니었다.
고백에 가깝다지만 아직 고백은 아닌 말이었음에도, 편안하다는 감정이, 안도라는 단어가, 그토록 크게 자신의 마음을 흔들 수 있다는 사실을 오늘 처음 알았다.
“갈까.”
“응.”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하연은 비가 내리는 날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썩 좋아했던 것 같은데 나이를 먹은 후 귀찮다는 느낌이 강해졌다. 이동할 때 우산을 써야 하는 것도 그렇고. 평소와 다른 습기도 그러했고.
하지만 왠지 모르게.
‘앞으로는 좋아하게 될 것 같네.’
왜냐하면 오늘 비가 내리고 있었으니까.
‘으.’
이하연이 애써 표정을 관리하려고 애썼다.
저도 모르게 실실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아서.
‘되도록이면.’
은후 앞에서는, 웃음도 예쁘게 짓고 싶은데.
“여기인 것 같은데.”
“응?”
“어디 아픈 건 아니겠고.”
“아플 수도 있어.”
“어디가?”
“심장이, 너무 뛰어서.”
“적당히 뛰어야 할 텐데.”
그런 시답지 않은 말을 나누며 이하연이 텐트를 바라봤다.
커다란 사파리 텐트였다.
‘2인에서 3인용이라고 했지.’
안에는 다양한 시설이 갖춰지어 있었다.
커다란 침대부터 소파 및 간단한 식기는 물론, 뒤쪽에는 샤워 시설과 욕조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화장실은 내부에도 있었지만 야외에도 있었다. 사진을 비롯하여 이미 아버지에게 설명을 들었기에 짐작은 했지만, 생각보다 깔끔하고 알찬 느낌이라 살짝 놀랐다.
“괜찮네. 텐트 안이 아니라 어디 호텔 안이라고 해도 믿겠는데. 인테리어 되게 잘했다.”
“그치?”
“응. 그런데 촬영 안 해?”
“촬영?”
“소개 영상 찍어야지. 어지럽히기 전에.”
“아.”
맞다, 카메라.
‘계속 들고 촬영은 하고 있었는데.’
언제부터였더라.
그저 들고만 있었다.
구도 같은 건 신경 쓰지 못했다.
‘아까 은후와 안을 때도 한 손에는 카메라를 들고 있었지.’
하지만 들고 있는지도 까먹었다.
‘으.’
은근히 무겁네.
이제야 카메라를 인식하게 된 이하연이 카메라의 상태를 확인했다. 배터리가 거의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바깥에서 바라보는 건 나중에 얼마든지 찍어도 되니까.’
이하연이 카메라의 구도를 잡으며 말했다.
“여기가 오늘 머물 장소예요. 웬만한 건 다 있는데요. 하나씩 말씀드리자면…….”
은후가 피식 웃으며 시간을 확인하고 이하연에게 말했다.
“찍고 있어. 짐 가져올게.”
“앗! 나도!”
은후가 손을 휘휘 흔들며 밖으로 빠져나갔다. 아직 비가 제법 내리고 있었기에 이하연은 입구에서 멀어져 가는 은후를 바라보다가 입술을 삐죽였다.
‘같이 가고 싶은데.’
은후의 배려라는 건 알았다.
하지만 좀 더, 같이, 가까이.
‘기왕이면 아까처럼.’
이하연이 휘휘 고개를 저으며 마저 촬영을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 * *
짐을 가지러 가면서 은후는 아까는 미처 신경 쓰지 못했던 시설들을 좀 더 볼 수 있었다.
리셉션 근처에 있는 커다란 공용 카페, 수영장, 사우나.
‘수영장은 못 쓰겠군.’
내일 오후에나 비가 그칠 것 같으니.
‘말?’
저 멀리서 말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말도 있었나.’
조금 궁금하기는 했지만 일단 짐부터.
은후는 차에서 캐리어 두 개와 아까 쇼핑했던 걸 담아 둔 상자를 가지고 텐트로 향했다.
“왔어?”
“응, 촬영은 잘했고?”
“그럼.”
“밥 먹자. 내가 맛있게 끓여 줄게.”
“내가 끓여도 되는데.”
은후가 피식 웃으며 텐트에 준비되어 있는 약간 큰 냄비를 꺼냈다. 그리고 혹시 모르니 일단 세척한 후에 식용유를 둘렀다.
“웬 식용유?”
“잠자코 봐 봐.”
이하연이 눈빛을 빛내며 카메라의 배터리를 교환했다.
“잠깐만 기다려.”
“찍게?”
“응. 그런데 뭔가 배운 거야?”
“배웠다면 배웠다고 해야 하나.”
훗날 브이튜브가 사람들의 일상을 적잖이 파고들었던 시기, 지금과 다르게 어떤 요리를 하기 위해서 브이튜브만 켜도 되었던 때 알게 된 레시피였으니까.
“됐어.”
은후는 고개를 끄덕이고 식용유를 데운 뒤 준비해 온 간 마늘을 반 큰술 넣었다. 그리고 작은 양파를 반을 조금 볶은 다음 수프와 함께 볶기 시작했다.
“맵고 칼칼한 걸 좋아하시면 청양고추나 청양 고춧가루를 넣어도 좋아요.”
“방금 멘트 친 거야?”
“뭐, 그렇지?”
“뭔가 자연스러운데.”
“그랬나?”
은후는 이하연이 매운 걸 좋아한다는 걸 알았기에 꽤 많은 양의 청양고춧가루를 넣으며 말했다.
“제 옆에 계신 분이 매운 걸 많이 좋아하셔서 이 정도 고추를 넣었는데요. 어지간하면 비추천드립니다. 이렇게 달아오른 기름에 라면 수프를 함께 볶아 주면 감칠맛이 배가 되고요.”
은후가 물을 조금 부으며 말을 이었다.
“조금 물을 부어서 눅진해질 때까지 저어 주셔야 하는데요, 타지 않게 해 주셔야 되고요. 특히 고춧가루가 들어가면 타기 쉽거든요? 팁이라고 한다면 물을 조금씩 계속 넣어 주면서.”
이윽고 수프가 전부 볶아지고 눅진해지자 은후가 물을 마저 넣으며 입을 열었다.
“물의 양은 정량대로. 그냥 라면을 끓일 때와 비교해서 조금 귀찮기는 하겠지만 맛이 정말로 달라지거든요? 특히 해장할 때 추천드려요. 술 먹은 다음 날 만들어서 만들어 먹자면 많이 귀찮겠지만요.”
이어서 은후는 콩나물이나 버섯을 추가해도 괜찮다는 점까지 언급했다.
“냄새 좋다. 그런데 콩나물은 왜 안 넣어?”
“너, 별로 안 좋아하잖아.”
“아.”
“슬슬 먹을 준비해.”
은후의 말에 이하연이 삼각대를 꺼내어 카메라를 고정시켰다. 그 사이 은후는 대파를 잘게 썰어서 넣었다.
“이렇게 파를 넣으면 라면 국물의 맛과 향이 더 좋아지거든요. 앞의 과정이 귀찮을 것 같은 분들은 파라도 넣어보세요. 특히 밥 말아 먹으려고 하시면요. 아주 간단한 것 하나만으로도 맛이 변하는 게 요리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은후는 라면을 두 개의 그릇에 나누어 담았다. 이윽고 둘 다 라면을 먹기 시작했고.
“와.”
이하연은 깜짝 놀랐다.
“맛이 달라지면 얼마나 달라질까, 그런 의심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진짜 다르네요.”
“안 믿었어?”
“아니, 믿기야 했지. 근데 이렇게까지 달라질 줄은 몰랐거든.”
“들으셨죠? 꼭 한 번 해서 드셔 보시길 추천해 드립니다.”
음식의 맛을 결정하는 요소는 꽤 다양했다.
본질적인 식자재부터 시작하여 요리의 과정을 비롯하여 환경까지. 또 누군가와 먹느냐에 따라서 음식의 맛을 다르게 느끼는 게 사람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하연의 환경은 최상이었다.
‘맛있다.’
정말로, 라면이 이렇게 맛있을 수가 있을까.
“밥도 먹을래.”
이하연의 말에 은후가 전자레인지에 햇반을 두 개 데웠다.
“배부르다.”
“차 마실 배는 남았어?”
“……차. 응, 마실래.”
“잠깐만.”
은후가 물을 데우기 위하여 전기 포트를 살폈다. 그리고 썩 위생이 좋은 것 같지 않아 보여서 냄비에 물을 올렸다.
“포트는 안 써?”
“상태가 그다지 안 좋아 보여서.”
“그런데 티백까지 챙겨 왔어?”
“뭐.”
“샌스 좋네.”
은후가 피식 웃었다.
챙겨 왔다면 챙겨 온 것이지만.
은후가 이하연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캐리어를 뒤지는 척하면서 리어카에서 말린 페퍼민트를 꺼냈다. 일전 마법을 쓰는 대체 재료를 구하기 위한 과정에서 구해 둔 것이었다.
“티백이 아니네?”
카메라로 차를 우리는 모습을 찍기 위해 은후의 근처에 다가온 이하연이 말했다.
“이쪽이 더 운치 있지 않아?”
“그거야 그렇지만. 무슨 잎이야?”
“페퍼민트.”
“나쁘지 않지.”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네.”
“음.”
이하연이 잠깐 고민하다가 답했다.
“딱히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것 같아.”
“그럼 좋아하는 차는?”
“카페 모카.”
“그건 알고. 그런데 커피는 차가 아니잖아.”
“차는 잘 모르겠어. 잘 안 마시니까.”
“차차 알아보면 되겠네. 종류가 많으니까 개중에 분명히 마음에 드는 거 하나 즈음은 있을 거야.”
이윽고 차를 다 우리고 두 사람은 입구 근처에 휴대용 접이식 의자를 옮겨서 앉았다.
쏴아아아아.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뜨거운 음식을 먹었기에 딱히 썰렁하다거나 그런 느낌은 없었다. 더불어 지금 두 사람 다 손에 따뜻한 찻잔을 들고 있기도 했고.
‘카메라는.’
신경 쓰지 말까.
원래라면 구도를 잡고 바깥 풍경을 찍으면서 차를 마시는 광경을 담아야 하겠지만.
‘뭔가 귀찮다.’
배가 불러서 나른하기도 했고.
이하연은 차를 홀짝이며 은후를 힐끔 바라봤다.
‘에헤헤.’
절로 웃음이 나왔다.
별생각이 없었던 페퍼민트 차의 향이 왠지 모르게 향기롭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페퍼민트, 좋아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동안 고요함 속에 느긋하게 시간이 흘러갔다.
“잠깐 나갈까?”
“응? 어딜?”
“리셉션 쪽에 만들어 둔 카페에 피아노가 있더라고.”
“아, 여기 사장님이 취미가 피아노라고 하더라. 종종 피아노 친다고 들었어. 그런데 피아노는 왜?”
“좀 치려고.”
“피아노도 칠 줄 알았어?”
“조금.”
이하연의 눈빛이 반짝였다.
아주 예전에, 은후는 시간을 거스르기 전 초등학교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어머니의 권유로 피아노 학원에 다녔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 피아노에 손을 댄 적은 없었다.
“찍어 줄 수 있지?”
“그럼.”
다만 이번에 은후가 피아노를 치려는 건 본인의 실력으로 치려는 게 아니었다. 일전 바다표범 요정 셀키로부터 부탁받은 악보에 남은 사념을 이용하여 치려는 것.
‘아마도 두 번, 많아야 세 번 정도이려나.’
저작권 등록은 해 두었다.
원래라면 오늘이 아니라 다른 기회를 만들려고 했지만, 아까 지나 오면서 피아노가 눈에 띄었다. 그래서 오늘 같은 날에 한 곡 정도 쳐서 이하연의 브이튜브를 통해 공개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생각보다 지루할 수도 있어. 클래식이라.”
“클래식……!”
가는 길, 조금은 자연스럽게 은후의 곁에 달라붙어 있던 이하연이 어색하게 외쳤다.
“클래식은 잘 모르는데. 그래도 노력해 볼게.”
“잘 몰라도 괜찮고, 노력 안 해도 괜찮아.”
“그래도.”
“그냥 편하게 들으면 되니까. 부담 갖지 말고.”
“응.”
카페에 도착한 은후가 주문을 하면서 물었다.
“잠시 피아노 좀 이용할 수 있을까요?”
“아, 그럼요. 편하게 쓰세요.”
허락을 받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나저나 관객이 없어서 좀 아쉬우실 것 같은데.”
“없지는 않죠. 두 명이나 있는데요.”
“하하, 그렇죠. 커피는 가져다 드릴게요. 카페 모카랑 캐러멜 마키아토라고 하셨죠?”
“네.”
잠시 후, 비와 함께 은후의 손가락으로부터 흘러나온 피아노 음률이 어우러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