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의 인생 룰루랄라-99화 (99/170)

제99화

이하연이 은후의 목을 껴안은 건 저도 모르게 나간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어어.’

이하연이 당황하며 다시 외쳤다.

“추……출발!”

숨을 쉬는 소리부터 살결 냄새까지.

‘이, 이게 아닌데.’

목소리 또한 너무 가까워서.

“이대로는 출발 못 하는데?”

“하면 안 되겠지?”

“사고 난다.”

“하여간 장단 못 맞추기는. 그나저나 이따 뭐 먹을까?”

이하연은 당혹스러움을 애써 감추며 용기 내어 말을 이었다.

“고기?”

“식상해.”

“라면?”

“라면도 나쁘진 않겠다.”

“그런데 캠핑까지 하러 가서 라면은 조금 그럴지도.”

“그럼 둘 다?”

“그것도 괜찮겠네.”

조금만 더.

이러고 있으면 좋겠는데.

“…….”

“…….”

차에 선팅도 잘되어 있으니까, 밖에 사람들에게 눈총을 살 일도 없고.

그러니까.

어.

그런데 은후는 왜 가만히.

나는.

그냥.

손을 놓으면 되는 일인데.

하지만 이하연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은후도 거부하는 건 아니니까.’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나, 목 아파.”

은후의 말에 그제야 이하연이 움직였다. 아까와 다르게 재빠르게 은후의 목에 감싸 안고 있던 손을 풀었다.

‘으.’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영원처럼 긴 것 같기도 했고 찰나라는 단어가 떠오를 만큼 짧은 것 같기도 했다.

“가자.”

“어, 응!”

이하연이 달아오른 얼굴에서 느껴지는 열기에 슬며시 창문을 열었다.

“아하하, 좀 덥네.”

은후가 피식 웃었다.

“카메라는?”

“아, 그, 찍고 있었겠지?”

방금 장면.

“편집 잘하고.”

“응.”

“딱히 내보내도 상관은 없지만.”

“응?”

“얼굴은 안 나오는 게 좋겠다. 아직은 시기상조 같으니까.”

그렇지.

시기상조.

그러면 목을 감싸 안은 건 시기상조가 아니란 말이려나.

“미, 미안?”

“뭐가?”

“갑자기 껴안아서?”

“딱히 미안할 게 있나.”

“그런가?”

두서없이 이런저런 말들을 내뱉는 이하연의 모습이 은후의 눈에는 퍽 귀여워 보였다. 그래서 좀 골리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뭐.’

굳이.

나중에 좀 진정되면.

혹은 훗날 안줏거리 삼아서 놀려도 괜찮을 것 같고.

그래도 한마디 해 볼까 싶어서 은후가 툭 내뱉었다.

“키스라도 하면 난리 나겠네.”

“으응? 키, 키스?”

“싫으면 안 하겠지만.”

“아니! 좋아!”

화들짝 놀라며 크게 외친 이하연. 마침 신호가 빨간불이었다. 그래서 은후는 뺨에 가볍게 프렌치 키스를 했다.

“허락받고 했다?”

“…….”

키, 키스.

방금.

은후가.

‘어으.’

너무 좋은데.

그래도 뭔가 아쉬운 것 같기도 하고.

‘입, 입술이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은데.

이윽고 마트에 도착할 때까지 쭉 침묵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 고요함은 불편함이 아닌 설렘이 가득한 정적이었다.

* * *

대형 마트에 주차하고 안으로 들어간 은후와 이하연. 두 사람은 사람의 이목을 끌었다. 선남선녀라는 말이 그렇게 잘 어울릴 수 없는 두 사람이었으니.

하물며 이하연은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인터넷이란 바다에서라면 모를까, 현실 세계의 야외에서 개인 방송을 하는 건 드문 시대였다. 그러니 이목이 집중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평일의 이른 오전. 그래서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 그리고 어느 정도는 이하연이 사람들의 시선에 익숙하다는 점이었다.

“으, 좀 그렇네.”

이하연이 조그마한 목소리로 은후에게 말했다.

“뭐가?”

“사람들 눈길이 조금 신경 쓰여서.”

“아까보다 신경 쓰여?”

“응? 아까?”

은후가 뺨을 툭툭 건드렸다. 이하연이 볼이 조금 달아올랐다. 아까처럼 새빨갛지는 않았지만 꽤나.

“그, 그건 아니고.”

“그럼 됐네. 당당하게 행동해. 불법을 저지르는 것도 아니고 꿀릴 게 없는데.”

은후의 말에 그제야 좀 이하연의 표정이 폈다.

“과자도 좀 살까?”

“일단 고기부터 고르고.”

“응, 응.”

“삼겹살?”

이하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항정살도 조금만.”

일단 고기를 고르고, 술도 사고.

그 과정에서 이하연은 평소대로 행동할 수 있었다. 적어도 겉으로 보이기엔. 속으로는 너무 설레서 신나 있는 상태였다. 고작 마트에서 함께 쇼핑하는 것인데, 은후와 함께하는 상황이라서.

“과자는 벌집 피자 좋아한다고 그랬었나? 아직도 좋아해?”

“어, 아직도 좋아하기는 하는데.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기는. 예전에 이야기 해 줬었잖아.”

“그랬나?”

“언제였냐면, 무기 강화하다가 날려 먹었을 때.”

“무기 강화?”

이하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중학교 때 같이 했던 게임 기억나?”

“중학교?”

“레전드 앤 파이트.”

“아!”

“9강 활.”

이하연은 기본적으로 게임 플레이가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애초에 강화해서 무기가 사라질 가능성이 있다면 어지간하면 시도하지 않았다. 돈을 모아서 강화된 무기를 사는 편이었다.

“그때가 처음이라고 하지 않았어? 날아갈 무기를 강화 시도한 거.”

“그랬지. 강화 확률 업 이벤트에 낚여서는.”

“그거 날려 먹고 그날로 게임 접네, 마네, 그랬잖아. 짜증 나서 좋아하는 과자라도 먹어야겠다고 바로 게임 껐잖아. 그때 벌집 피자 좋아한다고 했었고.”

“맞아. 그때 엄청 짜증 났었지. 넌 성공했잖아.”

“그랬지?”

이하연이 시도한 계기도 같이 함께 게임을 하던 은후가 성공해서였다.

“솔직히 10%면 해 볼 만했어.”

“그건 그래.”

낮다면 낮은. 하지만 이벤트가 없었을 때 8강에서 9강 성공 확률은 2%였다. 무려 다섯 배 수치였으니, 충분히 시도할 가치는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거 땜에 연락처 교환도 했구나.”

“고작 메일이지만.”

“싸우기도 엄청 싸웠던 것 같은데.”

“뭐.”

은후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때는 어렸잖아.”

똑같이 8강에서 9강인데, 은후가 성공하고, 이하연은 실패하고.

그걸 두고 은후가 이하연을 엄청 놀렸다. 그래서 이하연은 진심으로 삐지고 결국 진짜 화냈다. 불난 집에 부채질하냐고. 서로 쌍욕도 마구 날렸다.

너무 놀린 것도, 싸움의 계기를 제공한 것도 은후였다. 그래서 은후는 미안한 마음에 자신의 무기를 팔아서 8강 활을 이하연에게 사 줬다.

이후 급속도로 둘은 친해졌다. 비 온 뒤 땅이 더 굳는다는 말처럼. 이하연이 아련한 눈동자로 벌집 피자를 두 봉지 집어서 카트에 넣었다.

“아직도 메일 남아 있으려나.”

“직접 지운 게 아니면 남아 있지 않으려나?”

“그런데 게임은 아예 안 해?”

“응?”

“같이 게임 하고 싶은데. 너 없으니까 재미가 없……지는 않지만, 좀 덜하더라고.”

게임이라.

“지금 주력으로 하고 있는 게임이 레전드 히어로즈 맞지?”

“그치.”

“같이 하던 테론은 너도 접었고.”

“응. 아, 맞다. 템 정리하면서 돈 꽤 나왔는데. 네가 준 템도 같이 싹 정리했거든. 말 안 했지, 이건?”

“그건 됐어.”

“그래도.”

“다음에 밥이나 한 끼 사, 비싼 거로. 그리고 게임은 가끔 같이 할까.”

은후의 말에 이하연이 활짝 웃었다. 이후 한동안 게임을 주제로 이야기를 이어 가며 쇼핑을 마저 마쳤다. 그리고 마트에서 벗어난 직후 춘천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춘천 숲 자연 휴양소라는 캠핑장이었다. 기본적으로 캠핑장이었으나 글램핑 시설까지 갖춘 곳으로서 꽤 훌륭한 곳이라고.

“아빠가 그런 평가는 은근히 냉정하거든? 훌륭하다고 말하는 법은 드무니까 믿을 만할 거야.”

“취미가 캠핑이라고 하셨지.”

“응. 지금 가는 곳도 이미 다녀오셨어. 사서 하는 고생이 뭐가 좋은지 솔직히 잘 모르겠던데.”

“우리가 지금 가는 게 캠핑인데? 글램핑이라고는 하지만.”

이하연이 미소 지으며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잠깐의 침묵 후 입을 열었다.

“이제는 좀 알 것 같달까. 항상 엄마랑 다니셨거든. 혼자도 종종 가시기는 하지만 그건 엄마가 바빠서 시간을 낼 수 없을 때나 그렇고.”

물론 캠핑 자체도 좋아하겠지만.

“같이 가는 사람 때문이지 않으려나 싶다니까. 엄마랑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게 캠핑이라서.”

“어머님도?”

“응, 아빠만큼 열정적이지는 아닌 것 같지만 은근히 좋아하셔.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건 꽤 중요한 일이잖아?”

그거야 그렇다.

“나만 해도 너랑 친해진 계기는 게임이었고, 캠핑도 그래. 왠지 모르게 너랑 같이하면 좋아질 것 같은 느낌.”

은후가 잠깐 고민하다가 답했다.

“나도.”

“응?”

“나도 그럴 것 같은데.”

“그, 정말?”

“이런 거로 거짓말은 안 해.”

“그럼 머지않았겠네?”

“뭘?”

이하연이 뾰로통한 표정으로 은후를 바라봤다. 은후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않을게.”

“응. 그럼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릴게. 지금은 이 정도만 해도 좋으니까.”

다시 주제를 바꿔서.

“도착하면 점심으로 라면 먹자. 면 먹고 싶어.”

“라면 좋지.”

두 사람이 점심을 무얼 먹을까 도란도란 이야기했고.

“진짜 금방이네.”

“금방이라기엔.”

용산에서 춘천 숲 자연 휴양소에 도착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대략 두 시간 남짓. 하지만 은후도 이하연이 느끼기엔 반의반도 안 걸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목적지에 도착한 두 사람을 마중 나온 건 빗방울이었다.

툭.

툭.

빗방울이 차창을 때리는 걸 잠시 바라보다가 은후가 말했다.

“잠깐 기다려.”

은후는 트렁크에서 미리 비치해 두었던 우산을 두 개 꺼내려다가 하나만 꺼냈다. 그리고 보조석의 문을 열었다.

“체크인하고 잠깐 같이 좀 걸을까?”

“좋아.”

두 사람은 안내소에서 머물 텐트를 배정받은 뒤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이하연은 은후의 눈치를 잠깐 살피다 슬며시 팔짱을 꼈다.

“그.”

“응?”

“닿는데.”

“바보.”

은후의 시선이 자신의 목 아래를 향하는 걸 느낀 이하연이 애써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일부러 그러는 건데. 그럴 땐 모르는 척 해야지. 남자랑 팔짱 끼면서 모르고 하는 여자가 어딨어.”

그거야 은후도 알았다.

잠깐 당황해서 말이 바로 튀어나왔을 뿐.

‘내가 당황했다고.’

은후가 순간적으로 중얼거렸다.

아무리 예뻐도 관심이 없다면 감정이 동요할 일은 없었을 터. 하기야 아까 이하연의 뺨에 키스한 것도 지극히 충동적이었다.

‘그런가.’

오래 기다리지 않게끔 하겠다고 아까 말했다.

구체적으로 뭔가 언급하고 약속한 건 아니지만 서로가 알았다.

고백.

하지만 그래도 시간이 좀 더 걸릴 거라고 예상했다.

‘그리 멀지 않았나.’

은후가 자신의 감정을 차분히 관조하려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굳이 막을 것도, 살필 것도, 의도적으로 어떻게 할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하고자 한다면 할 수야 있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아.’

그저 흘러가는 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현대로 돌아와 그렇게 다짐하지 않았던가.

지금 이 마음도 그러했다.

“좀 춥다.”

“들어갈까?”

“뭔가 좀 아쉬운데.”

“산책할 시간은 충분해.”

은후는 이하연의 팔을 풀고 빙그르르 돌아 꼭 안아 주었다.

“그?”

이하연이 당황했다.

“나, 너 좋아하는 것 같아.”

“어, 응? 나도?”

“조만간 좋아해, 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고.”

“나는 좋아하는데. 꽤 많이.”

사랑해, 라고 말하는 건 아직 많이 부끄러워서.

“이제는 좀 덜 추우려나.”

“어어.”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거 고백이야?’

고백은 고백인 것 같은데.

뭔가 시원찮은 것 같아서.

‘뭐.’

아무렴 어때.

조만간 분위기 봐서 확실하게 하면 되지.

그렇게 생각하며 이하연이 은후의 목에 얼굴을 묻으며 눈을 감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