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7화
가게 주인 부부는 한동안 더 은후가 만든 환상의 술에 관해서 떠들고. 은후의 후배 임서혁은 소개팅에서 첫 만남이 나쁘지 않았는지 꽤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서로 품은 감정도 긍정적인 쪽에 가까운 것 같고.’
은후가 일부러 알아보고자 한 건 아니었지만 주위를 살피다가 알게 되었다.
“선배는 취미가 뭐예요?”
“글쎄.”
은후 일행의 대화 주제는 어느새 취미로 넘어가 있었다.
“승마?”
굳이 취미라고 말하기도 그랬지만.
스타더스트가 아니었다면 전주 승마장에 주기적으로 찾아갈 일도 없었을 테니까. 그러니 정확히는 마법 연구라고 하는 게 옳겠지.
“오오, 승마!”
“기타도 종종 치고.”
“기타!”
“왜 이렇게 오버야.”
“하하, 그러게요.”
아예 맛이 간 건 아니었지만 적잖이 취기가 올라온 박훈은 꽤 신이 난 모양이었다.
“승마, 재밌나요?”
박나리의 물음에 은후가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나쁘지 않지요.”
“저어.”
박나리가 머뭇머뭇하다가 용기 내어 말했다.
술의 힘을 빌려서.
“다음에 한 번 가르쳐 줄 수 있나요?”
“관심이 있으면 다음 학기에 교양 수업을 듣거나, 승마장에서 선생님을 찾는 게 빠를 거예요.”
진짜 목적은 승마가 아님을 알았다. 은후와 친해지고 싶으니까. 그런 박나리의 본심을 은후라고 모르는 건 아니었다.
‘만약에 하연이가 없었다면.’
하다못해 관계의 진전이 이루어지지 않고 그저 친구였다면 이런 박나리의 호의를 이렇게까지 멀리하진 않았을 것이다. 얼굴 때문이건 어쨌건 자신에게 호감을 보낼 뿐 다른 목적은 없었으니까.
“제가 뭔가 더 말해야 할까요?”
“……아니요.”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그…….”
“제 성격이 썩 좋은 편은 아니라서. 얼굴값 한다고 하잖아요?”
은후의 농담에 섞인 배려에 박나리가 조금 웃었다.
“그러네요.”
술자리는 잠시 더 이어지다 끝이 났다.
“언니.”
“응?”
“괜찮아요?”
“안 괜찮을 건 뭐야.”
은후가 사라진 후 이채린의 물음에 박나리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차라리 이 편이 낫지.”
“뭐가요?”
“은후 선배님이 아예 여지를 안 줬잖아.”
“그거야, 뭐.”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여지 줬으면 혼자 설레발 치고 그랬을 텐데. 나중에 더 상처받을 수도 있었을 거고. 하여간 은후 선배님 이야기는 그만하자. 괜찮아.”
옆에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던 박훈이 말했다.
“우리끼리 2차 어때요?”
“그럴까?”
* * *
다음 날 아침, 은후는 차를 이끌고 전주의 남쪽 석구동으로 향했다. 일전 카페 루디엠의 사장 김현석으로부터 소개받은 공인중개사 박학서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어서 오세요, 사장님.”
“사장님이요?”
“하하, 그럼 사장님이시죠.”
“사장님이라.”
“호칭이 혹시 마음에 안 드시나요?”
“아니요. 그건 아니고 처음 들어 보는 말이라서요.”
예전에, 시간을 거스르기 한참 전, 이세계에 가기 직전에 품었던 꿈 중 하나.
‘사장님 소리를 한번 듣고 싶었는데.’
실제로 자신의 사업을 차리기 위해 이런저런 준비도 하고 있었다. 다만 용기가 없어서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었을 뿐.
“은후 씨 정도의 큰손이면 충분히 제게 사장님입니다.”
“감사합니다.”
“어휴, 감사하기는. 제가 더 감사하죠.”
“현석이 형으로부터 들었어요. 많이 신경 써 주셨다고요.”
“그건 당연한 이야기고요.”
잠시 서로에게 가벼운 덕담을 주고받은 뒤 은후는 꼼꼼하게 계약서를 살폈다. 그리고 실제로 매입하기로 한 땅을 마저 확인한 뒤에 말했다.
“계약 확정 짓죠.”
“네.”
박학서가 땅을 파는 이에게 연락했다. 그리고 잠시 후 매도자가 도착했다.
“사장님, 어서 오세요.”
“큼.”
나이를 적잖이 먹은 남성이 나타났다.
“이분이요?”
“네, 이쪽이 매수자인 이은후 사장님입니다.”
“안녕하시오.”
“네, 안녕하세요.”
이윽고 계약서에 서로가 사인했다.
“돈은 오늘 중으로 바로 입금하겠습니다.”
“거, 젊은 사장님이 시원시원하구만.”
매도자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떠났다. 마음 같아서는 조금 더 욕심을 부릴까 싶기도 했지만 이미 적잖이 이득을 봤다. 현재 시점에서는 말이다.
‘거기다 젊은 사람치고 만만치 않아 보이고.’
아주 잠깐 짧은 대화임에도 은후의 오라가 섣불리 배짱부리지 못하게끔 만들었다. 그래서 매도자는 더 욕심부리지 않았다. 매도자가 사라지자 박학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은후에게 말했다.
“꽤 까탈스러운 분인데 다행이네요.”
“그래요?”
“네, 처음에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부르시던지, 배짱을 장난 아니게 부리시더라고요.”
“그런데 그 넓은 땅이 다 한 사람 소유였나요?”
“네, 그렇더라고요. 선대로부터 물려받았다고 그러던데. 그래서 절대 팔 수 없다고 처음에 배짱은, 어휴.”
“고생하셨네요.”
“하하, 쉽게 버는 돈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거로 먹고사는데 당연히 고생해야죠.”
은후가 잠깐 고민하다가 박학서에게 물었다.
“혹시 아시는 건설업자 분, 계십니까?”
“건설이요?”
“네. 이번에 산 곳에 집을 하나 올릴 생각이라서요.”
“딱히 아는 분은 없는데. 한번 알아봐 드릴까요?”
은후는 고개를 저으면서 됐다고 말했다.
“굳이 그렇게까지 신경 써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인맥이 없는 것도 아니고요.”
“그러시다면야.”
여차하면 이창석의 도움을 받아도 되니까.
‘하연이 삼촌이 그쪽 일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한번 물어볼까.
어차피 싸게 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집을 짓는 데 돈은 아낌없이 쓸 생각이었다. 다만 문제는 믿을 만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었지.
“완료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은후는 은행에 들러서 잔금을 치르며 통장을 살폈다.
‘꽤 줄었네.’
뭐, 돈이야 벌고자 하면 금방 버는 것이었다. 적어도 은후에겐 그러했다.
‘그나저나 사과폰이 내년에 나오든가.’
스마트폰.
하나의 조그마한 기기로 얼마나 수많은 일을 할 수 있었던가. 스마트폰이 보편화된 세상이었다면 이렇게 은행까지 오지 않아도 그 자리에서 바로 잔금을 치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문득 영화 하나가 생각났다. 사과에 관련된 주식을 산다면 금 사과를 사는 것이나 다름없을 거라는 블랙 유머가 담긴 영화였다. 은후가 피식 웃었다.
‘적당히 투자해 둘까.’
스마트폰과 관련된 회사의 주식들, 그 외 한 번쯤은 들어 본, 성공하는 회사의 주식들.
‘코인도 있지.’
물론 미래는 가변적이었다, 특히 경제에 관련된 것이라면 더더욱.
예컨대 은후가 이세계에 가기 직전의 세계에서 코인은 대박을 쳤다. 세계적인 광풍. 망하는 사람도 엄청 많았으나 성공하는 이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세계에서라면 또 모를 일이었다.
- 뭐 하고 있어? 난 막 일어남 >_<
그렇게 은후가 미래 경제에 관한 생각을 이어 갈 때,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은후는 문자를 확인한 뒤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오늘은 좀 일찍 일어났다?”
- 응, 그래서 조금 졸려.
“목소리가 좀 많이 가라앉아 있는데. 어디 아픈 건 아니지?”
- 걱정도 팔자야. 막 일어나서 그래. 으그그그극. 그런데 갑자기 전화?
은후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냥. 목소리 듣고 싶어서.”
- 어.
“귀찮았어?”
- 아니!
갑자기 날라온 직구에 이하연은 순간적으로 잠이 달아나는 걸 느꼈다.
“잠은 깬 듯?”
- 나 놀리는 거야?
“반쯤은. 그래도 아까 말은 진담.”
- 바보.
“그리고 알잖아. 문자 하는 거 좀 귀찮아하는 거. 그나마 너라서 답장하는 거임.”
- 큼.
이하연은 일부러 헛기침한 후에 말했다.
- 아침은, 아니지, 아점은 뭐 먹지?
“귀찮다고 굶지는 말고.”
- 응, 샐러드라도 먹으려고.
“약속은 내일이었지?”
- 그렇지?
같이 캠핑 가기로 한 날.
“그런데 혹시 외삼촌이 건설 관련된 일 한다고 하지 않으셨어?”
- 응, 그치? 조그마한 건설회사 사장님이셔.
“소개 좀 해 줄 수 있어?”
- 그거야 어렵지 않은데. 왜?
“저번에 땅 산다고 말했었잖아.”
- 응.
“방금 잔금 치렀거든. 거기에 집을 좀 올리려고.”
진짜로 땅을 샀구나.
그리고 집까지.
이하연은 속으로 나지막이 감탄하며 말했다.
- 한번 물어볼게. 그나저나 그럼 난 그 근처로 이사 가야 하나, 아니면 내 방도 하나?
반 농담, 반 진담.
은후는 자연스럽게 그 질문을 넘겼다.
“그건 차차 생각하고.”
- 알았어.
“그럼 끊는다.”
- 벌써?
“너, 밥 먹고 방송 준비해야지.”
- 그거야 그런데. 우, 아쉽다. 이래서 근처에 있어야 한다니까. 그럼 같이 밥 먹자고 했을 텐데.
“시간대가 애매한데?”
- 착한 은후라면 같이 먹어 주지 않았으려나아.
“얼른 밥이나 먹어.”
은후가 피식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직후 문자가 한 통 날라왔다.
- 나빴어.
- 원래 그랬어.
- 원래는 안 그랬던 거 같은데.
- 밥은?
- 잠깐 ㄱㄷ 사진 보낼게.
굳이 사진까지야.
은후는 하늘을 잠깐 바라보면서 한동안 이하연과 문자를 주고받았다.
그러기를 잠시, 사진을 확인하고 잘 먹으라고 답장한 후에 덕진 공원으로 차를 몰았다. 뒤쪽 공원 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수호령이었다.
“은후다!”
수호령의 어깨엔 페럿이 올라타 있었다.
“나, 나, 이름 지었어!”
“이름?”
“응!”
“아.”
그래서.
‘연결이 견고해졌구나.’
페럿과 수호령 사이에.
“뭐라고?”
“뀽뀽이!”
은후가 피식 웃었다.
뀽뀽이라.
귀여운 이름이었다.
“뀽뀽아?”
뀨!
은후가 부르자 페럿이 나지막이 울었다. 하지만 이전과 다르게 수호령의 어깨에 가만히 자리 잡고 있었다. 정령이 누군가에게 이름을 준다는 것은 결국 계약이니.
일전에는 자신을 구해 준 은후에게 친밀감을 더 느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수호령이 우선이었다. 그리고 은후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산 땅의 영맥을 낙원에 있는 천도복숭아 나무에게.’
그 흐름을 만든 뒤에.
‘령이의 이름을 지어 준다면.’
아주 조금, 정말 조금의 시간만 남았다.
일전에는 이름을 지어 주고 싶어도 수호령과 일반적인 계약을 하지 않기 위해선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수호령이 좀 더 성장할 시간이 필요했고, 그 시간이 이제 거의 충족되었다.
“령아.”
“응?”
“조만간 이름 지어 줄게. 적어도 다음 여름이 찾아오기 전에.”
“정말?!”
이미 약속은 했으나, 은후가 구체적인 시기를 약속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응.”
“와! 뀽뀽아! 나도 이름! 이름 곧 생긴대!”
수호령은 신나서 은후의 손을 이끌고 낙원이 있는 벽진 폭포로 달려갔다. 은후는 적당히 수호령의 발걸음에 맞추어 따라갔다.
“개굴아! 은후가!”
“은후 도령이?”
“곧 이름 지어 준다고 했어! 다음 여름이 오기 전에!”
“오호, 그거 축하해야 할 일인데?”
개구리는 은후의 계획을 대충이나마 알고 있었다.
“루비야!”
수호령은 연신 낙원의 주민들에게 곧 이름이 생긴다는 걸 자랑하기 바빴다.
“은후 도령, 거의 준비가 끝난 모양이야?”
“뭐.”
개구리의 물음에 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낙원도 확장하게 될 것 같고.”
“오호, 주민들을 늘릴 생각은?”
“아직은. 억지로 늘릴 생각도 없어.”
“으흠.”
개구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러고 보니 도깨비 양반이 찾더라고.”
“날?”
“어, 비단 나침반 말이야. 그거 업그레이드해 준다고 하던데?”
“업그레이드?”
“방망이에 힘이 잔뜩 채워졌다면서.”
은후가 개구리의 말에 리어카에서 비단 나침반을 꺼냈다.
‘이제 다시 쓸 수 있게 되었나.’
보물이나 인연을 찾아 주는.
어떻게 업그레이드가 되려나.
“그런데 굳이 이걸? 다른 방식으로 사용할 수도 있을 텐데.”
“나야 잘 모르지. 자세한 건 그 양반한테 듣는 게?”
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이하연과 캠핑하러 가는 길에 잠시 들르면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