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화
다음 날 아침과 점심 사이, 은후는 차를 몰고 전북대학교로 향했다.
‘좀 이른가.’
딱히 오전에 수업이 없음에도 일찍 학교에 온 이유는 조별 과제의 마무리를 위해서였다. 정확히는 조별 과제 보급관으로서 역할을 다하려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발표는 한참 남았을 텐데.’
아마도 보름 정도.
별 신경 쓰지 않아서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았다. 물론 마나를 운용하며 기억을 더듬는다면 기억해 낼 수야 있겠지만.
‘굳이.’
그나저나 날씨가 제법 쌀쌀했다. 사람들의 옷차림부터가 그러했다. 두꺼워지고 면적이 넓어지는 등, 가을이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조금은 아쉬운 느낌이었다.
‘나도 신경을 좀 써야 하려나.’
현재 은후의 옷차림은 얇은 긴 팔에 청바지였다. 은후와 비슷한 옷차림을 한 학생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다들 연신 춥다며 투덜거렸다.
‘지금이야 괜찮지만.’
더 추워진 날씨에 이런 차림이라면 지금과 다른 의미의 눈초리를 받을 테니까.
“야야, 저 사람이 그 선배 아니야?”
“맞을걸?”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더니.”
“그, 이름은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어디 잡지 모델로도 나왔다더라.”
“진짜?”
이미 익숙해진, 정확히는 아예 신경 쓰지 않게 된 말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은후는 하늘을 바라보며 시간을 가늠했다. 그리고 만나기로 한 프랜차이즈 카페로 발걸음을 옮겼다.
은후는 따뜻한 카페 라테 한 잔을 시킨 뒤 카페 2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익숙한 얼굴들을 발견했다. 성인 및 노인 심리학 조별 과제 인원들이었다.
“다들 와 있었네요?”
은후가 도착하자마자 다들 반갑게 반겨 주었다.
“오셨어요.”
“내가 약속 시간을 잘못 알았어?”
박훈이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건 아니고요. 저희가 좀 일찍 모였어요.”
“왜?”
“오전에 같이 듣는 수업이 갑자기 휴강 나서요. 교수님이 급한 일이 있다고 갑작스럽게 휴강하시고 시간이 붕 떴거든요.”
“그래서 그냥 이렇게 된 거 조별 과제나 같이 마무리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여기 자리 잡았죠.”
박훈의 말을 이채린이 이어받아서 말했다.
“그래서, 잘 끝났어요?”
이채린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은후가 피식 웃으며 박훈에게 물었다.
“저번에 준 카드는 잘 썼고?”
“넵, 알뜰살뜰하게 썼습니다. 영수증도 끊어 놓았는데 드릴까요?”
“됐어. 알아서 잘했겠지.”
“그래도 이런 건 정확히 해야 하지 않을까요. 저희가 엉뚱한데 썼으면.”
은후가 박훈의 말을 끊으며 입을 열었다.
“상관없어.”
감정만 봐도 알았으니까.
“그리고 일부러 일찍 끝냈지?”
“네?”
“발표가 아마 보름 정도 뒤일 건데.”
“네.”
“좀 영악한 애였다면 질질 끌었을 거다. 못해도 한두 번은 뭐라도 더 얻어먹을 수 있었을 텐데.”
그 정도면 그래도 애교 수준이었다.
“어떻게 그래요.”
“순진하기는.”
은후가 아까처럼 픽 웃었다.
처음에 조별 과제를 같이 해 달라는 부탁을 굳이 거절하지 않고서 보급관의 역할으로라도 참여하겠다고 한 건 이런 순진함.
‘아니, 순수함이 더 정확할까.’
그런 박훈의 감정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박훈의 여자 친구 이채린은 은후를 무슨 관상용 미술품 보는 듯하였고, 다른 조원 박나리의 경우는 은후의 얼굴 때문인지 적잖은 호감을 품은 상태였었다.
“너무 사람 믿지 마.”
“하하.”
은후의 나름 진지한 충고에 박훈이 어색하게 웃었다.
“여자 친구 말 잘 듣고.”
“안 그래도 잘 듣고 있어요. 그치?”
“그건 그렇지. 근데 가끔 고집부릴 때면 머리가 아프더라.”
“내가?”
“그래.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고집을 부리는 게 아니고, 나름대로 합당한 이유가 있으니까 그러려니 하지만.”
두 사람의 투닥거림은 화기애애했기에 누가 봐도 애정 다툼이었다. 그래서 지켜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은후는 미리 준비해 온 초콜릿을 세 사람에게 꺼내어 내밀었다.
“별건 아니고 여기 선물.”
“선물요?”
면세점에서 그냥 눈에 띄어 집은 것이었다.
가격도 그리 비싸지 않았고.
하지만 세 사람에겐 다르게 다가온 모양이었다. 작은 것이라지만 은후가 선물까지 챙겨 올 줄은 아무도 예기치 못했으니까 말이다.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선배님.”
이후 한동안 과제에 관하여 은후가 알아야 할 사항을 숙지하는 시간을 가졌다. 딱히 은후가 발표를 해야 한다거나 해야 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과제의 내용 자체는 알고 있어야 했다. 왜냐하면 교수가 발표자 외 조원들에게도 과제 관련 질문을 던지는 유형이었기 때문이다.
그 점은 은후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고, 결국 과제가 끝난 후 전체적인 내용에 관해 숙지는 필수였다. 다만 다른 조원들이 예상하지 못한 점이 있었으니.
“자료 메일로 보내 드릴게요.”
“괜찮아.”
“네?”
“다 외웠어.”
은후의 답변에 박훈이 순간 말을 잃었다.
“전부요?”
“네.”
박나리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은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용이 간략한 것도 아닌데 고작 잠깐 훑어본 것으로 전부 외웠다고? 그래서 이채린이 은후에게 물었다.
“선배님.”
“네.”
과제에 관한 부분들을, 그리고 미리 뽑아 놓은 예상 질문들을.
물론 은후의 답변은 막힘이 없었다.
“됐죠?”
“와, 선배, 기억력 엄청 좋으시네요?”
은후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나저나 저녁은 뭐 먹을래?”
“네?”
“과제 열심히 했으니까 저녁 정도는 사 줄게.”
“에이, 아니에요.”
“보급관 역할은 마지막까지 충실해야지. 게다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한 번밖에 못 봤는데. 점심은 내가 약속이 있어서 안 되고.”
박훈이 잠깐 머뭇거리다 은후에게 말했다.
“어, 그럼 술 어때요?”
“술?”
“네.”
“나야 괜찮은데, 다른 두 사람은요?”
박나리는 냉큼, 이채린은 잠깐 고민하다가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럼 저녁에 제가 훈이에게 문자 남겨 둘게요. 괜찮은 바가 있거든요.”
은후는 그렇게 말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쳤다.”
“뭐가?”
“기억력.”
“그건.”
차마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
“그나저나 나리 선배.”
“응?”
“해 드릴 수 있는 건 다 해 드렸으니까요.”
“뭐가?”
“선배가 가장 친해지고 싶었잖아요.”
“아, 그건 그런데.”
박나리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은후 선배랑 번호도 아직 교환 못 했죠?”
“타이밍이 안 나오더라.”
은후의 번호를 아는 건 현재 이 자리에서 박훈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박훈이 은후의 번호를 멋대로 다른 두 사람에게 알려 줄 수도 없었다. 그건 예의가 아니었으니까.
물론 그 정도는 뭐가 어떠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은후의 분위기나 태도를 고려하면.
‘충분히 불쾌해 하시겠지.’
마음대로 번호를 알려 준다면.
여기 있는 세 사람 모두가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그리고 좀, 그, 가까이 다가가기가 어렵더라고.”
“그건 저도 그런데요. 훈이야 원래 친분이 있었으니 그나마 나은 것 같지만.”
“하여간 전 최선을 다했으니까 나머진 나리 선배 몫이에요.”
“응, 힘내 볼게. 근데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하지 않았었나?”
“사귀고 있는 거라면 모를까, 아직 그건 아니라고 하셨잖아요.”
그렇게 은후가 떠난 뒤, 한동안 세 사람은 은후를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 * *
은후는 수업 시작 전에 강장원 교수를 찾았다. 며칠 전 오늘 수업 직전에 잠시 시간을 내어 달라고 미리 약속을 잡아 둔 상태였기에, 강장원 교수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은후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교수님.”
“그래요. 잘 지냈죠?”
은후가 가볍게 웃었다.
“그나저나 저번 주 수업은 빠졌던데, 무슨 일 있었어요?”
“개인적인 볼일로 영국에 좀 다녀왔거든요. 그래서 선물로 술 한 병 들고 왔습니다.”
은후가 꺼낸 건 발렌타인 30년산.
일전에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강장원이 위스키를, 개중에서도 발렌타인을 좋아한다는 걸 기억해서 고른 선물이었다.
‘시중에서 사기엔 너무 부담되어서 해외에 나갈 일이 있으면 한 병씩은 꼭 사 옵니다.’
직접 마셔도 좋고 선물로도 무난하다며 허허 웃었더라.
“뭘 이런 걸 다 가져와요.”
강장원은 교수답게 이런 선물이 익숙했다. 하지만 선물이 발렌타인 30년산인 걸 보고 다소 당황했다.
“아니.”
“괜찮으니까 받으세요.”
“면세점을 이용했어도 많이 비쌌을 텐데요.”
“그 정도 선물할 재력이 안 되었으면 차도 못 끌고 다녔을 겁니다.”
“차요?”
“아, 네. 이번에 사업이 꽤 성공했거든요.”
은후가 웃으며 다른 술 세 병을 꺼내었다. 그저 고급스럽게 포장만 되었고 따로 브랜드를 알아볼 수 없는 술병이었다.
“마시면 숙취 해소에 참 좋을 겁니다. 숙면에도 좋고요.”
“허, 혹시 그 사업이.”
근래에 애주가들이 못 구해서 안달이 난다는 환상의 술.
“담금주가 취미인데 운이 좋았습니다. 직접 드셔도 좋고 다른 분께 선물로 드려도 좋고, 자유롭게 사용해 주세요.”
“참 귀한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나저나 좀 부담스러운데요.”
궁금한 건 참 많았다. 하지만 강장원 교수는 호기심을 꾹 참았다.
“제 논문을 그렇게 도와주셨는데요.”
“고작 검수와 몇 마디 조언이었습니다.”
은후는 빙그레 웃었다.
그 검수와 조언을 위해 얼마나 강장원이 교수가 얼마나 많은 고민을 거듭하고 시간을 투자했는지 대략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부탁요? 말해 보세요.”
“오늘 수업은 좀 일이 있어서 빠져야 할 것 같아서요.”
“그건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이제 남은 건 논문을 어떻게 알리느냐입니다. 석박사 과정이었으면 간단했을 텐데요. 일단 제가 생각한 방법은…….”
* * *
강장원 교수와 이야기를 마친 후 은후는 덕진 공원으로 향했다. 그러자 언제나 그러했듯 수호령이 마중 나오진 않았다.
개굴개굴.
개구리가 마중 나왔다.
‘은후 도령, 오랜만이여?’
“말투는 또 왜 그래?”
개구리가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인간 형태로 변하며 말했다.
“한동안 도깨비 아저씨랑 어울리다 보니까, 큼큼.”
“령이는?”
“루비랑 도깨비랑 온천에서 놀고 있어.”
“언제는 아저씨고, 언제는 반말?”
개구리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어때. 따지고 보면 내가 도깨비보다 형님인데.”
“형님은 무슨, 할아버지겠지.”
“끙, 거, 대충대충 살면 되지, 되게 따진다?”
“그럴 수도 있지. 이거, 우리 개구리 양반은 선물이 필요 없나.”
은후가 가볍게 농담을 던지자, 개구리가 폴짝 뛰었다. 인간 형태였기에 그 모습이 적잖이 우스꽝스러웠다.
“선물! 뭔데?”
“비밀. 그런데 준다고는 안 했는데?”
“아, 씨.”
“아, 씨?”
“아니, 아, 씁?”
오랜만에 시답지 않은 농담을 개구리와 주고받으니 확실히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은후가 이렇게 편하게 아무 생각 없이 농담을 던질 존재는 개구리 정도였다.
“쓰, 쓰…… 씁쓸한 게 좋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아무 말 대잔치 하지 말고.”
“큼, 하여간, 뭔데?”
“저번에 먹고 싶다고 하던 외국 과자들 왕창 사 왔다.”
“오오!”
개구리가 눈빛을 반짝였다.
“령이랑 나눠 먹고?”
“거, 무슨 당연한 말씀을.”
“그리고 영국의 흙냄새가 궁금하다고 했었지.”
“어, 내가?”
“쯔쯧, 나이를 먹더니, 거, 벌써 치매가 왔나?”
은후가 낙원에 도착해서 온천에 가까이 다가가자 루비가 왈왈 짖으며 온천에서 뛰쳐나왔다.
푸드드드드득.
그리고 온몸을 털었다. 당연히 몸의 물기가 이리저리 튀었고.
‘이놈아.’
지금까지 내내 조용히 있던 성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루비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감기 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