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3화
은후는 이하연의 솔직함 속에 담긴 조심스러움에 피식 웃으며 답했다.
“불편할 게 있나.”
“있을 수도 있잖아.”
“있어도 네가 알아서 어련히 잘 편집하겠지.”
“그거야 그렇지만.”
이하연이 잠깐 망설이다 답했다.
“저번에도 정말 신경 쓴다고 썼는데.”
“그런데?”
“민폐를 끼친 건 아닌가 싶어서.”
“딱히?”
“나는 좀 신경 쓰이더라고.”
일전 덕진 공원에서의 데이트.
“그게 대체 누구냐고 문의도 엄청 오더라. 영상이 생각 외로 너무 유명해져 버려서.”
지금도 꾸준히 조회수가 올라가는 중이었다.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 유명세를 탔기 때문이다.
〈월광〉, 시간이 적잖이 흘렀음에도 세월을 뛰어넘는 명곡.
그렇기에 지금까지 각종 편곡이나 변주는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 영상에서만큼 획기적이면서도 사람들을 감탄케 할만큼의 편곡은 없었다.
게다가 음악에 미친 귀신 성호의 실력까지 더해졌으니, 언제고 유명해질 수밖에 없는 영상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은후의 정체를 무척이나 궁금해 했다.
- 일단 작곡에 뛰어난 실력이 있는 건 분명함.
- 정규 교육을 받았을까.
- 받았겠지? 안 받았을 수도 있겠지만.
- 일단 작곡에 있어서 천재는 분명함. 재능 없는 사람이 노력으로 저런 편곡을 만들어 낸다? 안타깝게도 그건 불가능하지.
이와 같은 이런저런 대중들의 추측들은 물론, 해외에서는 기사까지 났다. 물론 어디까지나 클래식에 관련된 작은 기사에 불과했고 TV 등에 나온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예전부터 느꼈는데, 은후, 너는 유명해지는 걸 그다지 달가워하는 거 같지 않았거든.”
“그래서 폐가 된 것 같다고?”
“응.”
“뭐 어때.”
은후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딱히 얼굴이 알려지거나 신상이 털린 것도 아닌데, 그 정도 유명세 정도야.”
“……그래?”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그리고 설령 유명해져도.”
은후가 잠깐 멈칫하다가 말을 고른 후 입을 열었다.
“그 유명세가 너를 위한 거라면야, 어느 정도 귀찮아도 상관없어.”
“어, 으.”
빙그레 웃으며 자신을 위해서는 상관없다고. 그렇게 말하는 은후에게 이하연이 어찌할 바를 모르며 우물쭈물했다.
“그러니까 괜찮아.”
“으응.”
“그리고 마침 잘됐네.”
“응? 뭐가?”
유명세라.
그 유명세를 이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셀리가 그냥 세상에 알리기만 한다면 된다고 했지만.’
적은 이만이라도 남편이 남긴 곡을 들어 주면 된다고. 하나 기왕이면 더 많은 사람이 들어 준다면 곡을 만든 이도 기뻐하지 않을까. 비록 그게 남의 이름을 빌린 형식이라고 할지라도.
‘그이는 자신의 곡을 듣고 즐거워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기뻐했거든요.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낀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 기쁨보다 당신과 함께하는 게 더 좋다고, 훨씬, 매우, 무척 좋다면서. 나와 함께할 수 없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했죠. 또 내가 없으면 더는 곡을 쓸 수 없을 것 같다면서.’
셀리가 그렇게 말했으니 확실하겠지.
‘하여간 남편 자랑이 대단했어.’
그렇기에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이제 한계라며 스스로 죽음을 찾아갔겠지. 남편이 남긴 유산도 누군가에게 떠넘겼고 말이다. 그건 셀리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었다.
적잖은 세월을 템스강에서 기다렸음에도 은후 외에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나타나질 않았으니까 말이다. 은후가 셀리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준 이유에는 거기에 있었다.
종을 초월한 사랑, 그에 마음이 움직여서.
솔직히 부차적으로 따라오는 곡의 권리나 명성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안 그래도 몇 가지 곡이 더 있거든. 사람들에게 공개할 곡이.”
“곡?”
“응.”
“그나저나 작곡이나 편곡이 취미였어? 몰랐네.”
은후가 잠깐 고민하다가 이하연에게 말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는데, 그건 내가 한 게 아니고, 이번에 공개할 것도 내가 만든 곡이 아니야.”
“저작권까지 등록했는데?”
“그, 큼, 아직 말 못 할 사정이 좀 있어.”
“흐응.”
이하연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합리적으로 말하자면 그냥 내가 그 곡을 편곡했고, 이번에 공개할 곡도 내가 만들었다고 네게 말하면 되었을 거야. 대중들에게 알려진 것처럼.”
그럼에도.
“근데 거짓말은 싫더라.”
“나만 아는 비밀이네?”
“사람 중에서는.”
“꼭 사람 말고 뭐가 더 있다는 뉘앙스인데?”
“뭐.”
은후가 어깨를 으쓱했다.
“됐어. 믿을게.”
“응?”
“무슨 비밀인지는 모르겠지만 딱히 나한테 해가 되는 건 아닌 거 같고.”
“그렇지?”
“게다가 애초에 날 속이거나 할 작정이면 그렇게 말할 이유도 없잖아. 진짜로 은후 네가 거짓말하기 싫어서 말해 준 것 같으니까.”
그래서 이하연은 믿기로 했다.
‘그건 그만큼 날 소중하게 생각해 준다는 증거니까.’
다만 소망하는 건.
언젠가, 은후가 감추고 있는 비밀, 알게 되었으면 좋겠다.
“다시 주제를 돌려서 말이야.”
“응.”
“글램핑이라고 알아?”
“들어봤어.”
“이번엔 글램핑으로 해 보려고. 마침 올해에 개장한 괜찮은 곳이 있다고 해서.”
일반적인 텐트 캠핑과는 많이 달랐다. 대형 텐트를 설치하고 어지간한 장비를 다 제공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침대를 비롯한 소파, TV, 에어컨 등의 기본적인 편의 시설은 물론 샤워실까지. 정말 초고급형 글램핑에선 와인 셀러와 같은 제품까지 제공하기도 했다.
“일반적인 장비로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지만.”
아버지의 취미 덕분에 어지간한 장비는 다 갖추고 있으니.
“그래도 처음엔 좀 편하게 가고 싶기도 하고. 이번에 글램핑 하면서 고민도 해 보려고.”
단발성 콘텐츠로 끝낼지 말지를 말이다.
“고민 많이 했네.”
“그치? 날짜는 어떻게 할까?”
* * *
그렇게 은후는 이하연과 글램핑에 관련된 이런저런 이야기와 날짜를 정한 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익산으로 내려왔다. 오랜만에 본가에 들른 것이다.
“아들 왔어?”
“네.”
본가에 도착하자 어머니가 은후를 마중 나왔다.
“갑자기 외국이라기에 깜짝 놀랐다.”
“그러게요.”
국내도 아니고 외국에 다녀오는 일이었기에 은후는 당연히 어머니께 말씀을 드렸다. 어머니는 굳이 이것저것 캐묻지 않고 그저 몸 조심히 다녀오라는 당부만 전했다. 예전이라면 모를까 은후가 적잖은 신뢰를 쌓은 덕분이었다.
“갔던 일은 잘 끝냈고?”
“반반이요?”
“그게 뭐니?”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어요. 그래도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수습은 잘하고 왔거든요.”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그나저나 시간 나면 가게에도 종종 놀러 오렴. 너 보고 싶다는 손님이 많더라.”
잔잔하게 웃으며 말하는 어머니의 말에 은후가 일부러 씩 웃으며 답했다.
“엄마가 보고 싶은 건 아니고?”
“얘는, 그거야 당연하지. 근데 엄마라니.”
참 오랜만에 듣는 단어인 것 같았다.
어머니라고. 그렇게 부르는 은후도 물론 좋았다. 하지만 너무 커 버린 것 같아서, 뭔가 거리가 생긴 것 같아서 내심 좀 그러했는데.
“좋네.”
“가끔 그렇게 부를게요.”
은후는 어머니를 위해 선물로 사 온 지갑을 꺼냈다.
“여기, 선물요.”
“갑자기?”
“뭔가 이유가 없어도 선물은 드릴 수 있는 거잖아요.”
“그거야 그렇다만.”
은후의 어머니는 고맙다고 말한 뒤 포장을 끌렀다.
“지갑이구나.”
“네.”
명품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은후의 어머니도 들어본 브랜드의 제품이었다.
“지갑 많이 낡으셨잖아요.”
“낡기는. 아직도 쓸 만해.”
“그래도요.”
“부담되지는 않았고? 이 브랜드, 정말 비싸다고 들었는데.”
“아들이 이제 그 정도 능력은 돼요. 원래는 백을 고를까 싶었는데.”
어머니의 백 취향을 잘 몰라서.
지갑의 경우엔 다행히 들은 적이 있었다. 지금 은후의 어머니가 쓰고 있는 지갑도 은후가 예전 선물한 것이었다. 첫 아르바이트를 했을 때 받은 월급으로 사 드렸던 지갑.
당시 어머니의 취향을 잘 몰라서 은후 자신의 판단하에 지갑을 샀다. 그조차 어머니는 고맙게 받고 소중하게, 긴 시간 동안 썼으나, 가게의 한 손님 덕분에 알게 되었다.
‘네 어머니, 장지갑은 별로 안 좋아하실 텐데.’
그리고 화려한 무늬가 들어간 지갑이 취향이라고.
‘왜, 예전에 쓰던 중지갑 있잖니. 장미 무늬 있던.’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가 언젠가 어머니에게 생일 선물이라며 사 주셨던 지갑이었다.
‘그 지갑이 진짜 마음에 든다고 했었어. 잃어버리고 한동안 끙끙 앓았는데.’
그 이후 그냥 메이커도 없는 아주 싸구려 지갑을 썼다. 그걸 보다 못한 은후가 첫 아르바이트 월급을 받았다는 이유로 지갑을 하나 사 드린 것이다.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어요.”
“……마음에 드네.”
어머니가 조용히 웃으셨다.
“아, 그리고 저번에 말씀드렸죠? 저, 차 생겼다고.”
“들었지. 갑자기 차가 생겼다고 해서 깜짝 놀랐어.”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거니 싶어서 굳이 자세히 캐묻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보여 드릴게요.”
“무슨 차를 샀길래?”
“산 건 아니고요. 선물 받은 거거든요.”
“선물?”
“네, 회사가 대박 나서요. 그래서 저도, 투자자도 이득을 많이 봤어요. 그 때문에 투자자가 회사 명의로 하나 사서 제게 줬고요. 제 개인 차로 몰라면서요.”
일부러 은후는 어머니께 자랑했다. 자식의 성공은 부모에게 있어서 기쁨이니까. 그 크기를 떠나서. 당연히 은후의 어머니는 기뻐했다.
“이 차예요.”
“비싼 차 아니니?”
“그럴걸요?”
“얘는. 네가 모는 차면서.”
“저, 차에 관심 없는 거 잘 아시잖아요. 그냥 준다길래 받았죠. 아들이 능력이 좀 있어서 이 정도 대우는 받을 자격이 있거든요.”
은후가 으스대자 어머니가 환히 웃었다.
“솔직히 사업한다고 하기에 내 걱정이 많았다. 근데 잘하고 있는 모양이구나.”
“잘해야죠. 그러니까 이번에 어머니 백 취향 좀 알려 주세요.”
“백?”
“생일 선물로 하나 사 드릴게요.”
“백은 무슨. 그냥 자주 찾아오기나 해.”
은후가 멋쩍게 웃었다.
“그리고요, 힘드시면 일 그만두셔도 돼요.”
“은후야.”
“아니요, 그만두시라는 게 아니라, 그냥 선택지가 있다는 걸 알려 드리고 싶었어요.”
“…….”
“어머니가 고생 안 하셔도 된다고요.”
“고생은 무슨.”
“굳이 가게를 확장하지 않으셔도 되고, 하셔도 되고, 그만두셔도 되고. 그냥 편하게 생각하셨으면 좋겠어요.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잠시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던 은후의 어머니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다. 그런데 네가 힘들게 번 돈으로 호강하고 싶지는 않구나.”
“그러셔도 되는데.”
“은후야.”
“……네.”
“그건 엄마가 알아서 할게.”
“네.”
“그래.”
“그래도 드리는 용돈은 거절하지 마시구요.”
“그럼.”
은후의 어머니가 웃었다.
“언제 나들이라도 한번 가요.”
“좋지. 그러고 보니 네 동생 전역이 얼마 안 남았는데, 셋이 어떠니?”
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죠. 그리고 은혁이 이야기 나와서 그러는데요, 은혁이 집은 제가 알아볼게요.”
“집?”
“복학해야죠.”
“기숙사 가면 되잖니.”
“항상 찡찡거렸잖아요. 기숙사가 좀 그렇다고.”
“그래도.”
“있는 돈 놀리면 뭐 해요. 투자도 하고 그래야죠. 안 그래도 서울에 집 한 채 정도는 마련해 둘까 싶었거든요.”
“어휴, 알았다. 네가 알아서 잘하겠지.”
이후 모자는 도란도란, 꽤 늦은 시간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쭉 이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