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2화
이하연이 은후에게 향수 선물을 받은 뒤 둘은 카페로 이동했다. 식사를 하기엔 애매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가는 길에 이하연은 무엇이 그리 신났는지 환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 그래도 너랑 가 보고 싶은 카페가 있었거든.”
“어딘데?”
이하연은 무어라 말하려다가 샐쭉이 웃으며 답했다.
“비밀.”
“그게 무슨 비밀이야.”
“흐흥, 비밀은 비밀이지.”
“곧 알게 될 건데도?”
“그때까지는 비밀이잖아?”
그렇게 시답지 않은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걸었다. 이하연이 조금 앞장서서.
‘신났네.’
이유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날 만나서.’
거기에 더불어 마음에 쏙 드는 선물도, 또 함께 가고자 하는 카페에 대한 기대감까지. 하지만 그런 이유는 어찌 되었건, 결국 모두 은후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좋네.’
나로 인해 저렇게 즐거운 감정을 느끼는 게. 그래서 은후도 덩달아 웃을 수 있었다.
“뭐야?”
“응?”
“아니, 갑자기 웃길래.”
“그냥, 보기 좋아서.”
“뭐가?”
“네가 웃는 게.”
이하연의 볼이 살짝 달아올랐다.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네. 내 마음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그래서 싫다고?”
“싫은 건 아니지만.”
“저번에 언젠가 말했잖아. 사람은 독심술사가 아니니까.”
물론 상황과 때에 따라 그럴 수도 있었다. 하물며 은후는 감정을 꿰뚫는 직감을 가졌으니까.
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도 인간관계에서 정말 중요한 일이야.”
그래.
그러는 편이 더 확실하게 와 닿기 마련이었다.
긍정적인 것도.
부정적인 것도.
“나도.”
“응?”
“나도 좋았어. 오랜만에 만나서.”
“알아.”
담담히 웃으며 답하는 은후에게 이하연이 툴툴거렸다.
“조금 전은 인간은 독심술사가 아니라면서.”
“때로는 그럴 수도 있지?”
아까와 모순되는 말에 이하연이 일부러 삐진 척하며 조금 빨리 걸어 나갔다.
‘하여간 은후는 너무 진중하다니까.’
그게 매력 포인트이기는 하지만.
‘어.’
정확히는.
‘그냥 뭘 해도.’
그래, 나중에는 모르겠다. 하지만 당장은 은후가 뭘 해도 이하연의 눈에는 그저 좋게 비치리라. 설령 눈앞에서 코를 파도 의외로 털털한 면이 있네, 그러고 말지 않을까 싶었다.
‘그것 때문에 소개팅 깨졌다고 했는데.’
친하게 지내는 몇 안 되는 친구 중 한 명이 이번에 한 소개팅이 최악이었다면서 일전에 하소연했다.
‘중간까지는 분위기 정말 좋았다고 했지.’
식사하고 영화 보고 카페에 들어가서 헤어지기 직전까지는. 하지만 서로 막 헤어지려던 찰나 화장실에 다녀오면서 본, 남자가 코를 파는 모습에 한순간에 좋았던 감정이 반대로 바뀌었다고 했다.
‘이게 콩깍지인가.’
언제부터였을까.
‘으.’
좀 된 거 같은데.
‘하기야, 그게 뭐가 중요해.’
이하연은 그러한 생각에 집중한 나머지 주위에 소홀했고, 걷다가 전봇대에 부딪힐 뻔했다. 그 찰나, 은후가 이하연의 손을 휙 잡아챘다.
“어?!”
갑작스럽게 당겨지는 자신의 몸 때문에 이하연이 화들짝 놀랐다.
“조심해야지?”
“어?”
아, 은후구나.
지금 은후의 품 안에.
“바보 아니지?”
“응? 바보?”
은후가 이하연을 품에서 떼어 놓으며 눈으로 전봇대를 가리켰다.
“방금 부딪힐 뻔한 건 알고?”
“아니, 몰라.”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다른 게 눈에 들어오지 않아서.
“에휴.”
“아하하.”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된 이하연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용기 내어 손을 은후에게 내밀며 말했다.
“손.”
“손?”
“손잡아 줘.”
“갑자기?”
“또 부딪히면 어떻게 해.”
가늘게 떨리는 손, 보통 사람이라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하지만 은후는 그런 이하연의 긴장감을 알아차렸다.
“무슨 대단한 부탁이라고 떨어.”
은후가 이하연의 손을 잡아 주었다.
“아, 안 떨었거든.”
“그렇다고 할까?”
“진짜로 안 떨었다니까.”
“그래, 그래.”
은후가 빙그레 웃으며 이하연을 이끌고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다소 진정되었으나 다른 의미로 긴장하고 있는 이하연에게 은후가 물었다.
“그런데 이 길 맞아?”
“어? 잠시만.”
이하연이 주위를 두리번두리번하더니 어색하게 말했다.
“좀 돌아가야겠는데?”
“바보.”
“칫. 그래, 나, 멍청해.”
“멍청한 건 아니고.”
“그게 그 말 아냐?”
“아니지.”
“어떻게?”
“그러니까…….”
* * *
이하연이 가려 했던 카페는 꽤 먼 거리였다. 하지만 이하연에게 있어서 그 시간은 무척 짧게 느껴졌다.
“여기야.”
“입구는 평범한데.”
이하연이 픽 웃으며 말했다.
“안쪽은 상상 이상일걸.”
“기대한다? 근데 그거 알지?”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었다. 기대가 없으면 그리 실망할 것도 없을 것도.
“어, 음. 너무 기대하지는 말고?”
이하연이 멋쩍게 웃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제 손은 놓아야 하나.’
카페에서 계속 손을 잡고 있을 순 없었으니까.
괜스레 아쉬웠다.
‘좀 더 오는 길이 길었다면.’
더 손을 오래 잡고 있을 수 있었을 텐데.
‘아인슈타인.’
문득 이하연은 카페에 들어가며 브이튜브에서 봤던 영상 하나가 떠올랐다.
상대성 원리를 정의하여 인류에게 지구를 벗어나면 시공간이 왜곡되고, 결국 우리가 평소 인지하는 공간과 시간의 인지가 무너질 수 있다는 걸 알려 준 상대성 원리를 일깨워 준 위대한 과학자.
하지만 그런 현상을 꼭 우주로 나가야만 겪을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지금, 은후와 함께하는 이 순간, 이하연이 겪고 있는 것처럼.
‘10분도 안 지난 것 같은데.’
은후를 만난 순간부터.
‘기다릴 때까지는 정말 길었는데.’
이하연은 괜스레 이유도 없이 아인슈타인이 조금은 미워졌다.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새롭고 경이로울 수 있는가. 단 한 사람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게 이하연은 너무 신기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수축하는 시간이 너무 야속했다.
“하연아?”
“어, 어어.”
“들어가야지?”
“응.”
이하연이 카페에 들어가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소중히 여기자.’
은후와 지금 함께하고 있는 이 순간을.
생생하고, 또 따뜻하고.
이런 나날이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 이런 경험들이 일상으로 변해 버려 의식하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걱정도 되지만.
‘그건 너무 멀리 생각하는 건가.’
장기 연애를 하게 되면 설렘은 빛이 바래고 정으로 함께하게 된다는데, 이처럼 두근거리는 심장도 언젠가 잔잔하게. 그저 만나는 것이 이리도 소중한데. 결국 사소함으로 변해 버리는 것은 아닐까.
‘아냐.’
내가.
“앗, 차가!”
그렇게 이어지는 이하연의 상념은 목덜미에 드리운 차가움과 함께 멈췄다.
“뭐, 뭐야?”
“아이스 아메리카노. 너무 심각하게 뭔가 생각하길래 알아서 주문해 왔어.”
카페에 들어와서 의자에 앉을 때까지 이하연은 이어지는 이런저런 상념에 다소 멍한 상태를 유지했다. 그 때문에 은후는 이하연을 자리에 앉히고 알아서 커피를 주문해 온 것이다.
“별로 안 좋아하는 거 아는데 정신 좀 차리라고.”
“어, 응.”
“이제 정신이 좀 들어? 그나저나 특이하네.”
“그치?”
이하연이 은후를 데리고 온 카페의 콘셉트는 캠핑이었다. 의자부터 시작해서 기본적인 탁자까지, 또 아예 누울 수 있도록 텐트까지 쳐 있었다.
물론 모든 구역을 캠핑용품으로 갖춘 건 아니었다. 카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의자나 테이블 또한 있었다. 그런데 그런 가구들이 캠핑용품들과 꽤 잘 어울리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가 캠핑 좋아한다고 하셨지.”
“응. 나도 종종 따라갔고. 어렸을 때 이야기지만. 그나저나 내가 그런 이야기까지 했던가?”
은후가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최근에 말한 건 아니고, 엄청 예전에. 그러니까 한창 우리가 레전드 히어로즈 했을 때?”
“아, 그때.”
“사촌 언니하고 싸웠다고 툴툴거렸던 거 말하다가 갑자기 주제가 바뀌어서.”
“그건 기억난다. 근데 진짜 너 기억력 좋다.”
“내가 한 기억력 하지.”
이하연이 커피를 쭉 마시며 미간을 찌푸렸다.
“으, 써. 난 아아 왜 마시는지 잘 모르겠더라.”
“마시다 보면 은근히 중독이야. 조각 케이크라도 하나 시킬까?”
“응, 나는 치케.”
“잠깐 기다려.”
“아니, 아니. 케이크는 내가 시키고 올게. 뭐 먹을 거야?”
“그럼 나도 같은 거로.”
은후는 이하연의 배려를 거절하지 않고 주위를 쓱 둘러봤다.
‘캠핑용품의 카페라.’
확실히 보기 드문 콘셉트의 카페이긴 했다.
‘나쁘지 않네.’
캠핑.
‘길게 비가 이어지는 시기에 령이랑 함께 어디 다녀올까.’
아니면.
‘굳이 먼 거리가 아니더라도.’
이번에 템스강으로부터 얻은 것 덕분에 조만간 좀 더 수호령의 권역이 더 넓어질 수 있을 것 같으니.
‘그러면 령이도.’
은후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이하연이 치즈 케이크를 가져왔다. 그런데 조각이 아니라 아예 한 판이었다.
“곧 있으면 밥 먹을 시간인데?”
“간식 들어가는 배는 따로 있거든.”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치즈 케이크가 어우러지며 입안에서 달콤 씁쓸함을 자아냈다.
“으, 치즈 케이크랑 먹으니까 한결 낫네.”
“달곰함과 씁쓸함의 조합은 정석이니까.”
“응응, 확실히.”
“그나저나 단순히 신기하다고 여기에 오자고 한 건 아닌 것 같은데?”
“어.”
이하연이 치즈 케이크를 조금 잘라 다시 입에 가져가려다 멈칫했다.
“어떻게 알았어?”
“그냥 왠지 모르게?”
정확히는 뭔가 말하고 싶은데, 타이밍을 어떻게 잡을까. 근질근질한 그런 이하연의 감정이 눈에 보여서 은후가 먼저 선수 쳤다.
“말하기 어려운 거야?”
“으응, 그런 건 아니고.”
이하연은 그런 은후의 말에 신기함을 느꼈다.
그러고 보면 언제나 그랬다.
‘은후는 말하지 않으면 사람은 모른다고 했지만.’
예전부터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 같아서.
‘그만큼 날 신경 써 준다는 거겠지?’
그게 너무 좋았다.
그래서 이하연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캠핑 말이야.”
“어.”
“언제 한번 같이 갈래?”
“캠핑?”
“응.”
사실 이하연은 캠핑을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아버지 덕분에 캠핑을 일찍부터 즐겨봤기에 알고 있었던 것이다. 캠핑의 다른 말은 개고생이라는 걸.
물론 그 안에 낭만이 있다는 건 알았다. 평소에 접하지 못하는 장소, 더불어 야외에서 먹는 음식에는 풍경이란 조미료가 더해지니, 소위 말하는 힐링하기엔 딱 좋지만.
‘어쨌든 고생은 고생이지.’
하나 최근 브이튜브를 운영하며 자신의 일상을 올리며 한계에 봉착했다. 은근히 올릴 만한 주제가 한정되어 있다는 걸. 사실 그렇지 않은가. 일상이 어째서 일상이겠는가.
날마다의 반복. 그사이에 변주를 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그래서 이하연은 일상의 일탈 중 하나인 캠핑을 생각해 냈다. 사실 이것도 은후가 일전에 조언해 준 것 중 하나였다.
“저번에 브이튜브 일상 콘텐츠 올릴 거 없다고 했었을 때 캠핑 어떠냐고 말해 줬었어. 스치듯 말해 준 거긴 하지만. 근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나쁘지 않겠더라고.”
이하연이 잠깐 생각하며 뺨을 긁은 뒤 입을 열었다.
“솔직히 콘텐츠도 콘텐츠인데, 그냥 너랑 같이 가 보고 싶어서. 영상 찍는 거 불편하면 안 찍어도 돼.”
직구로, 자신의 솔직함을 담아서.
“안 될까?”
“그럴 리가. 그런 부탁은 편하게 해.”
“정말?”
“그럼 거짓말이게?”
이 정도 부탁을 거절할 거라면 애초에 가까워지려고 하지 않았을 테니까.
“다행이다. 좀 걱정했거든.”
“다행은 무슨.”
은후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이하연이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