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1화
바다표범의 노래가, 성호의 연주가 어우러진 지 얼마나 지났을까. 바다표범의 모습이 서서히 변해 가기 시작했다. 계속 이어지는 노래에 맞추어서.
‘그런데 이건 노래라기보다는.’
이야기였다, 자신의.
어느 순간부터 변한 곡조, 읊조리듯 쏟아 내는 말.
‘지금 이 순간에도 만남은 있겠죠.’
그에 맞추어 성호의 연주도 변했다.
‘당신과 만나기 전엔 그저 홀로 바다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는데.’
‘그저 그것만으로도 쭉 살아갈 수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당신과 있는 게 견딜 수 없이 좋아서.’
‘그래서.’
바다표범의 목소리가 갑자기 뚝 멈췄다.
아니, 지금은 바다표범이 아닌 소녀가 되어 버린. 잔뜩 젖어 버린 모습과 창백한 표정이 너무도 쓸쓸하고 아련했다. 은후는 리어카에서 우산을 하나 꺼내어 소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말없이 소녀에게 우산을 씌워 주었다. 소녀의 입가에 조그마한 미소가 걸렸다.
“예전에 내 남편도 그랬어요.”
어느 가을이었다.
“그때도 이곳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죠.”
딱히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원래는 바다에서 노래를 부르는데 그날은 어쩌다 보니 강을 타고 이곳까지 도착했거든요. 평소에 보던 풍경과 달라서 기분이 좀 좋았던 것 같았죠.”
다만.
“예기치 못한 만남이 있었어요. 어느 순간부터 인간들은 우리의 존재를 잊고 보지도 못하게 되었는데.”
물론 목소리도.
“그래서 딱히 주위를 신경 쓰지 않았죠. 저에게 셀키냐고 묻더군요.”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등의 전설에서 등장하는 바다표범의 요정. 평소에는 바다표범의 모습으로 다니다가 땅에 발을 디디면 가족을 벗고 아름다운 인간으로 변한다는.
‘그때 가죽옷을 몰래 빼앗으면 바다로 돌아갈 수 없다고 했던가.’
은후는 언젠가 인터넷에서 보았던 셀키의 전설을 떠올렸다.
“그렇게 묻더니 지금 당신처럼 우산을 씌워 주더군요. 그날도 비가 오고 있었거든요.”
그게 셀키와 한 남자의 첫 만남이었다.
* * *
셀키는 이후 종종 템스강을 찾았다. 그 남자와 다시 한번 만나고 싶어서. 딱히 약속을 한 건 아니었기에 허탕을 치는 날도 많았다. 하지만 이따금 남자와 만날 수 있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비가 오는 날에만 남자가 셀키를 인식할 수 있었다는 것. 그래서 남자는 어느 순간부터 우산을 두 개 준비해 오기 시작했다.
또 다른 문제는 대화가 제대로 통하지 않았다는 것. 서로를 인식할 수는 있었고 만질 수도 있었으나 말은 언제나 일방통행이었다. 남자에게서 셀키에게.
“오랜만이네?”
셀키가 답했다.
“응.”
하지만 그 목소리는 남자에게 닿지 않았다.
“오늘 선생님에게 꾸지람을 들었지 뭐야. 숙제를 깜빡하고 집에다가 놓고 갔거든. 운이 나쁘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아니었네. 운이 좋은 날이었어.”
셀키가 물었다.
왜?
물론 남자에게 목소리가 닿지는 않았다. 하지만 셀키의 의아함을 알아차린 남자가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널 만날 수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운이 좋다고.
그렇게 대화가 쭉 이어졌다. 남자가 뭔가 말하고, 셀키가 표정으로 반응하고. 어느 날부터인가 이어진 우연한 만남.
“아, 내 이름은 헨리 엘가야. 넌?”
셀키가 고개를 저었다.
왜냐하면 딱히 이름은 없었으니까.
사람들은 바다표범 요정을 셀키라 부르지만, 딱히 하나의 개체만 있는 건 아니었으니.
“그럼 내가 이름 지어 줘도 될까?”
셀키가 고개를 조심스레 끄덕였다.
“셀리…… 어때?”
“좋아.”
그때부터였다.
“어?”
“응?”
서로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있게 된 건. 그리고 그날부터 비가 내리면 셀키는 항상 템스강을 찾았다. 헨리 엘가 또한.
* * *
“항상 이야기를 한 건 아니었어요. 어떨 때는 아무 말 없이 함께 템스강을 바라보기만 했죠.”
그래도.
“그냥 그것만으로도 좋았어요.”
그리고.
“그가 좋아졌죠.”
그래서 스스로 가죽옷을 내밀었다.
청혼이었다.
그때가 떠올랐는지 셀키가 조그맣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줘서 받긴 받았는데 그 의미가 뭔지 몰랐나 봐요. 나중에서야 알고 깜짝 놀라더라고요.”
싫다면, 내키지 않는다면.
“다시 줘도 된다고 했는데.”
그 이후 문제가 참 여러 가지였다. 제대로 증명할 수 없는 신분부터 가족들의 반대까지. 그럼에도 헨리 엘가는 셀리를 포기하지 않았다.
“결혼하기로 했으니까 자신이 다 책임진다면서.”
셀리가 눈동자가 과거를 뒤쫓았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제 외모가 문제가 되더라고요.”
인간과 다른 수명, 시간이 흘러도 늙지 않은 외모.
그래서 헨리 엘가는 셀리와 함께 세상으로부터 모습을 감추었다. 오로지 셀리와 함께하기 위해서. 셀리는 처음에 그건 아니라고 반대했다.
“하지만 네가 없으면 내 삶에 의미가 없다면서.”
열렬하게 고백하는 남편의 말에.
“그래서.”
한참 동안 이어진 침묵.
“하나만 부탁해도 될까요?”
헨리 엘가는 작곡가였다. 그것도 꽤 유명한 낭만주의 작곡가였다. 19세기 후반에 혜성처럼 나타났다가 짧은 기간 활동하고 사라진.
“세상에 내놓지 못한 남편의 곡을 부탁드릴게요. 대신에 그에 관련된 권리나 수익에 관해서 마음대로 하셔도 좋아요.”
셀리와 함께하면서 딱 하나, 헨리 엘가가 아쉬워했던 미련. 하지만 그 미련보다 중요한 게 함께하는 시간이라며, 헨리 엘가는 세상에 자신의 작업물을 공개하지 않았다.
만약 공개한다면 그 유명세로 어떻게든 사람들은 헨리 엘가에게 관심을 둘 것이 분명하고, 결국 본인을 포함한 아내에게 곤란한 일이 발생할 확률이 높았으니.
“솔직히 지쳤어요. 남편이 죽고 지금까지 삶을 이어 온 게.”
그럼에도 쭉 이곳을 찾은 이유는 남편의 작업물이 그대로 사그라드는 게 아쉬워서.
“남편이 죽은 후에는 누구도 제 모습을 볼 수도,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었거든요. 그래도 누군가 한 명은 만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은후는 셀리의 말로부터 대략적으로나마 한 가지 추측을 할 수 있었다. 영국에서 마법사 혹은 그와 비슷한 직업을 가진 사람이 사라진 시기는 그보다 더 이전이라는 걸.
‘템스강은 확실히 인위적인 손길이 닿아 있는 것이 분명하니까.’
은후가 속으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 부탁, 들어주시겠어요?”
“네.”
셀리가 감사의 인사를 표하며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말한 뒤 바다표범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리고 템스강에 잠수하며 모습을 감추었다.
“바다표범이 사람이 되다니 생각도 못 했네요. 하물며 바다표범과 합을 맞춰 볼 줄이야.”
성호의 감탄에 은후가 피식 웃었다.
“세상은 넓고 신비한 일은 많죠.”
이윽고 돌아온 바다표범 정령 셀리로부터 빛바랜 악보를 받을 수 있었다.
“아, 그이의 핏줄은 이미 다 사라졌으니 신경 안 쓰셔도 될 거예요.”
“이제 죽음을 찾으러 가십니까?”
셀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사라졌다.
템스강 너머로.
* * *
바다표범과 만난 날로부터 며칠 후.
은후는 쉴렌 탐정 사무소를 찾았다. 그리고 베라메라에 관련된 의뢰를 맡기고 다시 비행기를 탔다. 그사이 성호는 이번 여행에서 느낀 바가 있는지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또 작곡이려나.’
은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물끄러미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세상에 알려 달라고 했지.’
셀리의 부탁.
‘어떻게 알려야 하나.’
비행기에 타기 전 알아보니 꽤 유명한 사람이었다. 물론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했기에 유산으로 남긴 악보가 얼마만큼의 가치를 가졌는지는 미지수였다.
대단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세상에 공개했을 때 가져올 영향 또한. 그걸 은후가 판단할 수는 없었다. 성호 덕분에 이래저래 음악에 관심을 가지긴 하였으나 어디까지나 아마추어 수준이었으니까 말이다.
‘성호 씨는.’
은후가 성호를 힐끔 바라봤다.
‘한동안 저럴 것 같고.’
성호에게 조언을 구하고자 했으나 떠오른 영감이 사라진 후에 악보를 확인해 본다고 했다. 당장 자신의 감정에 새로운 무언가가 더해지길 원치 않는다면서.
‘일단 미루자.’
당장 급할 건 없었다. 셀리의 부탁에는 기한이 정해져 있지는 않았으니까. 그렇다고 하염없이 늦추는 건 좀 그렇겠지만 적당히 몇 개월, 길게는 몇 년 이내라면 뭐.
“후우.”
은후가 크게 숨을 내뱉은 후 템스강을 떠올렸다. 당장 급한 건 귀국 전 템스강에서 보고 관찰했던 부분을 연구하는 것.
‘정확히는 하고 싶은 거라고 해야 할까.’
덕진 공원, 낙원에 전주에 흐르는 영맥의 흐름을 템스강에서 봤던 느낌으로 만든다면.
‘그러니까.’
은후는 템스강에서 얻었던 지식과 자신이 이세계에서 배우고 익혔던 원리를 조합하기 시작했다.
* * *
은후는 비행기에 내린 뒤 이하연에게 전화했다. 런던에 다녀온 귀국 날에 맞추어 약속을 잡았기 때문이다.
“오랜만?”
“그러게.”
은후가 용산역에 도착하자 이하연이 마중 나와 있었다.
“런던은 잘 다녀왔어?”
“그럭저럭. 만나려던 사람은 못 만났지만.”
이하연에게 베라메라에 관한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할 수는 없었다. 그게 이하연은 못내 섭섭한 눈치였지만, 그렇다고 거짓말은 하기는 싫었다.
“기껏 영국까지 갔는데.”
“어쩔 수 없지. 미리 연락하고 간 건 아니니까.”
물론 은후가 마음만 먹는다면 그럴듯한 이야기를 지어내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거짓말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고, 이는 신뢰를 깨뜨릴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래서 탐정에게 의뢰했어. 좀 찾아 달라고.”
“탐정?”
거짓말하기는 싫다. 그렇다고 전부 말하긴 곤란하다. 은후는 이하연에게 그렇게 솔직하게 말했다. 이하연은 그런 은후의 말에 섭섭함이 어느 정도는 사라졌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언젠가 말할 수 있게 되는 날이 온다면 말해 달라고. 또 말할 수 있는 부분이라도 알려 달라고 말이다. 은후는 조심스레 알았다고 답했었다.
“어찌 되었건 한번 만나긴 해야 해서.”
“이유는 여전히 말하기 곤란하고?”
“음.”
“나쁜 일이거나 불법적인 일은 아니고? 탐정까지 고용했다니까 좀 걱정되는데.”
“그런 건 아니야. 그리고 영국에서 탐정은 합법이거든.”
은후의 말에 이하연의 눈빛이 반짝였다. 은후는 피식 웃으며 자신이 알고 있는 탐정에 관한 이야기를 적당히 늘어놓았다.
“실제로 탐정이 있구나. 만화나 영화에서만 있는 사람들인 줄 알았는데. 그나저나 탐정도 꽤 극한 직업이겠는데.”
“흔히 사람들이 상상하는 낭만적인 직업은 절대 아니지.”
“그나저나 영국은 어땠어? 관광은 좀 했고?”
“관광은 그다지 못 했고.”
받은 인상은.
“꽤 낭만적인 곳이었어. 그리고 흐릿했고. 가 본 곳은 런던밖에 없으니까 런던에서 받은 인상이라고 봐야겠지만.”
“하기야, 우리나라도 지역마다 특색이 다르니까.”
바다표범 정령인 셀키에 관한 이야기도 언젠가 해 줄 날이 올까.
“그나저나 여기 선물.”
“응?”
은후는 면세점에서 이하연에게 줄 선물로 산 향수를 내밀었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에 이하연이 잠깐 당황했다.
“받아.”
향수의 경우에 선물하기 무난한 제품이긴 했다. 하지만 당사자의 취향을 모르면 고르기 꽤 어려웠다. 막상 선물로 받아도 향이 잘 맞지 않으면 장식품으로 전락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은후는 그런 걱정도, 망설임도 없이 바로 면세점에서 제품을 고를 수 있었다. 예전에 향수에 관하여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거 되게 마음에 드는 향수였다며? 가격대가 비싸서 부담스럽다고 했던 것 같은데.”
“응. 그랬지.”
“면세점이 확실히 싸더라.”
“……잘 쓸게.”
언젠가 이런저런 대화하며 스치듯 했던 말이었는데.
‘그 말을 기억하고 있었구나.’
이하연이 적잖이 감격하며 조심스레 은후의 선물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