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0화
새벽빛이 가득 담긴 공기가 은후의 뺨을 스쳐 지나갔다. 하늘에 떠 올라 있는 달은 무엇이 부끄러운지 구름에 얼굴을 감췄고, 사람들이 과학으로 자아낸 반짝임이 은은하게 대지를 밝히고 있었다.
‘저어.’
성호가 손이 근질거리는 듯 은후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은후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기타 연주라면 이따가 마음껏 하게 해 줄게요.’
‘큼.’
애초에 성호의 태생부터 시작하여 귀신이 될 정도의 집념을 알고 있기에 은후는 어깨를 으쓱이면서 잘 타일렀다.
“때로는 참는 것도 도움이 되죠.”
갑갑함을 비롯하여 음악의 욕구를 어느 정도 억누르면 그만큼 모여 더욱 튀어 오르기 마련이니.
“완전히 일어서지 못할 정도만 아니라면요. 그러니 때때로 참는 연습을 해 보세요. 한국에 있을 때는 나름 잘 참으시는 것 같더니.”
“낄 때와 빠질 때를 구분하는 건 중요하잖아요?”
그런데 이곳에서는 딱히 눈치 볼 이들이 없어서 다소 힘들다고.
“게다가 이처럼 멋진 풍경을 두고 가만히 있으라는 건, 조금.”
아까와 다르게 마나를 통한 대화가 아니었기에 성호의 목소리는 허공을 너울거렸다. 은후는 그 모습에 내심 고개를 주억거리며 성호에게 충고했다.
“앞으로는 좀 더 말하는 걸 조심하셔야 할 거예요.”
“네?”
“예전에는 성호 씨의 목소리가 잘 안 들리거나, 혹은 들려도 사람이 내는 말로 들리진 않았을 거예요.”
바람이 스치는 듯한 그런 소리로 들렸을 터.
하나.
“지금은 아니란 말씀이신가요?”
“네.”
그만큼 성호가 성장했기에.
“마나에 민감한 사람이라면 성호 씨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도 있을 거예요.”
“오호.”
“되도록이면 그냥 예전에 알려 준 대로 마나만으로 대화한다면 실수할 일은 없겠지만.”
은후가 쓰게 웃으며 물었다.
“솔직히 갑갑하죠? 마나를 통한 의지로 대화를 하는 건.”
그건 사람이 정령이 되는 순간 가지게 되는 일종의 본능이었다. 태어나기를 애초에 정령으로 태어났다면 모를까.
“조심할게요.”
“네, 항상 염두에 두세요.”
뭐.
‘솔직히 작정하고 말을 거는 게 아니라면.’
크게 문제 될 건 없겠지만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느닷없이 갑자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허공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면 보통은 착각이겠거니 생각하는 게 평범한 반응이니까. 계속해서 말을 걸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도착했나.’
은후가 목적지로 삼았던 런던 근교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븐에.
“산책 좀 하다가 일단 식사라도 하죠.”
아무리 빨리 여는 가게라도 이제 막 장사 준비하고 있는 시간이었다. 은후는 일단 근처를 가볍게 걸었다. 런던으로 온 목적인 베라메라를 찾으며.
은후가 무작정 와서 온 이유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머물고 있는 장소와 노숙자라는 것. 게다가 베라메라는 한 가지 신체적 특징이 뚜렷하다고 했다.
‘어렸을 적 사고 때문에 오른쪽 다리에 큰 상처가 있다고 했어.’
조금 발품을 판다면 금세 찾을 수 있을 거로 판단했다.
‘여기가 노숙자가 그리 많은 동네도 아니고.’
정확한 숫자까지는 모르겠지만 이 작은 동네에 정말 많이 잡아도 100명은 넘지 않을 터.
“실례하겠습니다.”
“뉘슈?”
은후는 싱긋 웃으며 전형적인 노숙자로 보이는 수염이 덥수룩한 한 사내에게 말했다.
“묻고 싶은 게 좀 있는데요.”
귀찮다는 표정을 짓던 노숙자는 은후가 내미는 5파운드권 지폐 한 장에 냉큼 손을 뻗었다. 노숙자가 지폐를 가져가려고 했다. 하지만 은후가 지폐에서 손을 놓지 않았다.
“질문도 듣기 전에 가져가시면 안 되죠.”
“말해 보쇼.”
“오른쪽 다리에 큰 상처가 난 노숙자, 혹시 아시나요?”
“……그 노숙자는 왜?”
알고 있구나.
은후는 피식 웃으며 지폐를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을 풀며 말을 이었다.
“빚이 있어서요.”
“으잉?”
은후의 말에 노숙자의 눈에 어렸던 경계심이 사그라들고 의아함이 찾아왔다.
“빚이 있어서 좀 갚으려고요.”
“메라한테?”
“이름이 메라였군요.”
“이름도 모르고 사람을 찾아? 근데 자네 말을 어떻게 믿나.”
은후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나쁜 일로 왔으면 이렇게 대놓고 찾진 않았겠죠.”
“큼.”
노숙자가 지폐를 품 안에 넣은 뒤 입을 열었다.
“근데 지금은 없어.”
“네?”
“떠났거든. 스토커 때문에.”
“스토커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은후가 살짝 당황했다.
“그놈이 좀 잘생겼잖나.”
“어, 네.”
“정신 나간 년이 하나 쫓아다니기 시작했거든. 한 3개월 전부터인가? 그 스토커 년 피해서 도망갔어.”
“어디로요?”
“그걸 내가 어케 알아.”
노숙자가 은후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혀를 찼다.
“쯧, 자네는 그런 경험 없나?”
“네.”
“운이 좋았군. 여자, 아니, 사람들 조심해. 메라가 고생하는 이유가 다 얼굴 때문이니까. 스토커도 그렇고, 저번에는 어떤 인종차별 하는 놈이 메라한테 염산 테러까지 했었다니까? 단순히 흑인이고 얼굴 반반한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노숙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을 이었다.
“내가 메라였으면 그냥 여자 하나 잘 잡아서 인생 폈을 것 같은데. 하여간 난 내가 아는 거 알려 줬수다?”
노숙자는 그렇게 말한 뒤 등을 돌리고 사라졌다.
그나저나 흑인이라.
‘위키에는 없던 정보야.’
적어도 한국어로 된 위키에는.
‘그리고 내년까지는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븐에 쭉 머물렀다고 했는데.’
영어로 된 위키를 읽었다면 좀 더 자세하고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을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
은후가 속으로 피식 웃었다.
‘뭐.’
이럴 경우를 상정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위키라고 할지라도 항상 옳은 정보만 있는 건 아니란 걸 은후는 잘 알았다.
‘어떻게 하실 거예요?’
‘탐정을 고용하려고요.’
성호의 질문에 은후가 답했다.
‘탐정요?’
‘네.’
‘직접 찾기엔 제가 영국에 오래 머물 처지는 아니잖아요? 제 생활도 있으니.’
탐정, 의뢰를 받아 각종 사건 및 사고에 관한 정보를 조사하는 민간인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불법이지만 대다수의 나라에서는 합법이었다.
‘우리나라도 시간이 흘러서 합법화되고.’
영국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일단 탐정을 찾아가 볼까.’
탐정을 찾아간다는 말에 성호의 눈이 반짝였다. 뭔가 기대를 잔뜩 하는 모양이었기에 은후는 무어라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벌써 기대를 깰 필요는 없으니.’
영화나 만화 등에서 묘사되는 탐정의 추리 쇼 같은 건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보면 되었다. 실제로 살인 사건에 탐정이 얽히는 경우가 무척이나 드물었다.
현대에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공권력이 높아지면서 자연스레 그렇게 되었다. 그나마 영화의 탐정과 가장 비슷한 역할이라면 회사의 돈을 횡령하는 증거를 찾는다거나.
‘정치와 엮여서 누군가의 약점을 캐낸다거나.’
딱 그 정도에 불과했다.
은후는 일단 런던으로 돌아와 어떤 탐정에게 의뢰할까 정보를 수집하기로 했다. 고작 사람 하나를 찾는 일이었다. 게다가 원한 관계도 아니었다. 그래서 양지에서 버젓이 광고하는 탐정에게 의뢰하고 싶었다.
그런 탐정 사무소가 있었다. 한국에서 미리 조사하면서 봤던 몇몇 탐정 사무소의 이름이 신문 광고에도 실려 있었다. 은후는 이후 현지인에게 실제로 수소문하고 다녔다.
“그 탐정 사무소? 꽤 오래되었지?”
잘생긴 얼굴과 일부러 약간의 매혹 효과를 담아 뿜어내는 마나 덕분에 은후의 조사는 순조로웠다.
“케이트 양이라면 여기서 은근히 유명하죠. 경찰들이랑 친하다는 건 아는 사람은 다 알죠.”
“말로 사무소라면 불륜 전문으로 아는데.”
그날은 그렇게 해가 질 때까지 사람들로부터 런던의 양지에 있는 탐정들의 정보를 수집했다.
‘이 정도면 되었나.’
슬슬 저녁을 먹으면 될 것 같은데.
‘응?’
툭, 툭.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오후 언젠가부터 안개가 끼고 날씨가 흐리긴 했었다.
‘그런데 비가 내려?’
하지만 은후는 딱히 비가 올 거라고 예상하지 않았다. 런던의 날씨가 변덕스러운 것이야 워낙 유명했고, 은후의 감각은 적어도 날씨에 관련해서는 현대의 과학기술을 초월한 지 오래였다.
‘신문에서 오늘 비가 내릴 확률이 높다고 했어.’
하지만 은후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왜?’
그냥 아예 무심했다면 모르겠다. 하지만 신문의 기상 예보를 보고 은후는 날씨를 짐작했다. 그리고 비가 오지 않을 거로 여겼다. 그 점이 은후는 찝찝하기 그지없었다.
‘실수……라고 볼 수 있나?’
물론 은후도 사람이었으니 실수를 할 때도 있었다. 여전히 은후는 인간이었고 완전할 수 없는 존재였으니, 보통 사람에 비하여 한없이 완벽에 가까울 뿐.
‘아.’
비가, 템스강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영맥이었어.’
템스강 자체가.
‘철저하게 숨겨져 있었네.’
그래서 몰랐다.
마음먹고 조사하거나 하다못해 직접 강에 손을 뻗었다면 또 몰랐겠지만, 지금에서야 은후가 눈치챌 수 있었던 건 전부 비 때문이었다. 빗방울이 강과 만나면서 은폐되어 있던 마나의 흐름이 삐져나왔다.
‘나 참, 날씨를 잘못 예측한 것도 전부 이 때문이었나.’
알고 나서 영맥의 흐름을 느끼며 뒤쫓다 보니 알 수 있었다. 아마도 런던 전체가, 혹은 그 이상의 지역까지 마법사의 감각을 교란시키고 있다는 걸.
‘마법사뿐만 아니라 마나를 다룰 수 있는 자라면 모두 그럴 거야.’
은후조차 처음에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참으로 교묘했다.
‘이건 배울 가치가 있겠는데.’
현대에 마법사가. 그것도 무척이나 뛰어난 마법사가 만든 하나의 작품이라고 느꼈다.
‘아마 개인이 아닌 어떤 단체, 거기에 적잖은 세월을 투자해서 만든 일종의 결계, 라고 하기엔 좀 그렇고. 무어라 말을 해야 할까.’
그렇게 은후는 한동안 비를 맞으며 템스강을 바라봤다. 그때 은은하게 템스강 어딘가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은후 씨.’
‘네.’
‘제가 잘못 듣고 있는 건 아니죠? 귀신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 같은데요.’
‘저도 들립니다.’
은후가 잠깐 고민하다가 성호의 간절한 눈초리에 노래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예기치 못한 템스강의 비밀을 좀 더 관찰하고 싶었지만, 그거야 이제는 언제 해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모르고 있었다면 모를까 이제는 알았으니. 거기에 갑작스럽게 들리기 시작한 노래를 어떤 귀신이 부르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귀신이 아니었다.
‘표, 표범이네요?’
정확히는 바다표범이었다.
‘평범한 바다표범이 아니야.’
몸 전체가 마나로 이루어진 것을 보아하니 일종의 정령이라고 봐야 할 것 같았다. 애초에 평범한 바다표범이었다면 영어로 된 인간의 목소리를 내는 것부터가 불가능했다.
바다표범은 은후와 성호가 가까이 다가갔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노래를 이어 나갔다. 성호는 잠깐 머뭇거리다 은후에게 물었다. 기타를 쳐도 되겠느냐고.
‘저 슬픔에 빠지고 싶어요.’
은후가 허락하자 성호가 기타를 치기 시작했다. 이윽고 성호가 치는 기타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바다표범의 노래와 어우러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바다표범이 반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일 뿐, 계속해서 노래를 이어 나갔다. 성호가 치는 기타 소리와 함께. 슬프고 또 슬픈 감정이 담긴 노래였다. 무엇이 그리도 슬퍼서 저리 절규하듯 노래를 부르는 것일까.
‘네가 죽은 뒤로부터 하늘과 땅은 항상 어둡고 태양조차 빛이 변했다, 라.’
그렇게 은후라는 오직 한 사람만의 청중만을 두고 바다표범의 노래와 성호의 연주는 계속해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