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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의 인생 룰루랄라-89화 (89/170)

제89화

낡은 상자를 찢은 종이 뒤에 있는 건 날카로운 선을 가진 중년의 사내였다. 옷차림은 청바지와 하얀 셔츠에다가 얇은 카디건. 평범한 것 같지만 색의 조화가 사내의 모습을 퍽 자연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한 판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짧은 단답.

“여기.”

은후가 내미는 5파운드 지폐를 묵묵히 건네받았다.

“무슨 색으로 하시겠습니까?”

체스는 백이 선수였다. 그리고 이런 보드게임이 거의 그러하듯 선수가 아주 조금은 유리하기 마련이었다.

“흑으로 하죠.”

은후의 대답에 중년 사내의 눈에 약간의 이채가 스쳤다. 이후 따로 어떤 대화도 없이 그저 기물을 서로 옮기기 시작했다.

‘제법.’

은후는 현대의 체스가 어느 수준에 도달했는지는 잘 몰랐다. 은후가 체스를 배우고 즐기게 된 건 이세계에서 마법사가 된 이후였으니까. 가벼운 두뇌 트레이닝이나 적당한 유흥을 목적으로 말이다.

‘재미가 없는 세상이긴 했어.’

현대와 다르게 즐길 거리가 그다지 없는 세계. 그래서 은후는 영향력을 가지게 된 이후 기억하고 있던 현대의 몇몇 보드게임을 유행시키기도 했다.

‘돈이 필요했으니까.’

마법 연구에.

‘그나저나.’

무엇이 이리도 필사적일까.

‘딱히 돈이 필요해서 여기에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중년 사내는 기물 하나를 옮길 때마다 아릿한 감정을 담았다.

“무얼 그리 찾고 있으십니까?”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뭔가 찾고 싶어서 이 자리를 만들기는 했지만요.”

결말은 쉽게 났다.

은후가 상대를 전혀 봐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은후는 적어도 이런 승부에 있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예의라고 여겼다. 그래서 압도적으로 찍어눌렀다.

“감사합니다.”

사내는 은후에게 종이에 쓰여 있던 대로 10파운드를 주었다.

“저어.”

“네.”

“식사는 하셨겠군요.”

“그렇죠? 시간이 시간이니.”

사내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은후에게 물었다.

“술은 어떠십니까?”

“나쁘지 않죠.”

사내가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섰다.

* * *

은후가 체스를 한 판 둔 건 그저 변덕이었다. 문득 이세계에서의 옛 생각이 떠올라서. 그리고 사내에게 질문을 던진 이유도 비슷했다. 일종의 변덕.

사내의 감정이 궁금하기는 했지만 굳이 꼭 알아야 하겠다는 감정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사내에게는 다르게 다가왔다. 체스를 두면서 자신에게 그런 질문을 던진 사람은 처음이었다.

‘분명히 아까 대체 왜 거기에서 그러고 있느냐고 했어.’

그런 목적을 물었다.

‘체스를 두기 위해서 거기 있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친한 친구도 딱 거기까지였다.

그런데 처음 보는 동양의 젊은 청년이 자신의 마음을 꿰뚫었다. 그래서 나름 적잖은 용기를 내어 자신의 집에 초대했다.

“시간이 애매해서요. 늦게까지 여는 술집이 별로 없거든요.”

우리나라와 다르게 영국을 비롯한 서양권의 술집은 대개 10시에서 11시면 닫았다.

“타시죠. 여기에서 조금 거리가 있어서요.”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사내가 자신의 차에 은후를 태우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사내의 집은 런던의 중심부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 있는 단독 주택이었다. 도착하자마자 한 여성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마중 나왔다.

“왔, 응?”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전형적인 금발과 푸른 눈의 미인이었다.

“누구?”

“그, 음.”

사내가 머뭇거리며 말을 골랐다.

“자기야?”

은후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템스강에서 우연히 만난 인연입니다. 체스를 함께 두었는데 술 한잔하자며 초대하시기에 따라왔습니다. 혹 폐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어머, 아녜요. 이 사람이 누군가를 집에 데리고 오는 건 너무 오랜만이라서요.”

은후의 자연스러운 영어와 정중한 태도에 여인의 경계심이 약간 누그러졌다.

“일단 들어오세요.”

은후가 안내받은 주방의 식탁 의자에 앉았다. 자연스레 근처에 있는 장식장이 눈에 들어왔다. 장식장에는 이런저런 술들이 빼곡하게 차 있었다.

“술을 꽤 즐기시는가 봐요?”

“네.”

사내의 짧은 답에 여인이 말했다.

“무뚝뚝하기는. 당신이 초대했으면 좀 살갑게 대해야지.”

“그럼 당신이 서운해 하지 않을까.”

사내의 말에 여인의 눈이 가늘게 휘었다.

“당신 그러는 거 하루 이틀도 아닌데. 그리고 오늘은 봐줄게.”

“응.”

두 사람의 정다운 대화에 은후도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저어, 혹시 선호하시는 술 있으실까요?”

“조니워커 블랙라벨 12년산으로 부탁드립니다.”

“좋은 술이죠.”

“동감입니다.”

조니워커라는 브랜드를 대표하는 위스키. 왕실 보증서까지 받았으며 비슷한 12년급 브랜드 중에서도 균형이 잘 잡혔다는 평가를 받는 술이었다.

“개인적으로는 훈연 향이 마음에 드는데 아내는 싫어하더라고요.”

“아무래도 그 부분은 취향이 좀 갈리기 마련이니까요.”

술이 조금 들어가고 아내의 당부까지 있어서였을까. 처음 대화를 나누었을 때보다 훨씬 더 사내는 부드럽게 말을 이어 갔다.

“처음이었습니다. 그런 질문요.”

무얼 찾고 있느냐.

“그래서 그냥 대화를 나누고 싶었어요.”

사내는 조용히 자신의 상황을 늘어놓았다. 직업이 작가라는 것. 약 2년 전부터 슬럼프 때문에 글을 거의 쓸 수 없었다는 것 등등.

“친구들이나 아내는 그냥 푹 쉬라고 하더군요.”

그간 너무 열심히 글에 매달렸으니까.

“저도 느끼는 게 있어서 그냥 쉬었습니다. 하지만 1년 정도 지나자 슬슬 글을 써야 한다는 압박감이 찾아왔어요.”

말이 작가지 글을 쓰지 않으면 백수와 무엇이 다르랴.

“아내도 일은 하고 있고 인세 덕분에 먹고살 걱정은 안 하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일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생각이 든 이후로도 쭉 여전히 글을 쓸 수가 없더라고요.”

이후 그냥 이것저것 마구잡이로 해 보고 있다고. 템스강에서 내기 체스를 한 것도 슬럼프를 극복하기 위한 일환 중 하나라고 했다.

“승패에 집착하지 않는 것 같았는데 묘하게 필사적이라고 느꼈거든요. 지금도 그러시는 것 같은데.”

“네, 언제나 물소리가 들리는 것 같달까요. 물결이 계속 몰아친다고 해야 하나.”

어느새 뒤에서 간단한 안주를 준비한 사내의 아내가 다가와 입을 열었다.

“평생을 같이 지냈지만 이이가 말하는 걸 아직도 잘 모를 때가 많다니까요.”

“평생이요?”

“소꿉친구였거든요. 처음엔 정말 많이 싸웠는데.”

“그랬나?”

“그랬거든. 모른 척하기는.”

사내가 멋쩍게 웃은 후 은후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제 이야기만 한 것 같은데. 런던은 무슨 일로 오셨나요?”

“만날 사람이 있어서요.”

“사업차 오셨으려나요?”

“사업은 아니고요.”

무어라 말을 해야 할까.

정확한 사정을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거짓말하긴 싫었기에 은후는 자신의 사정을 한 마디로 줄였다.

“빚을 좀 갚으려고요.”

“빚이라.”

은후가 빙그레 웃으며 주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슬럼프라고 하셨죠.”

“네.”

“기존 작품에서 막힌 건가요, 아니면 새로운 작품을 쓸 수 없다는 건가요?”

“아.”

생각지도 못한 말에 사내가 잠시 멈칫했다.

“새로운 작품을 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기존 작품이라고 하셨죠. 그렇군요. 그럴 수도 있었어요.”

오랫동안 이어진 슬럼프를 어떻게든 극복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야가 좁아져서 미처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었다.

“기존 작품은 어떨까요.”

“네?”

“외전이라든가, 후일담이라든가. 형식은 여러 가지가 있으니까요. 그런 시도는 안 해 보셨나요?”

“……네.”

사내는 은후의 조언에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쓸 이야기가 생각이 났어요. 그 이야기는 왠지 쓸 수 있을 것 같네요.”

“다행입니다.”

은후가 빙그레 웃었다.

“그래서 그런데, 저, 큼.”

“손이 근질거리시는 것 같은데요. 술자리는 이만 끝낼까요?”

사내가 고개를 꾸벅 숙인 후 위층으로 사라졌다. 약간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던 사내의 아내가 한숨을 내쉬며 은후에게 다가와 말했다.

“미안해요. 저이가 좀 괴팍한 면이 있어요.”

“괜찮습니다. 이해를 못 하는 것도 아니고요.”

딱히 은후가 작가인 건 아니었다. 하지만 마법사로서 무언가 연구하다 보면 때때로 비슷한 감정을 느낄 때가 종종 있었다. 아무리 은후가 마법사로서 위대한 경지에 올랐다지만 말이다.

“그럼 저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손님방도 있는데 주무시고 가시지 그러세요? 시간도 많이 늦었는데요. 저이도 내일이면 아마 좀, 어.”

말을 하다 만 여인에게 은후가 고개를 저으며 피식 웃었다.

“밤을 새우시지 않을까요?”

차마 아니라고 여인은 대답할 수 없었다.

“술 맛있게 마셨다고 전해 주세요.”

“저, 이름과 연락처라도.”

“인연이 된다면 또 어디선가 만나겠죠.”

“밤늦게 돌아다니시면 위험하실 텐데요. 이 근처에 딱히 호텔도 없을 텐데. 택시비도 엄청 비싸게 나올 거고요.”

은후는 잔잔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숙인 후 사내의 자택을 벗어났다. 주택 단지가 모여 있는 곳이라 그런지 드문드문 있는 가로등만이 은후를 반겨 주었다.

‘그냥 묵는 게 낫지 않았을까요?’

‘불편해서요.’

옆에서 잠자코 있었던 성호의 질문에 은후가 답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무작정 빚을 갚으러 왔다고 하면 이상하게 바라볼 터인데.

‘걸으면서, 아니, 날아가면서 천천히 고민해볼까.’

은후가 주위를 살핀 뒤 은폐 마법을 펼쳤다. 그리고 하늘을 날아올랐다.

* * *

은후가 집을 나서자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아서 사내의 아내가 뛰쳐나왔다.

“어?”

하지만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은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체.’

그 잠깐 사이에 어디로.

‘어우.’

위층에서 작업하고 있는 남편에게 은후가 떠났다는 사실을 말할 수도 없었다. 한창 글을 쓰고 있는 도중일 터이니 방해가 될 테니까.

‘왜 안 붙잡았냐고 좀 화낼 것 같은데.’

하지만 그런 여인의 예상은 빗나갔다.

여전히 싸늘한 공기를 마시며 태양이 나타날 무렵, 사내가 목이 말라 주방을 찾았을 때 여인은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일찍 일어났네?”

“응, 조금만 기다려. 아침 준비해 줄게.”

“그 사람은?”

“떠났어.”

아내의 말에 사내가 피식 웃었다.

“하룻밤 자고 가라고 했는데 그냥 가더라고. 시간도 많이 늦었었는데.”

“그런가.”

“화 안 내?”

“내가 왜?”

“아니.”

“하루 묵고 가라고 했었다며. 거절한 건 그 사람인데. 그리고 왠지 어울리지 않아?”

떠올려 보면 참 신비로운 만남이었다.

‘며칠이라도 지난 것 같단 말이지.’

고작 몇 시간 전의 만남인데.

“그나저나 이름도 못 들었네.”

“물어봤는데 안 알려 주더라. 인연이 된다면 또 만날 수 있을 거라나?”

“그때는 알려 줄까?”

“이름?”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이 피식 웃으며 조심스레 남편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글은 좀 어때?”

“나쁘지 않아. 안 그래도 저번 작품 뒷이야기가 좀 더 있으면 좋겠다는 사람들 많았는데, 잘됐지.”

사내는 영미권에서 제법 유명한 SF 및 판타지 작가이자 각본가였다.

“그 사람 모티브로 에피소드 하나 쓰고 있어.”

“<겨울과 가을의 향연> 말이야?”

“어.”

“독자들, 난리 나겠네.”

“난리는 무슨, 완결된 지가 언젠데.”

“그래도 기다리는 사람 많을걸? 게다가 드라마 다음 시즌도 슬슬 방영 예정이잖아. 이번에 쓰는 것도 드라마로 제작되려나.”

사내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면 그것도 재밌겠네. 인기 없어서 그대로 시즌 종료되는 게 아니라면야, 제작되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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