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8화
물놀이 후 먹는 라면은 역시 진리였다.
“맛있죠?”
“그러게요.”
도깨비는 물놀이하다가 구미호가 보고 싶다며 씩 웃은 뒤 사라졌다. 조만간 어떻게든 온천 크기를 늘리고 구역을 나눠야겠다고 중얼거리면서.
‘거, 임자랑 들어오면 딱 좋을 것 같은데. 온천이라. 흐흐, 옛날 생각 나는구만.’
수호령은 페럿과 쌔근쌔근 잠을 자고 있었다. 그 옆에서 서연후가 이따금 수호령과 페럿을 바라보며 다이어리에 뭔가를 끄적였다.
‘글을 좀 써 보려고요.’
무얼 쓰는지 물었으나 아직은 말하기 부끄럽다며 웃으며 얼버무렸다.
‘다음에 말할게요.’
참새와는 어느새 제일 친해진 모양이었다. 수호령과 친해질 줄 알았는데 꽤 의외였다. 아마도 벌레를 다루는 능력과 연관이 있는 것 같았다.
‘아니면 능력이 발전했거나.’
혹은 처음부터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거나.
‘또는.’
성호가 은후에게 물었다.
“또 마법 생각하고 있죠?”
“티 났어요?”
“조금? 정확히는 느꼈죠. 저와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아.”
“마스터도…….”
은후가 째려보자, 성호가 헛기침한 뒤 입을 열었다.
“큼큼, 은후 씨도 사람이긴 한가 봐요.”
“그럼 사람이지 정령이겠어요. 여기서 사람이라곤 저밖에 없는데요?”
“그런 게 아니라 뭐랄까. 가까이 있다 보면 사람이 아닌 것 같아 보인달까요.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때때로 좀 두렵죠.”
“두렵다뇨?”
“갑자기 사라질까 봐. 그런 느낌이 들거든요. 은후 씨를 바라보고 있으면요.”
그냥 느닷없이.
“적당한 이유만 있어도. 예컨대 갑자기 나폴리에 피자가 먹고 싶다는 이유만으로도 훌훌 멀리 떠나갈 것 같달까요. 특히 령이가 그래요. 알게 모르게 떤다고 해야 하나. 티를 안 내려고 애쓰는 것 같지만요.”
그러다가 수호령은 이렇게 말했다고.
‘내가 여기에서 맑고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지 않으면 안 돼.’
그래야 은후가 돌아올 곳이 있을 테니까.
“생각이 깊죠?”
은후가 쓰게 웃으며 답했다.
“그러게요. 그래도 그럴 걱정은 안 해도 될걸요. 떠도는 건 이미 지쳐서.”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고작 갓 대학을 졸업할 나이였다. 상식적으로나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말. 하나 성호는 은후의 말에서 깊은 쓸쓸함을 느꼈다. 은후와 연결되어 있었기에 더더욱.
‘어디를 그렇게 돌아다녔으려나.’
호기심이 일었으나 굳이 묻지 않고 기타를 들었다. 미묘하게 아른거리는 환상을 붙잡기 위하여. 그건 은후가 추억하는 이세계에서의 감정들이었다.
“오늘 밤에 런던으로 간다고 하셨죠?”
“네.”
오전에 약속 하나 처리하고 바로 인천 공항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저도 따라가도 될까요?”
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한참 동안 기타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 * *
오전의 약속은 다름 아닌 땅 구입에 관련된 일이었다. 일전에 집을 짓기로 한 전주의 남쪽 석구동. 어차피 사기로 마음먹었기에 근처까지 몽땅 사들이기로 했다.
공인중개사는 일전 카페 루디엠의 사장 김현석으로부터 소개받았다. 김현석을 만나면서 떠올린 기억의 한 조각. 김현석의 친구 중 전주에서 잘 나가는 공인중개사가 있다고 했었다.
‘소개야 어렵지 않지. 그런데 땅이라니, 돈 많이 벌었나 보다?’
‘네.’
‘어린 나이에 성공했네? 이번 달 말에 술은 네가 사는 거다?’
‘그럼요.’
질투나 시기 없이 순수한 감탄과 대견스럽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김현석의 표정에 은후는 피식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김현석을 인간적으로 좋아했던 것 같았다. 마법사가 되기 전에도 그런 김현석의 됨됨이를 본능적으로 알아서.
“현석이가 이런 소개 잘 안 하는 애인데, 연락받고 깜짝 놀랐다니까요?”
공인중개사 박학서와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으며 업무적인 이야기를 진행했다.
“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아는 사람에게 소개받았다고 하여 은후는 딱히 중개 수수료를 깎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정도 알아보고 왔는지, 말하는 것도 논리적이었으며 막힘이 없었다. 그 부분이 박학서는 썩 마음에 들었다.
‘거참, 몇 살이려나.’
참 젊어 보이는데.
‘끙, BMW 5시리즈, 부럽네. 지를까. 차 바꿀 때가 되긴 했는데 말이지.’
박학서를 뒤로하고 은후는 차를 몰고 전주역으로 향했다. 출근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적잖은 차가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이 부근은 새벽에도 적잖은 차가 오고 가는 곳이었던 것 같은데.
‘잠시라도 쉴 틈이 없겠지.’
도로는.
약하게 낀 안개 때문일까.
왠지 모르게 감성적으로 된 은후는 속으로 피식 웃으며 광명역으로 향하는 KTX에 올라탔다.
‘기차를 타니까 정말 여행하는 느낌이 나네요.’
전주에서 인천 공항을 가는 방법은 크게 둘이었다. 버스를 타거나, 혹은 기차를 타거나. 다만 후자의 경우에 광명역에서 내려 다시 한번 버스를 타야 했다. 애초부터 버스를 타면 직행할 수 있었지만.
‘버스는 영.’
기차가 좋았다.
성호가 말하는 대로 여행하는 느낌을 내기도 좋았고.
‘흐흐우하하흠.’
은후가 딱히 대꾸하지 않자 성호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기타를 튕기기 시작했다. 음이 어지러이 얽히며 제대로 된 음이 아닌 것이 뭔가 또 새로운 곡을 만드는 모양이었다.
‘조만간 또 몰아서 저작권 등록을 해야겠네.’
성호의 곡은 대부분 은후의 이름으로 저작권이 등록된 상태였다. 이 부분에 관해선 은후도 성호도 별 거리낌이 없었다. 어차피 성호는 은후가 아니었다면 지금까지 존재할 수 없는 귀신이었으니까.
게다가 은후가 아니라면 어차피 성호의 곡을 세상에 알릴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은후는 틈틈이 시간 내어 작곡에 관련된 공부 또한 하고 있었다.
추후 작곡에 관해서 누군가 물을 때 써먹을 변명거리라는 측면도 있었으나, 애초에 성호가 젬병이었기 때문이다. 작곡의 이론에 대해. 그저 기타 하나만 들고 본능적으로 곡을 만들었다.
‘천재는 천재란 말이지.’
집념도 그렇고.
하기야 그러니 음악에 미쳐서 귀신까지 될 수 있었을 터였다. 어찌 되었건 세상에 성호의 곡을 알리고 권리를 지키기 위해선 작곡에 관한 공부가 필수 아닌 필수였다.
‘애초에 그 부분이 계약 조건이었으니까.’
자신의 곡을 세상이 널리 알리고 싶다. 그에 관해서 은후 또한 조력해야 했으니, 계약을 충실히 이행하는 건 흑마법사로서 당연한 부분이었다.
‘재미도 있고.’
언젠가는 자신만의 곡을 만든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흐흥.’
광명역에 도착했음에도 여전히 작곡에 몰두하고 있는 성호에게 은후가 말했다.
‘내리죠.’
‘흐음.’
은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마나로 성호를 질질 끌며 기차에서 내렸다. 그 와중에도 성호는 작곡에 몰두했다. 버스로 갈아타고 공항에 이르러서도.
‘앗! 저도!’
그런 성호가 정신을 차린 건 은후가 라운지에서 가볍게 간식을 먹고 있던 도중이었다.
‘뭐 드시고 싶으신데요?’
‘라면이요.’
‘슬슬 비행기에 타야 할 것 같은데 라면은 기내에서 먹어요.’
‘기내에서 라면도 먹을 수 있어요?’
‘그럼요.’
은후가 라운지에서 벗어나려고 하자, 직원이 다가와 말했다.
“게이트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네.”
그 모습에 성호가 눈빛을 반짝였다.
‘퍼스트 클래스라고 다르긴 한가 보네요.’
게이트에 도착하자마자 딱 알맞게 비행기에 입장할 시간이 되었다. 주말이라서 그런 걸까. 적잖은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은후의 경우엔 퍼스트 클래스였기에 거의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퍼스트 클래스에 탑승하는 손님은 은후를 포함해서 셋이었다. 은후를 제외한 둘은 나이를 적잖이 먹은 사람으로 보였다. 그래서 그런지 유독 은후가 눈에 띄었다. 외모 또한 적잖이 영향이 있었고.
‘잘생겼다.’
은후의 티켓을 건네받으며 확인하는 승무원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디 재벌 집 자제인가?’
은후는 사람들의 시선을 뒤로하고 비행기에 탑승했다.
“이쪽입니다.”
확실히 컸다.
창문이 네 개나 한 좌석에 배정된 것도 마음에 들었다.
‘이야, 그런데 저는 어디서 자죠?’
성호의 물음에 은후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허공에서?’
‘으으, 그래도 기왕이면 제대로 눕고 싶은데. 허공에서 자는 건 뭐랄까. 붕붕 뜨면서. 그러니까 어제 온천에서 잠깐 잠들었거든요? 그거랑 비슷한 느낌이랄까요.’
‘그래도 불편하지는 않잖아요?’
‘그거야 그렇지만요.’
그렇게 은후가 성호와 잡담을 얼마나 했을까. 사무장이 다가와 은후에게 고개를 숙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윽고 비행기가 이륙했고 기체가 안정되자 웰컴 간식과 간단한 음료가 제공되었다.
“혹시 라면 하나 부탁드려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승무원이 식사 주문을 승객 옆에서 무릎을 꿇으며 받았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미안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의 과한 친절. 하지만 은후는 그걸 별 신경 쓰지 않았다.
그거야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이세계에서 은후가 일정 경지를 넘어가자 귀족 작위를 받았으니. 그때 은후가 아랫사람으로부터 받았던 대우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그러니 아랫사람을 부리는 것도, 윗사람 취급을 받는 것도 익숙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태도에 승무원들은 착각했다. 은후가 어디 재벌 가의 자제라는 식으로.
‘승무원들이 떠드는 게 참 재밌네요. 은후 씨에 관해 이러쿵저러쿵.’
라면이 준비되는 사이, 비행기를 구경하겠다며 사라진 성호가 돌아오며 은후에게 조잘거렸다. 은후는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
‘승무원들도 사람이니까요. 딱히 신경 안 써요.’
‘그런데 진짜 어디 숨겨진 재벌 집 막내아들이라도 돼요?’
‘그럴 리가요. 성호 씨도 아실 텐데요. 저희 집안 평범한 거.’
‘거야 그렇죠.’
은후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피부숍에서 기타를 치기도 했으니까.
‘저는 좀 잘게요.’
‘편히 주무세요. 자장가라도 연주해 드릴까요?’
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
평소라면 되었다며 사양했을 은후인데, 성호가 씩 웃으며 기타를 튕겼다. 은후만이 들을 수 있는 잔잔한 기타 소리가 비행기 내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 * *
은후는 퍼스트 클래스라고 하여 적잖이 기대했다. 하지만 기대만큼 크게 감동은 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라면.’
아니, 이세계에 가기 전의 자신이라면.
‘꽤 크게 느끼지 않았을까.’
마음이 움직일 정도로.
확실히 돈값 할 정도의 서비스 수준이었다. 가격이 가격이니 응당 그래야 하겠지만.
‘썩.’
나쁘지는 않네, 이런 느낌.
공항에 도착해서도, 다른 나라에 왔어도, 그건 비슷했다. 시간을 거스르기 전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할 곳이 정해졌을 때, 막간을 이용해서 처음으로 해외에 나갔던 떨림을 떠올리면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데.
‘그건 어쩔 수 없지.’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른데.
‘은후 씨?’
‘네.’
공항을 벗어나 런던 시내로 가는 길, 갑자기 멈춰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던 은후에게 성호가 말을 걸었다.
‘그나저나 누구를 만나러 오신 거예요?’
‘빚을 좀 갚을 사람이 있어서요.’
‘빚이요?’
‘네.’
그 사람은 모르겠지만.
‘바로 찾아갈까.’
해가 막 떨어지고 있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적당히 걷다가 날아가면 그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일단은 좀 걸을까.’
미리 알아본바 목적지까지는 차량으로 약 두 시간 거리였다.
‘은후 씨.’
‘네.’
‘템스강 근처에 한번 갔다가 가면 안 될까요?’
‘좋죠.’
딱히 약속 시간이 정해진 건 아니었기에 은후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도착한 템스강에는 꽤 많은 사람이 오고 가고 있었다.
‘오오.’
그리고 템스강 근처에는 이런저런 공연자들 또한 자리 잡고 있었다. 노래나 악기 연주 외에도 춤을 추거나 무언극을 하거나 보드 묘기, 코스프레, 그림 등등.
‘오오오오오!’
‘이거 보고 싶으셔서 오자고 했군요.’
‘네!’
‘좋네요.’
성호가 눈빛을 반짝이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때 은후의 눈에 예기치 못한 간판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내기 체스?’
낡은 상자를 찢은 것처럼 보이는 종이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판당 5파운드. 제가 지면 10파운드로 돌려 드립니다.]
정말 별의별 사람이 있었다.
‘체스라.’
이세계에서도 체스는 있었다.
‘한 판 둬 볼까.’
은후 또한 곧잘 두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