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화
카페에서 헤어지려고 할 무렵, 후배 박훈이 말했다.
“다들 시간 괜찮으시면, 짠?”
그에 이채린이 눈을 가늘게 뜨며 자신의 남자 친구 박훈에게 말했다.
“어제도 마시지 않았어?”
“어, 마셨……지?”
“근데 또?”
“아니.”
“아니기는 무슨. 넌 좀 줄여야 돼. 내가 술을 아예 끊으라고 하는 건 아니잖아.”
여자 친구의 잔소리에 박훈이 멋쩍게 웃었다.
“자기야아, 은후 선배님이랑 한잔할 수 있는 기회가…….”
“기회고 자시고.”
잔소리라고는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건 애정. 그렇기에 박훈도 그리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싫어한다기보다는 즐기고 있는 것 같은데.’
은후는 박훈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 선에서 감정 마나를 흡수하며 자세히 살폈다.
“나는 상관없지만.”
박나리가 중간에 끼어들자 박훈이 반색하며 답했다.
“오, 은후 선배는요?”
“말을 좀 끝까지 들어. 넌 채린이 말대로 술은 좀 줄여야 돼. 내가 봐도 많이 마시더라.”
“그쵸? 언니가 봐도 그렇죠?”
“응.”
은후가 세 사람을 잠시 지켜보다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난 약속이 있어서.”
“아, 약속이요?”
“어. 그리고 나야 사정을 잘 모르겠지만 여자 친구 말은 잘 듣는 게 좋아.”
“하하.”
박훈이 아까처럼 일부러 멋쩍게 웃었다. 그리고 박나리에게 한 번 눈짓한 뒤에 은후에게 물었다.
“그런데 선배는 여자 친구 있으세요?”
“나?”
“네.”
“나는…….”
찰나 은후가 말을 흐리며 고민하던 사이, 세 사람이 은후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특히 박나리가. 은후는 어깨를 으쓱인 뒤 말을 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은 있지.”
은후가 이하연을 떠올렸다. 비행기 표를 예매하면서 잠시 문자도 했다. 이하연이 방송 시간이었기에 서로 문자를 주고받은 횟수는 짧았지만.
- 이따 방송 끝나고 전화해도 돼? 좀 일찍 끝낼게.
- 늦어도 되니까 방송 착실히 마무리하고 해. 기다릴게.
- 응.
- 그래. 방송 잘하고.
사랑까지는 아직 아니었지만. 그래도 분명히 호감은 있었다. 좋아한다는 감정이 포함된.
“오!”
“오, 는 무슨.”
“그럼 아직 사귀시는 건 아니네요?”
“머지않아 사귀지 않을까 싶은데.”
은후가 흐릿하게 미소 지은 뒤 손을 흔들었다.
“그럼 간다.”
그때 머뭇머뭇하던 박나리가 외쳤다.
“저어! 선배!”
“응?”
“지금 약속 중요한 용무예요?”
“나름은요?”
오늘 과제 이후 수호령을 비롯한 낙원의 주민들과 야식을 먹기로 했다. 별거 아니라면 별거 아니었으나, 나름 중요하다면 중요한 그런 약속이었다.
“저, 그러면.”
은후가 말해 보라는 듯 박나리를 바라보며 기다려 주었다.
“내일! 아니, 주말에 시간 있으세요? 식사라도 한 번 같이 해요. 이번엔 제가 살게요.”
“아니요. 바빠서요.”
“저! 그러면 다음 주는요?”
“아마 그때도 바쁘지 않을까 싶은데요.”
“이유는…… 아니, 그럼 언제 시간 되세요?”
은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후배님, 저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아까 분명히 말했던 것 같은데.”
“……네.”
처음에는 은후도 긴가민가했다. 하지만 몇 번 만남을 갖고 시간이 좀 더 흐르자 박나리의 감정이 점점 진해졌다. 은후를 좋아하기 시작한 것이다.
딱히 대화를 나누지 않았음에도, 그저 몇 번 같이 행동한 것만으로도. 그래서 은후는 일부러 여지를 주지 않으려고 냉정하게 행동했다.
“그래요.”
은후가 가볍게 손을 흔들며 등을 돌렸다. 이윽고 은후가 세 사람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때 이채린이 조심스레 박나리에게 물었다.
“언니.”
“응.”
“괜찮아요?”
“괜……찮지. 응, 괜찮아. 어렴풋이 짐작은 했거든. 근데 말이라도 해 보고 싶어서. 너무 성급했나 봐. 그래도 밥 한 끼 정도는 같이 먹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그래도 크게 상처받지 않아 보이는 박나리의 모습에 박훈이 자신의 여자 친구 이채린에게 눈짓한 뒤 말했다.
“근데 대체 어디에 반하신 거예요? 선배, 얼굴 잘 안 보잖아요.”
“바보냐. 솔직히 얼굴 안 보는 게 어딨어. 게다가 돈도 많지. 그리고 은후 선배면 얼굴이 개연성이야. 한눈에 반했다고 해도 설득력 충분하지 않냐.”
“얼씨구, 그럼 넌 나랑 왜 사귀냐.”
“그야, 아, 씨. 내가 꼭 말해야 해?”
서로 투덕거리는 두 사람의 모습에 박나리가 피식하고 웃었다.
“나, 괜찮아. 시도도 하기 전에 차인 건 좀 충격이지만.”
“한잔?”
“너 또.”
“아냐, 아냐. 괜찮아.”
* * *
세 사람과 헤어진 은후는 차를 몰고 덕진 공원 주차장으로 향했다. 은후가 주차하고 내리자마자, 언제나처럼 익숙한 수호령의 목소리가 반겨 주었다.
“은후 왔다!”
이어서 약간은 생소한 소리가 이어 울려 퍼졌다.
“뀨!”
페럿이었다.
“뀨뀨!”
페럿은 무엇이 그리 반가운지 쪼르르 은후에게 다가와 몸을 타고 올라왔다.
“뭐가 그렇게 반가워?”
“뀨!”
그냥!
은후가 피식 웃으며 페럿의 몸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그 모습에 수호령이 투덜거렸다.
“어째 나보다 은후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다니까.”
하지만 그 투덜거림에 딱히 질투는 없었다.
“아! 맞다. 개구리가!”
“개구리가?”
“온천을 만들었어!”
“온천?”
“응! 온천!”
은후가 고개를 갸웃했다.
‘온천?’
생각지도 못한 말에 은후가 물었다.
‘아.’
생각났다.
도깨비와 구미호가 운영하는 용산 술집에서 스쳐 지나가듯 개구리가 도깨비와 그런 대화를 나누었다.
‘낙원에 온천이라도 만들까 싶다니까.’
‘오! 온천 좋제.’
‘그래서 요새 좀 궁리 중인데 도깨비 양반이 좀 도와줄 수 있을까?’
‘거, 당연하지!’
은후가 호기심을 품고 낙원으로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오! 은후 도령 오셨구랴.”
“도령 왔구려!”
도깨비와 개구리가 뿌듯하게 웃으며 은후를 맞이해 주었다.
“도령, 내가 말이요.”
“령이에게 들었어요. 온천 만들었다면서요?”
은후의 말에 도깨비가 맥빠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에잉, 거, 내가 비밀로 해 달라고 신신당부했는데.”
“삼촌이 언제?”
“그런 말 안 했는데.”
“그랴?”
“응, 안 했어.”
옆에 있던 개구리가 폴짝 뛰어 수호령 옆으로 이동한 다음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 도깨비 양반이 말은 했는데 령이가 못 들은 거야. 페럿이랑 노느라 바빴거든.”
“아? 에헤헤, 그래? 삼촌, 미아아아안.”
“으흠, 거, 뭐, 좀 못 들을 수도 있제.”
“대신에 내가 이따가 야식 준비할 때 도와줄게!”
그렇게까지 수호령과 도깨비가 친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언제 저렇게 친해졌나.’
은후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낙원의 구석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곳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저기인가.’
온천은.
“노천탕이네요?”
“물은 개구리가 끌어오고 모양은 내가 잡았수다.”
“후후, 진짜 온천물이야.”
“어디서 끌어온 물인데?”
“그건 비밀.”
“비밀?”
“사실 비밀은 아니고.”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며 은후는 온천으로 다가갔다.
‘나무는 편백을 썼네.’
흔히 사람들이 상상하는, 어느 동화나 오래된 드라마에서 볼 법한 전형적인 온천 형태였다. 대부분 이런 온천을 본다면 옛 과거의 향수에 사로잡히지 않을까 싶은 그런 온천이었다.
“지붕도 씌우고 구역도 나누고 할 건데, 그건 차차 하려고.”
은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도깨비에게 물었다.
“형수님은요?”
“임자는 용산 가게에 있제. 아무래도 임자가 있으면 온천 즐기기 어렵지 않것어.”
현재 온천은 딱히 가림막도 없이 휑하니 트여 있는 상태였다.
“은후야!”
“응?”
“온천 들어가자. 나, 되게 기다리고 있었어.”
“나를?”
“그럼.”
옆에 있던 도깨비가 픽 웃으며 답했다.
“낙원의 주인에게 바치는 선물인디, 먼저 들어가면 쓰나.”
“주인이라뇨.”
“흥, 거, 뺄 거 없수다. 주인은 주인이제.”
“감사합니다.”
“감사하기는 개뿔. 은후 도령 아니었으면 나와 임자는 죽을 날만 바라보며 골골거리고 있을 거고, 령이도 사라졌을 거고, 거, 저기 성호 도령과 연후도 마찬가지였겠지. 개구리 양반만 좀 예외였으려나?”
“공치사는 됐습니다.”
은후가 어깨를 으쓱이며 온천에 손을 조심스레 뻗었다.
‘딱 좋네.’
적절한 온도였다.
‘구체적으로는.’
은후는 머리를 휘휘 저으며 이어지려는 생각을 끊었다. 굳이 몇 도가 중요할까. 은후는 옷을 벗은 뒤 온천에 몸을 조심스레 담갔다. 그 뒤를 이어 수호령이 뛰어들었다.
“야호! 앗, 뜨. 뜨!”
“우리 령이에겐 좀 뜨겁나?”
“아냐! 안 뜨거!”
“그래?”
“넘 성급하게 들어와서 그런 거거든!”
“그래, 그래.”
도깨비는 몇 가지 과일과 술을 가져왔다. 근처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성호와 연후도 온천에 몸을 담갔다.
“이런 날에 음악이 빠질 수 없죠.”
성호가 온천 안에서 기타를 치려고 하자 서연후가 물었다.
“기타는 괜찮아요?”
“물에 좀 젖는다고 상할 기타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데요.”
“애초에 우리 존재가 일반적이지 않잖아요?”
“그거야, 뭐.”
페럿의 경우엔 온천 주위를 몇 바퀴 돌면서 계속 망설였다. 온천에 들어가야 할까 말까.
“이리 와!”
수호령의 부름에 페럿이 조심스레 온천으로 뛰어들었다.
“뀨!”
그리고 잠깐 놀랐다가 흐느적거리며 수호령에게 다가갔다.
‘좋네.’
은후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캬!”
어느새 온천 안으로 들어온 도깨비가 자작하고 있었다.
“저도 한 잔 부탁드립니다.”
도깨비가 말없이 은후에게 잔을 내민 뒤 술을 따라 주었다. 성호와 서연후도 은근슬쩍 합류했다. 수호령은 그 모습을 뾰로통하게 바라보다가 귤을 하나 집었다.
“귤, 페럿에게 줘도 돼?”
“조금은. 당도가 높아서 많이는 안 돼.”
은후의 대답에 수호령이 귤을 깐 뒤 제일 작은 조각을 페럿에게 주었다.
“꾸!”
평소와 약간 다른 소리를 내며 페럿이 열심히 귤을 갉아 먹었다.
옴뇸뇸.
제법 서늘한 공기.
따뜻한 물.
좋은 사람들.
‘아니, 존재들이라고 해야 하나?’
여기에서 사람은 은후뿐이었으니.
은후는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면서 느긋하게 하늘을 바라봤다. 구체적으로 온천을 어떻게 만들었고 물은 어디서 끌어왔는지 등등, 궁금한 건 꽤 있었으나 일단 호기심은 뒤로 밀어 둔 채.
그런 궁금증은 나중에 해결해도 되니까. 낙원에 무슨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면 굳이 몰라도 되었고 말이다. 다만 조금 아쉬웠다. 이곳에 어머니를 모시고 올 수 없다는 게.
‘하연이도 그렇고.’
훗날, 언젠가 나중에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을 날이 오려나.
어머니나 이하연에게, 혹은 그 외 누구에게라도.
‘힘들겠지.’
그때 수호령과 개구리가 서로 물장난을 치다가 실수로 은후에게 물벼락을 날렸다. 은후는 그걸 알아차렸지만 그냥 웃으며 맞아 주었다.
“앗! 미, 미안!”
수호령이 미안하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은후는 씩 웃으며 마나를 움직여 물을 어느 정도 모아 수호령의 머리에 쏟아 냈다.
“아하하하!”
그게 무엇이 좋다고 수호령은 해맑게 웃었고.
“뀻!”
근처에 있던 페럿은 갑작스러운 봉변에 후다닥 온천 외곽으로 이동했다.
“은후도 같이 놀자!”
“그럴까?”
어느 가을 낙원의 온천에서 물놀이가 시작되었다. 다만 일반적인 물놀이와는 좀 양상이 달랐다. 그저 물을 손으로 뿌리는 것이 아닌 제각기 능력을 동원해 물로 이런저런 모양을 빚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용이라든가.
“용이다!”
페가수스라든가.
“말에 날개가 달렸어! 어푸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