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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의 인생 룰루랄라-86화 (86/170)

제86화

이틀 후, 금요일 오후.

전북대학교 근처에 최근 새로 생긴 카페에 은후를 비롯한 성인 및 노인 심리학 조별 과제 인원이 모이기로 약속했다. 제일 먼저 도착한 사람은 은후였다.

“안녕하세요.”

“네, 어서 오세요.”

카페 사장의 흐릿한 인사에 은후가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A룸 비었나요?”

“비었습니다.”

무뚝뚝한 사장의 인사에도 은후는 계속 미소를 지으며 카드를 꺼내며 말했다.

“네 시간이요. 그리고 일단 아이스 카페 라테 하나 먼저 계산해 주세요. 세 사람 더 올 건데, 다른 사람 음료는 오면 계산할게요.”

“네.”

은후가 계산 후에도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사장이 물었다.

“뭔가 더 용무 있으세요?”

“아니요.”

“…….”

“저, 기억 못 하세요?”

“네?”

은후의 물음에 사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잘 모르겠네요.”

사장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 얼굴이면 기억 못 하기도 힘든데.’

은후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저 은후예요.”

“은후?”

“네.”

“……아!”

사장의 감정이 물음표에서 느낌표로 바뀌었다.

“이은후?”

“네, 예전에 편의점 하셨을 때 야간 알바했던 이은후요.”

전북대학교 근처라고는 하지만 꽤 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카페였다. 막 새로 생긴 데다가 홍보도 제대로 되지 않아서 아직은 아는 사람만 아는 카페 루디엠.

은후도 우연히 최근에 카페 루디엠이 개업한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굳이 조별 과제 약속 장소를 카페 루디엠으로 잡았다. 주차를 멀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건 카페 사장과 과거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짜 은후 맞아?”

“그럼요.”

“성형 수술?”

“그렇게 대놓고 물어보는 사람은 네 번째네요.”

사장이 픽 웃었다.

“꼬맹이가 많이 컸네. 얼굴도 진짜 잘생겨졌네. 그 정도 잘생겨질 수 있으면 성형 수술이 대수인가.”

“성형 수술은 아니고요.”

“자연스럽게 바뀌었다고?”

“네.”

“거참.”

시간을 거스르기 전 고등학교 시절, 가계에 정확히 구체적으로 빚이 얼마나 있는지 몰랐다. 하지만 집안이 어렵다는 사실은 깨닫고 있었다.

어머니가 말은 안 하고 필사적으로 노력하셨으나 모를 수가 없었다. 줄어든 용돈부터 시작하여 여러모로 티가 나지 않을 수 없었으니.

그 무렵 은후는 학교에 다니며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때 처음으로 일하게 된 편의점, 그곳에서 좋은 인연을 만났다. 야간 수당까지 챙겨 주는 편의점 사장이라니.

‘이거 우리끼리 비밀이다. 근처 편의점 사장이 알게 되면 나한테 욕하거든.’

당연히 챙겨 줘야 하는 돈임에도 불구하고 막상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구해 보면 이런저런 핑계로 떼먹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손님이 없어서 그냥 자리만 지키면 되니까, 그런 돈까지 다 챙겨 주면 적자니까, 아예 대놓고 그 돈 안 줘도 할 사람은 널렸다고 말하는 사장 등.

‘폐기는 맘대로 가져가고.’

그런 면에 있어서 눈앞의 사장 형은 참된 사람이었다. 어떻게 보면 멍청한 것 같기도 했다. 시간을 거스르기 전, 그렇게 생각할 때도 있었다.

‘신념이 있는 사람이지.’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시작으로 맺은 인연은 은후가 대학교에 가면서 자연스레 끊겼다. 그때까지 은후는 사장의 이름도 몰랐다. 그저 사장 형이라고 불렀을 뿐. 다시 재회하게 된 건 지금처럼 은후가 4학년 때, 딱 이 무렵이었다.

“야.”

“아, 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그냥 옛날 생각요. 저 알바 했을 때요. 그나저나 사장 형 이름이 뭐예요?”

“갑자기?”

“예전처럼 알바생도 아닌데 사장 형이라고 부르기도 좀 그렇잖아요.”

“이름은 김현석. 그냥 사장 형이라고 불러도 돼. 그나저나 알바 할 생각 없냐?”

은후가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바빠서요. 4학년이거든요.”

“4학년이면 바쁠 만하겠네.”

“그런데 알바 뽑아도 돼요? 적자 날 것 같은데.”

“별걱정을 다 한다. 그런 말 하는 거 보니 진짜 많이 크긴 했다?”

은후가 웃으며 무어라 답하려 할 때.

딸랑, 카페에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오, 선배, 일찍 오셨네요?”

“보급관이 일찍 와야지. A룸으로 잡아 놨어.”

박훈이었다.

“근데 여기 카페는 어떻게 아셨어요? 진짜 길 찾기 힘들더라고요.”

“어쩌다 보니.”

은후의 답변에 이어 카페 사장 김현석이 답했다.

“우리 카페가 좀 구석에 있기는 하죠.”

“하하, 그래도 분위기는 무척 좋네요.”

“감사합니다. 주문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잠시만요.”

은후가 말했다.

“형, 계산은 이따 나가면서 할게요.”

“그래라.”

“나중에 시간 되시면 술이나 한잔해요.”

“빈말로 하는 거 아니야?”

“저, 빈말 잘 안 해요. 조만간 진짜 날짜 잡아요.”

“알았다.”

은후가 박훈에게 말했다.

“먼저 들어가 있을게. 시키고 A룸으로 와.”

“넵.”

은후가 사라지자 박훈이 슬쩍 김현석에게 물었다.

“은후 선배님이랑 아는 사이세요?”

“네.”

“아.”

“…….”

어느 정도 친분이 있지 않으면 무뚝뚝한 김현석이었다.

“은후 선배, 고등학교 때도 기타 잘 쳤어요?”

“기타요?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그래서 박훈은 더 대화를 이어 가지 못하고 주문하고 A룸으로 들어갔다.

* * *

이윽고 이채린과 박나리도 도착했다.

“죄송합니다. 수업이 좀 늦게 끝나서요.”

박나리의 경우엔 약속 시간보다 살짝 늦어서 고개를 숙였다. 일부러 늦은 것도 아니고 수업이 늦게 끝났다는 말에 다들 그러려니 했다.

“그럼, 다들 과제 열심히 해요.”

“선배님은…… 보급관이죠.”

은후가 픽 웃었다.

“네, 저는 제 할 일 할게요. 저 신경 쓰지 말아요.”

대놓고 과제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의미였지만 아무도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저번에 아웃백도 그렇고, 오늘 카페의 룸 대실 및 음료와 간식까지 은후가 계산했기 때문이다. 일전 말했던 대로 보급관의 역할에 충실한 것이니.

‘어디 보자.’

은후는 세 사람에게 신경을 끄고 자신의 노트북을 꺼냈다. 그리고 인터넷 창을 열어 런던 왕복 비행기 표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일전 이하연과 데이트하며 감성에 취하여 무심코 연주해 버린 〈월광〉, 미래에 나왔어야 할 곡. 본의 아니게 도둑질한 셈이었으니 은후는 되도록 빨리 빚을 갚고자 했다.

‘본명이 콜린 리스티.’

예명 베라메라.

미래에 기록되어 있을 위키의 정보가 맞다면 런던 근교의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븐(Stratford apon Avon)에서 노숙자 생활을 하고 있을 터였다. 그곳은 셰익스피어의 생가로 유명한 작은 마을이었는데, 훗날 베라메라 때문에 한층 더 유명세를 타게 된다.

‘가격 차이가 장난 아니네.’

런던 왕복행 비행기는 은근 노선이 많았다. 다만 은후가 고민하는 것은 등급이었다. 최소한 비즈니스 클래스는 타고 싶었다.

‘이코노미는 좀.’

장시간 비행인데 몸을 제대로 누일 수 없는 좁은 좌석, 부대낄 수밖에 없는 사람들, 그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이코노미를 선택하는 이유는 결국 돈 때문이었다.

은후 또한 시간을 거스르기 전 회사에 다닐 때 해외 출장을 이유로 미국이나 유럽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그리고 회사에서는 이코노미 클래스를 지원해 주었다.

‘지금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문제는 비즈니스냐, 퍼스트냐였다.

‘그래.’

퍼스트를 타자.

가격 차이가 크게 난다고는 하지만 부담스럽냐고 물으면 그건 또 아니었으니. 그래서 고민은 잠깐이었다. 그렇게 은후가 표를 예약하려던 찰나, 과제를 하던 세 사람은 잠깐 쉬기로 했다.

“좀 쉴까?”

“그러자. 어우, 힘들어.”

박나리가 기지개를 쭉 켜며 슬쩍 은후에게 물었다.

“선배.”

“네.”

“뭐 하고 계세요?”

“비행기 표를 좀 고르고 있어요.”

박나리에게 있어서 굉장히 뜬금없는 말이었다.

“비행기 표요?”

“네, 런던에 볼일이 좀 있거든요.”

대학생에게 있어서 비행기를 탄다는 건 여행이나 유학 정도였다.

‘지금은 학기 중인데?’

박나리는 자연스레 이렇게 생각했다.

‘학기 끝나고 가시는 건가?’

당장 여행이나 유학을 간다는 건 말이 안 되었으니까.

“학교에서 무슨 프로젝트라도 맡으셨어요?”

“학교랑 관련 있는 건 아니고요, 개인적인 볼일. 그래서 그런데 다음 주에는 제가 조별 과제에 참여하기 힘들 것 같네요. 영수증 끊어 놓으세요.”

개인적인 볼일로 런던이라니.

그것도 학기 중에.

“네? 아니, 그, 괜찮은데요.”

“보급관 역할은 충실히 해야죠.”

“…….”

“아, 잠시만요.”

은후는 문득 생각난 것이 있었다. 그래서 슬쩍 세 사람이 눈치채지 못하게 리어카를 뒤졌다. 그리고 기프트 카드 한 장을 꺼낸 뒤 자연스레 카드를 내밀었다.

“이거 쓰세요.”

일전 전주 유지 이창석에게 받은 무기명 선불카드였다.

“10만 원짜리니까 부담 갖지 말고요.”

“이게 무슨 카드에요?”

2000년대 초반부터 발급된 상품의 일종으로, 카드사들이 백화점 상품권 등에 대항하기 위해 내놓은 것이었다. 이창석이 가지고 있으면 쓸모가 있을 거라며 은후에게 선물한 것이기도 했다.

“카드로 된 상품권이라고 보면 돼요.”

아직 그리 일반적이지 않은 카드 상품이었다. 그래서 세 사람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훈아.”

“네?”

“여기, 네가 책임지고 결재해.”

“넵.”

“사용 방법은 일반 카드랑 똑같으니까.”

박훈이 망설였으나 은후가 억지로 손에 카드를 쥐여 주었다.

“다음 주에 두 번 모이기로 했지?”

“네.”

“그 안에 그거 다 써.”

“네?”

“다 쓰라고. 그것도 네가 책임지고.”

10만 원.

정말 집이 잘사는 대학생이 아니라면 꽤 부담스러운 금액이었다. 안 그래도 은후 몰래 세 사람이 이야기한 것도 있어서 박훈이 조심스레 카드를 은후에게 내밀며 말했다.

“안 그래도 선배 돈 많이 쓰셨잖아요. 저번에 아웃백도 그렇고요. 게다가 막말로 은후 선배가 보급관 된 것도 반쯤 억지였는데요.”

박훈의 말에 은후가 피식 웃었다.

‘셋 다 사람이 괜찮아.’

좀 영악했다면, 혹은 좀 심사가 꼬인 사람이라면 호구 잡으려고 했을 수도 있었다. 또 당연하게 여길 수도 있었고.

왜?

돈이 많아 보이니까, 비싼 차도 끌고 있고.

게다가 은후가 보급관 역할이라는 명분 또한 있었다.

본디 사람이란 대부분 호의가 계속되면 그걸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여기기 마련이었으니. 하지만 세 사람은 그러지 않았다. 그런 심성을 처음에 알아봤기에 보급관 역할이라지만 은후가 흔쾌히 조별 과제를 같이 하기로 마음먹은 것도 있었다.

“훈아.”

“네.”

“카드는 받아 둬.”

“네?”

“걱정 안 해도 돼.”

은후가 일부러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대신에 점수 잘 받아 오면 돼.”

은후의 억지 아닌 억지에 세 사람은 고개를 모두 고개를 주억거렸다.

‘돈으로 잘난 체하는 거로 보일 수도 있긴 한데.’

뭐, 그렇게 생각하면 또 어떠랴.

‘사실 잘난 체가 맞기도 하지?’

은후가 속으로 피식 웃었다.

“그나저나 선배.”

“응?”

“런던은 무슨 볼일로 가시는 거예요?”

“만날 사람이 좀 있어서.”

은후의 말에 세 사람 다 은후를 신기하게 바라봤다.

‘런던에?’

대체 누구를.

박훈이 조심스레 은후에게 물었다.

“누군지 물어봐도 돼요?”

“아니.”

은후의 대답에 박훈이 어색하게 웃은 뒤 주제를 돌렸다.

“넵. 저희 꽤 쉰 것 같은데 다시 과제 할까요?”

세 사람은 궁금증을 꾹 참고 다시 과제를 시작했다. 은후는 피식 웃은 후 마저 비행기 표를 예매했다.

‘퍼스트 클래스라.’

소문대로 대단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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