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5화
은혁에게 있어서 수호령과 은후와 만난 일은 환상적이었다.
“몸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습니다.”
“정말요?”
게다가 그저 좋은 추억만 남지 않았다.
“이런 경우가 드물기는 하지만 없지는 않거든요. 골수 이식 후 맞지 않던 게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 이렇게 보면 또 의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하고요. 자세한 건 정밀 검사를 해 봐야 알겠습니다만.”
은혁을 담당하고 있는 의사가 기분 좋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도 기분이 좋네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한 게 뭐 있다고요. 선배가 다 했죠.”
“선배요?”
“아, 모르셨군요. 은혁이가 병원 옮길 때 개인적으로 연락을 받았는데요. 수술을 집도하신 분이 제가 잘 아는 선배님이거든요. 은혁이 좀 잘 봐 달라고 하시더라고요.”
은혁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좋아진 건 전부 은후 형이랑 령이 때문인데.’
은혁은 어머니와 의사의 이야기를 한 귀로 흘리며 창 바깥으로 시선을 던졌다.
‘자주 놀러 오라고 그랬지.’
은후가 개인적으로 번호도 주었고, 따로 조치도 해 놓았다고 했다.
‘이 자리에서 령이와 이야기하면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지 않을 거야.’
‘어떻게?’
‘형은 마법사니까. 궁금하면 다음에 또 놀러 오렴.’
‘지금 알려 주면 안 돼?’
‘응, 안 돼.’
장난스레 웃던 은후의 모습이 떠올랐다.
‘둘이 엄청 친한 것 같던데.’
나도.
은혁은 좀 더 수호령과 친해지고 싶었다.
물론 은후와도 더.
‘그나저나 기타 진짜 잘 쳤어.’
멋지기도 엄청 멋졌다.
‘기타.’
갑자기 호기심이 들었다.
“엄마.”
“응?”
“나, 기타 배워 보고 싶어.”
“기타를?”
의사가 옆에서 거들었다.
“따로 취미가 없다면 배워 보는 것도 좋죠. 악기는 좋은 취미니까요.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도 될 테고요. 물론 몸 상태를 봐 가면서 연습 시간을 조절해야겠습니다만.”
“그래요?”
“네, 오후에 검사 후에 한번 의논해 보시죠. 아, 그리고 괜찮으시다면 제가 가르쳐 줄 수도 있고요.”
은혁을 담당하는 의사는 병원 음악 동아리의 기타리스트였다.
“혹시 무슨 기타 하고 싶은지는 정했니?”
“기타에도 종류가 있어요?”
“그럼. 모르면 이따가 샘이 알려 줄게. 그런데 기타를 배워 보고 싶다는 이유가 따로 있어?”
“그게요.”
은혁이 은후와의 만남에 관해 조심스레 털어놓았다.
‘령이 이야기는 못 하겠지만.’
은후 형에 관한 거면, 뭐.
“기타 정말 잘 치긴 하더라고요. 얼굴은 또 얼마나 잘생겼던지. 친절하기도 했고.”
은혁 어머니의 말에 의사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사람인가?’
최근 병원 내에서 퍼진 소문이 문득 떠올랐다.
‘덕진 공원에 등장한 잘생긴 천재 기타리스트.’
어지간한 연예인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잘생겼다고.
‘뭐.’
딱히 자신이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기타 종류에 뭐가 있느냐면…….”
* * *
은후는 논문 ‘게임에서 비롯되는 인정 욕구와 심리의 상관관계’ 작성을 제외하고 학교 생활에 되게 설렁설렁이었다. 최소한의 졸업을 위해 일정한 출석률을 유지하는 것. 그리고 적당한 시험 점수 외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이번은 조별 과제입니다.”
성인 및 노인 심리학 교수의 말에 모든 학생이 탄식했다.
“교수님! 그냥 개별 과제로 하면 안 될까요?!”
“여러분들이 조별 과제를 극도로 혐오하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까지 과제는 전부 개별로 진행했죠. 다들 아시죠?”
그건 교수의 배려였다.
“양도 그리 많지 않았고요. 다만 이번 과제는 무조건 조별 과제로 진행합니다.”
“아.”
“혹시라도 과제 하기 죽어도 싫다, 이런 사람은 수업 끝나고 제게 알려 주세요. 혹은 다른 학우들을 위해서 내가 기꺼이 희생하여 점수를 아래 깔아 주겠다는 학생도요. 물론 그 경우엔 절대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없겠죠? 아, 취업의 경우엔 좀 예외지만요. 이미 취업한 학생이 있으면 따로 찾아오세요.”
대놓고 말하는 교수의 직설적인 화법에 다들 피식피식 웃었다.
“그럼 좀 이르지만 쉬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성인 및 노인 심리학의 경우엔 연강이었다.
“30분이나 일찍 끝내는 이유는 다들 잘 알죠?”
“조 짜라고요!”
한 학생의 외침에 교수도 웃으며 답했다.
“맞습니다. 최소 인원은 셋, 최대 인원은 다섯입니다.”
교수가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교수, 빠꾸 없네.”
“원래 저러시잖아. 그래서 난 오히려 좋더라. 안 돌려서 말하니까.”
은후가 고민했다.
‘조별 과제라.’
어쩔까.
‘취업이라면 이미 했는데.’
정확히는 창업이지만.
이미 일자리를 가졌다는 걸 감안하면 취업이나 창업이나.
‘같지는 않지.’
은후가 쓸데없는 생각을 떠올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귀찮기는 하네.’
그때 은후의 후배가 말을 걸어 왔다.
“형, 형.”
누구였더라.
은후가 마나를 끌어 올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박훈?”
“와, 네. 제 이름 기억하고 계셨네요?”
적당히 인사하고, 술자리 한정이긴 하지만 그럭저럭 친하게 지냈던 후배임을 떠올렸다.
“기억하고 있지. 군대 면제라 신의 아들로 유명하잖아.”
“에이, 유명하기는요. 요새는 형이 더 유명하죠.”
“나?”
“네, 군대 다녀와서 존잘되었다고 과에서 소문 자자해요. 반대라면 모를까.”
“그런 소문 못 들었던 것 같은데.”
“원래 소문이 당사자 귀에는 잘 안 들어가잖아요. 기타도 엄청 잘 치신다면서요?”
박훈이 멋쩍게 웃으며 말을 이어 가려던 찰나 은후가 먼저 물었다.
“같은 조 하자고?”
“넵.”
“별로 귀찮아서 할 생각 없는데.”
“네?”
“일자리 이미 구했거든.”
“아.”
“그래서 교수님 말대로 그냥 적당히 점수 깔아 주려고. F만 아니면 되니까, 졸업만 하면 돼.”
박훈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게 아닌데.’
박훈이 적잖이 당황하자 은후가 말했다.
“왜?”
“아니요.”
“그나저나 수업 끝날 때까지 말 안 걸 줄 알았더니.”
“에이, 그게 형 포스가 장난 아니라서. 그리고 이 수업 되게 많이 빠지시지 않으셨어요?”
“좀 빠지긴 했지. 그래도 이미 취업했다고 하면 충분히 고려해 주실걸? 하 교수님, 융통성 있으시니까.”
“그거야 그렇죠.”
박훈이 우물쭈물하다가 답했다.
“그…….”
“할 말 있으면 해. 교수님한테 가기 전에.”
“친해지고 싶어서.”
“뭐?”
“친해지고 싶어서요.”
솔직한 후배의 말에 은후가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저도 그렇고, 같이 조 짜기로 한 동기랑 선배도 그렇고요. 선배님, 진짜 희귀 종인 거 아세요?”
“내가 무슨 몬스터냐.”
박훈의 감정을 자세히 살펴본바 진짜로 같은 조가 되고 싶어 하는 목적이 그거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눈치를 살피는 다른 두 명도 그랬고. 아마 박훈이 말한, 같이 조를 짜기로 한 동기와 선배겠지.
‘친해지고 싶어서라고.’
은후가 피식 웃었다.
다른 이유라면 모르겠지만.
“좋아.”
“정말요?”
“대신에 난 보급관이다.”
“네?”
“보급관이라고. 과제에 실질적으로 참여는 안 할 거야. 대신에 스터디룸을 빌린다거나 간식이라거나 식비 같은 건 내가 댈게.”
“어.”
“가서 물어봐. 그거로 괜찮냐고.”
박훈이 같이 조를 짜기로 한 동기와 선배에게 은후의 조건에 관해 말했다.
“보급관?”
“네, 이미 취업해서 진짜로 점수 깔아 주시려고 했대요. F만 아니면 된다고요.”
“와, 오진다. 어디 취업하셨대?”
“그거까지는 모르겠는데요. 어떻게 해요?”
박훈의 동기가 답했다.
“뭘 어떻게 해. 무조건 땡큐지. 어차피 나리 언니 포함해서 우리 셋이 하려고 했잖아.”
은후에게 같이 하자고 말한 건 정말로 그냥 친해지고 싶어서였다. 은후가 안 된다고 하면 셋이서 진행하려고 이미 약속했었고.
“선배님.”
“어.”
“다른 둘도 괜찮대요.”
“그래, 그럼. 인사는 이따 수업 끝나고 하자.”
“넵.”
* * *
수업이 끝나고 점심을 먹기 전.
“안녕하세요, 03학번 이은후입니다.”
“안녕하세요. 05학번 박나리라고 합니다.”
“박훈입니다. 06학번이구요!”
“이채린이에요. 훈이랑 같은 06학번입니다.”
가벼운 자기소개가 오갔다.
‘이채린?’
분명히.
“둘이 아직도 사귀고 있나 보네?”
“엇, 넵.”
박훈이 어색하게 웃었다.
“기억하고 계셨네요?”
“너 고백하기 직전에 나한테 상담한 건 기억 나냐?”
“그, 아니요.”
“오래되기는 했으니까.”
“기억나는 건 있어요.”
박훈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 예전에 저희 대판 싸우고 깨질 뻔할 때 은후 선배가 술 사 주시면서 상담해 주셨던 거.”
“하여간 보기 좋네. 아직도 잘 사귀고 있는 거 보면.”
대학생들의 로망 중 하나 캠퍼스 커플. 하지만 로망은 어디까지나 로망일 뿐이었다. 물론 사귀면 좋겠지. 하나 그 기간이 얼마나 오래 가겠는가.
대부분 1년이 채 되지 않아 깨지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게다가 그게 같은 과라면 더 골치가 아팠다. 차라리 다른 과였다면 모르겠지만.
‘용하네.’
학기 중반에 사귀기 시작했으니까.
‘얼추 3년인가.’
은후가 박나리에게 말했다.
“나리 후배님은 처음 보죠?”
“넵!”
“그렇게 각 안 차려도 돼요. 그래서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네?”
“점심 먹어야죠. 보급관 역할 하기로 했으니까 제가 오늘 점심 사 줄게요.”
“아, 오늘부터 과제 할 건 아닌데요.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하세요.”
은후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좀 더 친해지면 놓을게요.”
“선배님!”
“뭐?”
“고기요!”
“고기 좋지. 다른 두 사람은?”
박나리와 이채린도 동의했다.
“가죠.”
“학교 앞에 스테이크 덮밥집 새로 생겼다는데 진짜 맛있대요.”
은후가 세 사람을 이끌고 도착한 곳은 주차장이었다.
“다들 타요.”
“헐. 선배님 차예요?”
“그럼 누구 차겠냐.”
“와.”
셋 다 차에 관해서 잘 몰랐다. 하지만 대충 봐도 비싸 보였다. 그리고 차에 아무리 잘 몰라도 BMW라는 브랜드 정도는 들어 봤다.
“그런데 선배.”
“네.”
“저희 어디 가요?”
“아까 말했던 대로 고기 먹으러 가죠.”
박나리의 질문에 은후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와.”
도착한 곳은 전북대학교에서 가장 가까운 아웃백이었다.
“그, 어, 너무 비싼 거 아녜요?”
“그럴 돈은 충분히 있으니 다들 걱정하지 말고요.”
은후가 먼저 휙 들어갔다.
“와, 개멋있다.”
“그래도 우리, 메뉴는 좀 싼 거로 고르는 게 낫겠죠?”
“아무래도 그렇겠지?”
하지만 그런 세 사람의 걱정은 쓸데없었다. 은후가 알아서 미리 전부 주문했던 것.
“나리는 웰던, 채린이는 미디엄 레어라고 했고, 훈이는 레어 먹어 보고 싶다고 했지?”
“네.”
“알아서 주문했어.”
“그래서 아까 음식 취향 물어보셨구나.”
“샐러드 바도 계산했으니까 이용하고.”
“괜찮으세요?”
“안 괜찮으면, 아까 네가 말한 덮밥집을 갔겠지?”
이채린이 박훈과 샐러드 바로 이동하며 말했다.
“야.”
“어?”
“나는 솔직히 좀 안 내켰다?”
“뭐가?”
“은후 선배님. 너도 그렇지만 특히 나리 선배가 친해지고 싶다고 해서 잠자코 있긴 했는데, 과제에 아예 참여 안 하고 보급관이라니. 그게 말인지, 방구인지.”
“그런데?”
“이런 보급관이면 완전 환영. 과제 진짜 열심히 해야겠다.”
아무것도 안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진짜 아무것도 안 하거나 오히려 민폐 끼치는 놈들도 널렸는데, 은후 선배님 정도면 천 배, 아니, 천 배가 뭐야. 천만 배는 낫지.’
이채린이 속으로 중얼거리며 떡볶이를 접시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