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1화
대개 충동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건 어린 사람이었다. 물론 나이를 적잖이 먹은 이도 앞뒤 계산 없이 갑작스레 일을 벌이는 이도 존재한다. 하나 상대적으로 그 수는 적었다.
왜냐하면 나이를 먹고 사회를 경험하며 시간을 쌓아 세월을 만드는 동안 가진 것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상대적으로나 객관적으로도 충동적인 건 어린 사람이었다.
“지금이라면 괜찮으니까.”
“지금?”
그렇기에 충동적인 건 맞았다, 이하연이 전주로 가고자 하는 건. 하나 그 와중에도 이하연은 계산이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전주로 굳이 갈 필요는 없어. 아무리 프리랜서고 장비만 있으면 방송하는 데에 문제가 없다고는 하지만,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용산이니까.”
“그건 그렇지.”
“그런데 가도 딱히 문제 될 건 없잖아? 아예 집을 사서 전주에 정착하려는 건 아니니까, 당장은.”
이하연은 일단 전세로 집을 구할 생각이었다.
“인터넷으로 알아보니까 못 구할 건 없겠더라고. 반전세라는 수단도 있으니까. 여차하면 몇 년 있다가 다시 서울로 오면 되지. 그러니까 전주로 가도 괜찮다고 생각해.”
무엇보다.
“전주로 가면 지금보다는 훨씬 자주 직접 볼 수 있을 테니까.”
그래, 그게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충동적이긴 하지만 꼭 그러고 싶었다. 이하연은 은후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선 자신이 적극적으로 다가가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 이유는 그리 긴 시간은 아니지만 직접 만난 이래 은후와 교제하면서 느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하연의 판단으로는 은후는 뭔가 초탈한 게 있었다.
‘보이는 것뿐만이 아니라.’
사람을 대하는 것에도.
이하연은 스스로의 외모를 잘 알았다. 성격도 크게 모난 곳이 없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사람인 이상 단점이 없을 수는 없었다. 자신의 단점을 이하연은 비교적 잘 알고 있었다.
‘어쨌건 은후도 알고는 있단 말이지.’
자신이 좋아하고 있다는 걸.
‘그런데 그렇게까지 적극적이지가 않아.’
은연중에 자신의 마음을 표하기도 하고. 오늘 같은 경우엔 좀 더 티가 날 정도로 말하기는 했지만.
‘신중하다고 봐야겠지.’
사람의 사귐에 있어서, 남녀 관계는 더더욱.
만약 이대로 어물쩍 있다가는 관계의 진전에 지지부진하지 않을까 싶었다. 게다가 자신만 은후 근처에 있을 건 아니지 않은가. 은후는 대학생이었다.
더불어 외모 또한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기타도 잘 치고 생각도 깊으며 사려 깊은 배려 또한 갖추고 있었다. 당연히 여자가 꼬이지 않겠는가.
‘내가 모르는 인연도 분명히 있을 거야.’
아직 누군가와 사귀지는 않는다고 했으니까.
그러니까.
“나 말이야, 꽤 티 많이 냈다고 생각하는데.”
은후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왠지 확신이 들지 않더라. 고백해도 네가 받아 주리란 확신이. 그렇다고 은후, 네가 나한테 고백하는 게 그려지지도 않고.”
어느새 도착한 남산, 올라가는 길.
이하연이 자신의 마음을 더 확고히 드러냈다.
‘고백이란 도전이 아니야.’
서로의 감정을 겉으로 표현하여 확정하는 일이지. 그런 의미에서 은후는 확실하게 답을 줄 것 같지 않았다. 아직은 말이다. 그런 묘한 확신이 이하연에게 있었다.
“그러니까 더 다가가려고.”
은후가 흐릿하게 웃었다.
‘그래.’
저 웃음, 잡히지 않을 것 같은 까마득한 미소.
뭔가 안타까웠다.
씁쓸했다.
하지만 이내 빙그레 웃으며 이어지는 은후의 말.
“좋아. 나도 좀 더 노력해 볼게.”
이하연은 안도했다.
“노력?”
“응, 노력. 말하기 힘든 사정이 좀 있어. 그래서 지금 내가 누군가 좋아하고 사귄다는 게 어렵거든.”
은후에게 있어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정말로.
의식하지 않아도 이따금 떠오르는 이세계에서 겪었던 나날들. 그 와중에 목숨을 불태워서 복수를 바라보게 만든 사랑이 있었다. 물론 복수를 이루며 그 사랑은 재가 되었다.
남은 재 또한 현대로 돌아온 이래 언젠가 사라졌다. 정확히는 이미 날아가 버렸다는 걸 은후가 깨달은 것이지만. 그렇기에 이하연을 밀어내지 않은 것이다. 하나 그렇다고 하여 다시 사랑하기엔 은후에게 남은 사랑의 불씨가 없었다. 노력은 하고 있었지만 쉽지 않았다.
‘간신히 불을 붙인 것 같지만.’
커지질 않았다.
사랑이라는 불길은 본디 한번 붙으면 확 타오르기 마련인데.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언젠가. 가능하다면.”
“응.”
“그것도 노력할게. 그리고 내가 먼저 고백할 수 있도록.”
“내가 먼저 해도 되거든?”
“그래도 되고.”
은후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아까처럼.
하지만 이하연은 그 웃음에서 아득함을 느끼지 않았다. 여전히 흐릿하기는 했으나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 *
남산을 갔다 온 이래 은후와 이하연은 한결 더 서로가 편해짐을 느꼈다. 확실하게 친구 이상, 연인 사이는 아니지만 그에 가까운 사이라는 걸 인식했으니까.
남들이 바라보기에는 어엿한 연인 사이로 보였다. 당장에 팔짱을 끼고 돌아다니고 있었으니까. 젊은 두 남녀가 그러고 있는데 누가 연인 사이로 보지 않을까.
‘좋다.’
그건 남산에 올라가며 고했던 대로 이하연이 한층 더 용기를 내어 다가간 행동이었다. 처음에 은후도 잠깐 당황했으나 이내 자연스레 웃으며 자연스레 이하연을 편하게 배려했다.
“그나저나 하연아.”
“응?”
“닿고 있는데.”
“뭐가?”
이하연이 빙그레 웃으며 일부러 물었다. 은후가 이하연의 목 아래를 눈으로 가리켰다.
“난 모르겠는데.”
너무 좋다는 듯 생글거리는 이하연.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이는 은후. 누가 봐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하물며 둘 다 외모 또한 빼어났으니.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와중에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둘 다 크게 개의치 않았다. 이하연은 어렸을 때부터 이미 익숙했고, 은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외모 때문은 아니었다. 외모가 눈에 띄게 바뀐 건 현대에 와서 깨달음을 얻은 이후였으니. 이세계에서 그랬다. 이세계에서 마법사로 이름을 날리며.
‘특히 복수를 위해 날뛸 때는.’
수많은 시선이 두려움을 품고, 때로는 은후와 마찬가지로 복수심을, 또 누군가는 황제의 충성심을, 대부분 공포였으나 그 외에도 참 다양한 감정을 품은 눈동자가 은후를 향했다.
“슬슬 돌아갈까.”
“뭔가 아쉬운데.”
남산에서 내려와서 딱히 목적지를 정해 두지 않고 돌아다녔다. 은근히 볼거리는 많았다. 서울 타워라든가, 남산골의 한옥 마을이라든가.
“다음에 또 보면 되지.”
“그런가.”
“그리고 이사할 곳 정해지면 알려 줄게. 그런데 전주 시내가 아닐 수도 있어. 가깝기는 하겠지만. 아예 집을 지을 생각도 하고 있거든.”
“집을 지어?”
이하연이 깜짝 놀랐다.
“응. 그래도 차 끌면 금방일 거야.”
집을 짓는다.
예기치 못한 말이었다.
‘그래도 뭐, 가깝다고 하니까.’
나도 차를 사야 하나.
‘매번 은후보고 데리러 오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면허는 다행히 진즉 따 놓았다. 차도 사고자 하면 못 살 것도 없었다. 딱히 사치한 적은 없었으니까. 그렇지 않았다면 전주로 이사할 결심은 못 했을 것이다.
“시내가 아니라면 어디 외곽 마을에 짓게?”
“글쎄, 정확히 아직 정한 건 아니라서.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은후는 이하연과 함께 용산역으로 돌아왔다. 도착했을 때는 노을이 거의 사라져 가고 있었다. 조금만 더 지나면 해가 완전히 모습을 감출 터였다.
“이제 전주로 내려갈 거야?”
“오늘은 하룻밤 적당히 근처에서 자고 가려고.”
“그럼 좀 더 같이 있어.”
“그럴까?”
“안 그래도 너 오면 같이 가고 싶었던 칵테일 바 있었거든.”
* * *
은후는 페럿을 맡겨 둔 동물 병원 근처 고층 빌딩 꼭대기에서 해가 뜨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새벽에 이하연과 헤어진 후 따로 방을 잡지 않고 대리 기사를 불러 동물 병원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차 안에서 잠깐 눈을 붙였다. 곧 해가 떠오르고 취기도 마나로 날리면 그만이었기에 굳이 방을 잡아야 할까 싶었던 것. 은후는 그렇게 한동안 동물 병원이 문을 열 때까지 하늘을 바라봤다.
‘맑네.’
그저 멍하니,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시간을 보내는 건 참 오랜만인 것 같았다. 지금 이 순간, 은후는 마법에 관한 생각도 아예 하지 않았다. 그저 하늘의 푸르름을 즐겼다.
“빈혈이 좀 있는 것 같기는 한데 그 외에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밥만 잘 먹이면 될 것 같아요.”
은후는 필요한 예방 접종을 해 달라고 부탁했다. 단순한 예방 접종조차 일반 동물 병원에서 한다면 페럿의 경우 쇼크 등으로 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페럿을 제대로 봐 줄 수 있는 동물 병원은 국내에 정말 소수였다. 애초에 우리나라에서 키우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방 접종비도 꽤 비쌌다.
“직접 키우시게요?”
“그렇게 되었네요.”
“결심이 쉽지 않으셨을 텐데요.”
“그냥 지나쳤다면 모를까, 주웠으니 책임져야죠.”
“주의해야 할 점을 좀 알려 드릴까요?”
수의사의 호의에 은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만큼 마음도 잘생겼네.’
그래서 일부러 마진도 남기지 않고 계산해 줬다.
딱 원가만.
“이동장 사셔야 한다고 하셨죠? 하나 선물로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페럿을 데리고 은후는 차를 끌고 전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일부러 이동장에 넣어 두지는 않았다. 갑갑해 보였기 때문이다. 페럿은 연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호기심을 표했다.
“뀨.”
페럿은 은후의 어깨에 올라탄 뒤 차창 밖에 시선을 던졌다.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이 자동차 내부보다 더 신기한 모양이었다. 은후는 이왕 차를 운전하고 있는 김에 전주 남쪽으로 향했다.
집을 지을 곳을 찾기 위함이었다. 위쪽과 서울로 올라가기 위한 전주 북쪽은 살폈으나 아래쪽은 아직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내 웃을 수 있었다.
‘이런 곳이 있었구나.’
전주의 남쪽 석구동, 논과 밭이 가득한 평야. 영맥의 흐름이 교차하고 있었다. 전주에 흐르는 큰 영맥. 그리고 더 남쪽에서부터 타고 올라오는 영맥. 은후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또 하나의 흐름이었다.
영맥이란 땅이 품은 마나의 길이니, 그 길은 하나가 아니고 여럿이었다. 그리고 석구동에는 두 흐름이 맞물리고 있었다. 은후는 고민을 끝냈다.
‘여기가 좋겠어.’
적어도 전주시에서는.
‘어느 정도 외곽까지 포함한다고 해도.’
여기가 제일이지 않을까 싶었다.
‘어쩔까.’
전주 유지인 이창석에게 부탁할까.
잠깐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이 일대를 송두리째 살 것도 아니니, 적당히 근처 부동산을 들르기로 했다.
‘시세 같은 건 미리 알아보고 가야지.’
또 혹시 모르니 다시 한번 확인하지 않으면. 그렇게 생각하며 은후는 덕진 공원으로 차를 몰았다. 이윽고 덕진 공원 주차장에 도착했다.
“은후다!”
언제나처럼 은후의 기척을 느낀 수호령이 쪼르르 마중 나왔다.
“별일 없었지?”
“응응. 어?”
수호령이 여전히 은후의 어깨에 올라타 있는 페럿을 보며 물었다.
“어깨에는 뭐야?”
“페럿. 오다가 주웠어.”
은후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수호령이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빴다. 그래도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수호령이 조심스레 은후에게 다가가 페럿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페럿이 조심스레 코를 가져다 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