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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의 인생 룰루랄라-79화 (79/170)

제79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확연하게 새벽에 비하여 가늘어진 비였다. 그래서 딱히 운전하는 데는 불편함이 없는 수준. 그래서 고속도로에서 과속하는 이도 적지 않았다.

‘저러다 잘못하면 사고 날 텐데.’

은후가 절로 혀를 찼다.

‘뭐,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규정 속도.

안전을 위하여 도로마다 속도의 제한을 걸어 둔 것이다. 하지만 막상 그 속도를 지키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어떠한 도로든, 시내와 시외를 막론하고.

차가 밀리거나, 혹은 소위 말하는 흐름에 따라 과속하거나. 문제가 되는 경우는 대개 후자였다. 운전하다 보면 어쩔 수 없다는 스스로 합리화하며 사람들은 대부분 속도를 높이기 마련이었다.

‘쯧.’

그래도, 맑은 날이라면 모를까. 얇다지만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는데, 과속하는 차가 좋게 보이진 않았다. 은후는 속으로 연신 혀를 차며 운전에 집중했다.

또 한편으로는 영맥의 흐름을 살폈다. 사고를 두 개로 나누어서. 거리의 제약을 두지 않기로 마음먹었기에 집을 지을, 혹은 집을 살 곳을 편하게 고민했다.

‘저기도 괜찮을 것 같은데.’

확실히 선택지가 확 넓어졌다. 은후는 후보지를 몇 군데 고르며 우선순위를 정리했다. 어지간하면 돈으로 해결할 수 있겠지만 그러지 못할 가능성도 있으니까.

‘예컨대 선산이라든가.’

아니.

‘아무리 선산이어도 거부할 수 없을 정도의 돈이라면 웬만해선 팔겠지.’

무덤이야 이장하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돈이 참 좋아.’

그래서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돈은 귀신도 부린다고.

그건 이세계에서도 비슷했다. 물론 현대와 다르게 무력이 직접 쓰이는 곳이었기에.

‘음?’

그런 은후의 생각이 멈췄다. 고속도로 갓길에 버려진 상자 하나가 은후의 감각에 걸린 탓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도 영맥의 흐름을 좇기 위해 넓게 퍼트린 마나에 꺼져 가는 생명이 느껴졌다.

“후.”

은후가 갓길에 차를 멈췄다. 그냥 지나치기엔 살고 싶다고 외치는 가련한 생명이 마음에 걸렸다.

‘나도 참.’

이세계에서였다면 신경도 쓰지 않았을 터인데.

‘새삼스럽다지만 나도 참 많이 바뀌었어.’

상자에는 은후가 예상치 못한 동물이 상처 입은 채 얇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페럿.

족제빗과 동물 중 유일하게 가축화된 동물. 하루에 약 스무 시간을 잠으로 보내고 네 시간 정도를 활동한다. 문제는 눈을 뜨고 있는 동안 활발해도 너무 활발하다는 것이다.

사람이 감당하기 어려운 개를 소위 X랄견이라 부르는데, 그에 버금갈 정도로. 더불어 특유의 냄새와 대소변 냄새가 지독하기로 유명했다. 그래서 사육 난이도가 적잖은 동물이었다.

‘나이는 어린 것 같은데.’

분명히 사람이 버렸겠지.

‘누가 버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은후는 일단 상자를 집은 뒤 차에 탔다. 그리고 페럿의 젖은 몸을 말리고 상처를 치유했다. 마법으로. 단순한 외상 정도라면 은후에게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더불어 마나도 넉넉하게 주었다. 이제 페럿에게 필요한 건 시간뿐이었다.

‘잠들었나.’

본능적으로 이제 살았다는 안심에.

* * *

은후는 이하연을 만나기 전에 용산역 근처의 동물 병원을 찾았다. 혹시 모르는 일이니 고속도로를 타며 구조한 페럿의 상태를 현대 과학 기술로 체크하기 위함이었다.

더불어 이하연과 만나는 도중에 페럿을 계속 신경 써 주기는 어려우니 맡기려는 목적도 있었다. 하지만 은후가 찾은 병원의 수의사가 거절했다.

“페럿은 제가 책으로만 봐서요. 아는 병원 소개해 드릴 테니 그쪽으로 가시겠어요?”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기에 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는 길에 하연이 집에 들러야겠네.’

은후가 이하연이 사는 아파트로 차를 몰았다. 용산역에서 그리 멀지 않았기에 도착하는 건 금방이었다. 아파트 입구에서 미리 서 있던 이하연이 은후의 차를 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모르는 사람이라도 절로 입꼬리가 올라갈 만큼 보기 좋은 미소와 함께. 은후는 피식 웃으며 뒷좌석에 있던 우산을 가지고 차에서 내렸다.

“왔어?”

“응.”

“오랜만이다.”

“오랜만이라고 하기엔 만난 지 한 달도 안 되지 않았나. 문자나 통화도 꽤 자주 했고.”

“에이, 눈치 없기는.”

이하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은후의 말을 끊었다.

“3주면 충분히 오랜만이지. 그리고 문자랑 통화랑은 별개. 직접 보는 거랑 다르잖아.”

“그거야.”

“난 되게 보고 싶었는데, 은후는 아니었나 보네.”

“그…….”

이제는 숨기는 기색도 없이 거의 대놓고 감정을 드러내는 이하연의 모습에 은후가 멋쩍게 웃은 뒤 진지하게, 그리고 솔직하게 답했다.

이 정도면 어지간히 둔감한 것이 아니라면, 아니, 정말 둔감한 사람이라도 모르기 힘들 정도였다. 무슨 러브 코미디 만화 속의 주인공이 아니라면. 그래서 은후도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다.

“되게까지는 아니지만.”

“아니지만?”

“그래도 네 얼굴 생각은 나더라.”

“정말?”

“이런 거로 거짓말해서 뭐 하게.”

“그치. 응, 그렇지.”

이하연이 활짝 웃었다.

‘그래.’

그거면 되었다.

아니, 그게 어디인가 싶었다.

은후도 아예 마음이 없지는 않은 것 같으니.

‘이렇게 조금씩.’

조금 서운해지려던 감정이 싹 사라졌다.

“그런데 타투 했어?”

“타투는 아니고 스티커. 그…… 어때?”

목과 쇄골 사이를 가로지르는 라틴어 문자.

뜻은 좋아하고 있어요.

의미를 알게 된다면 되게 노골적인 말. 하지만 옷에 가려진 덕분에 은후가 알아볼 수 있는 건 ‘하고 있어요’였다.

‘뭘 하고 있다는 거지?’

이하연은 설마 은후가 라틴어를 해석할 수 있으리라곤 생각지 않았다. 그래서 한참을 고민하다 용기 내어 스티커를 붙였다. 알아봐 주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지만 아직은.

자신이 생각해도 적잖은 티를 냈기에 짐작은 하고 있겠지만. 확실하게 말로 표현하는 것과 짐작은 또 다르니까. 혹여나 은후가 글자를 기억했다 인터넷에서 찾아보고 알아봤으면. 아니면 아예 몰랐으면. 그런 모순적인 마음이 이하연의 가슴을 어지럽혔다.

‘나중에 사귀고 나서.’

몰래 먼저 고백했다고 말하면 어떨까 싶기도 했다. 그런 이하연의 망상을 은후의 말이 더욱 부채질했다.

“잘 어울리네. 일부러 액세서리랑 옷도 맞춘 것 같은데, 머리도 그렇고. 그나저나 머리카락 길이 보니까 저번에 만났을 때랑 거의 비슷한데 최근에 잘랐어?”

스타일에 관한 칭찬은 자주 들어 봤다. 물론 은후에게 들은 칭찬이니까 더욱 좋지만 그렇게까지 특별한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머리카락 길이라니.

‘어떻게 알아봤지.’

아니, 알아볼 수 있으면 못 할 것도 없나. 무슨 특별한 방법이라도 있는 걸까. 여하튼 중요한 건 그만큼 은후가 자신을 신경 쓰고 있다는 의미니까. 그래서 이하연은 무척 기뻐하며 말했다.

“오늘 아침에.”

“오늘?”

“응. 기왕이면 좀 꾸미고 나오고 싶어서.”

“그런가. 예쁘네.”

진솔하면서도 담백한 은후의 한마디에 이하연의 볼이 빨개졌다. 아침부터 분주하게 고민한 보람이 있었다. 그때 이하연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크게 났다. 어제저녁부터 쭉 굶은 탓이다.

‘방송 끝나고 입맛 없어도 뭐라도 먹고 잘걸.’

이하연의 볼이 좀 더 달아올랐다.

“일단 뭐라도 먹으러 갈까?”

이하연 본인이 생각해도 꽤 큰 소리였다. 분명히 은후도 알았을 텐데 일부러 모른 체해 주는 배려에 이하연은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이며 우산을 펼치려 했다. 그때 은후가 이하연의 손을 잡은 뒤 자신의 우산에 이하연을 들어오게끔 했다.

“어?”

“불편해?”

“아, 아니. 불편하지는 않은데.”

“그럼 됐네.”

은후가 이하연을 이끌고 이동한 뒤 보조석의 문을 열어 주었다.

“얼른 타.”

“응.”

이하연은 어느새 놓인 손이 못내 아쉽다고 느껴졌다.

‘베르가못인가?’

같이 우산을 쓰며 가까이 밀착했을 때 맡은 무척 상큼한 향.

‘으.’

은후가 운전석에 탄 뒤 피식 웃으며 이하연에게 말했다.

“안전벨트 매고.”

“매 줘.”

이하연이 한층 더 용기 내 은후에게 말했다. 이하연이 가지고 있던 일종의 로망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혹은 남자 친구가 안전벨트를 매어 주는 것.

“응?”

“안 돼?”

“안 되는 건 아닌데.”

“그럼 됐네.”

이하연이 빤히 은후를 바라봤다. 무언의 요구였다. 은후는 피식 웃으며 순순히 조수석의 안전벨트에 손을 뻗었다. 자연스레 몸이 기울어졌다.

‘베르가못 맞네.’

긴가민가했는데.

“향 좋다.”

“향?”

“향수 뿌린 거 아니야? 베르가못 향인 것 같은데.”

“아.”

향수를 뿌린 건 아니었다.

아까 마법을 써서, 치유 마법을 쓰면서 묻어나게 된 향이었다. 치유 마법의 특성으로 그 향은 일반인도 맡을 수 있었다.

“그나저나 뭘 하고 있다는 거야?”

은후는 일부러 주제를 자연스레 돌렸다.

“뭘 해?”

“타투 스티커 말이야. 뒤에 무슨 말이 더 있는 것 같은데.”

“라틴어 읽을 수 있었어?”

“조금. 그래서 뭘 한다는 거야?”

“그, 어, 으.”

이하연이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그러다가 옷 때문에 가려진 글자가 있어서, 그래서 은후가 그 뜻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걸 상기했다.

“비, 비밀.”

“비밀이라기엔 너무 대놓고 붙인 것 같은데.”

아니.

‘이게 아닌데.’

라틴어를 왜 알아보는 건데.

그때 뒷좌석에 있는 상자에서 페럿이 울며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뀨.

꾸.

뀨꾸.

“족제비?”

“정확히는 페럿이야. 긴털족제비의 아종 중 하나래. 과거에는 토끼 사냥에 쓰였다고 하더라.”

아까 동물 병원 수의사가 말한 TMI(과한 정보) 중 하나였다.

“너 만나러 오는 길에 버려져 있는 걸 주웠어. 사람한테 버려진 것 같더라.”

“아.”

“고속도로 갓길에 발견했어. 너무 불쌍하더라고. 그대로 내버려 두면 죽을 게 뻔한데.”

“진짜 나빴다.”

이하연은 은후의 말에 동조하며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타투 스티커에 관한 건 어찌어찌 넘어갔네. 최대한 조심해야지. 아니면 상황 봐서 은근슬쩍 보여? 아우.’

그리고 화도 꽤 났다.

버리다니, 그것도 고속도로에.

그건 그냥 죽으라는 말과 다름없지 않은가.

“아침 먹기 전에 잠깐 동물 병원에 들르자. 쟤 좀 맡기고 간단하게 검진도 시키려고.”

“응.”

페럿은 상자를 벗어나려고 애쓰며 연신 울었다. 하지만 너무 지쳐서 그런지 그게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저대로 둬도 돼? 운전할 때 잘못하면 사고 날 수도 있지 않을까?”

이하연의 지적은 지극히 상식적이었다. 은후는 아무리 페럿이 날뛰어도 절대 사고 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별생각이 없었다.

설령 페럿이 자신의 눈을 가리거나 운전대를 장난감 삼아도 마나를 움직이거나 여차하면 마법을 쓰면 되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사정을 이하연에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많이 지쳐서 낑낑거리는 거 보면 괜찮을 것 같기도 한데.”

“그래도.”

“그럼 상자만 닫아 둘까.”

“아니, 그러지 말고 잠깐만 기다려. 내가 집에서 이동장 가져올게.”

“이동장?”

“응. 예전에 고양이 키웠거든.”

이미 죽어 버린.

“말 안 했었지?”

“처음 들어.”

“지금은 괜찮은데 좀 힘들었었어. 하필 랭랭이가 떠날 때 직장에서 따돌림당하던 시기이기도 했고.”

“이름이 랭랭이었나 보네.”

“응. 여하튼 다녀올게.”

죽어서 추억에 남은 고양이. 그리고 차마 버리지 못한 몇몇 물품들. 이동장도 개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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