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의 인생 룰루랄라-78화 (78/170)

제78화

수호령이 처음으로 덕진 공원에서 멀리 벗어난 날의 아침,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몇 시지?’

이하연은 눈을 떴다.

‘6시…… 조금 넘었구나.’

이르다면 이른 시각이었다. 평소라면 푹 잠들었어야 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절로 정신이 들었다.

‘다시 자자.’

하지만 눈을 감고 한참이 지난 것 같은데 이하연은 잠들 수 없었다.

‘아우.’

조금 짜증이 났다.

이따금 이런 날이 있다. 평소보다 짧은 수면 시간, 다시 잠들고 싶어도 잠들 수 없는 날.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닌데. 다행인 점이 있다면 오늘과 내일은 쉬는 날이라는 것.

하지만 이하연에게 있어서 쉬는 날은 딱히 쉬는 날이 아니었다. 방송하지 않는 날에는 대개 편집에 관해 공부했으니까 말이다. 이하연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오늘은 푹 쉴까.’

공부하지 말고.

“으우우우.”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창문을 열었다. 완연한 가을이라고 불러도 좋은 시기였기 때문일까. 공기가 꽤 싸늘했다. 애매하던 점이 완전히 달아나는 것 같았다.

‘오늘 오전까지는 계속 비라고 했지.’

은후는 뭐 하고 있으려나.

‘비가 오는 날이 좋다고 했었지.’

비, 딱히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좋아했던 때도 있었다. 어렸을 때는 꽤 많이. 이유는 단순했다. 장화를 신을 수 있는 날이어서. 하지만 나이를 먹고 그런 좋음도 흐릿해졌다.

공무원 생활을 했던 때에는 꽤 싫어했던 것 같은데. 출근하는 길이 힘들어져서, 우산을 챙기는 것도, 차가 밀리는 것도. 그러나 요새는 좋아졌다. 이유는 간단했다.

은후가 좋아하니까.

‘일어났으려나?’

중증이구나.

자신의 감정을 자각한 이하연은 얼굴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기분 탓이 아니라 실제로 그러하겠지. 지금 연락하면 받아 주려나. 아니, 귀찮게 하지 말자.

‘올빼미형이니까.’

이하연은 못내 아쉬워 핸드폰을 노려보다가 컴퓨터를 켰다.

‘놀러 가면 귀찮아하려나.’

그렇다고 은후한테 오라고 하기도 그렇고.

‘보고 싶다.’

전주에서 용산까지 KTX를 타면 금방이라지만, 다시 돌아갈 길을 고려하면 적잖은 시간이 걸렸다.

‘에휴.’

이하연은 언제나처럼 브이튜브에 접속했다. 개개인이 동영상을 자유로이 올릴 수 있는 비디오 플랫폼. 취미로 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아예 업으로 삼는 사람도 적잖았다. 왜냐하면 돈이 되기 때문이다.

광고 수익. 이하연도 최근 들어 유의미한 수익이 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용돈 수준에 불과했는데, 광고 제안도 몇 번 들어왔다. 문제는 영상 시청자에게 광고라는 걸 들키지 말라는 조건이 있었기에 거절했지만 말이다.

‘미래에는 더 커질 거라고 했지.’

이곳도 은후가 추천해 줬다. 방송하면서 병행하라고. 금전적으로 도움이 될 거라며. 그 전까지 이하연은 브이튜브의 존재를 몰랐다.

‘신세계였……어?’

엄청난 알람 표시.

999+. 이 경우에는 댓글이 엄청나게 달렸다는 의미였다. 비슷한 상황을 몇 번 겪은 적이 있어서 이하연은 금세 상황을 파악했다. 문제는 이 정도의 숫자는 이하연으로서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

‘윽.’

무슨 문제가 터진 건 아니겠지.

‘논란이 될 만한 내용은 없었던 것 같은데. 그리고 최근에 올린 영상이라곤 브이로그 영상밖에 없는데.’

되도록 처음부터 그러한 내용이 담긴 부분은 편집하라고 은후가 충고했고, 이하연도 충실히 지켰다. 인터넷의 악랄함을 이하연도 알았으니까.

이하연은 크게 심호흡한 뒤에 조심스레 알람 버튼을 클릭했다. 그리고 조마조마하며 댓글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용은 이하연의 예상과 다소 달랐다.

‘뭐, 뭐야.’

영어의 향연. 이따금 프랑스어나 이하연이 모르는 언어도 섞여 있었다. 이하연은 얼마 전 은후와 데이트하며 찍었던 영상을 두 개로 나누어 올렸다.

하나는 차 리뷰와 먹방 등의 데이트 과정을 적절하게 담아서, 다른 하나는 덕진 공원 호수에 배를 띄우고 은후가 기타 연주를. 댓글이 무수하게 달린 건 후자였다.

- 내가 알던 〈월광〉이 아닌데? 처음 듣는 〈월광〉이야. 그런데 너무 좋다.

- WTF……!

- 믿을 수 없어ㅋㅋ

- 편집이 좀 아쉽기는 한데 그래서 더 좋네.

∟ 아쉬운데 더 좋다니 무슨 말이야?

∟ 아마추어의 감성이 장난 아니잖아. 프로라면 더 깔끔하고 보기 좋게 했을 거야. 공들인 티가 팍팍 나는데 옛날 생각 난다.

∟ 그럼 아쉬워해야 하는 거 아님?

∟ 감성을 모르네 lol.

아무래도 브이튜브 알고리즘의 선택을 받은 것 같았다. 그리고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해외 시청자들이 무수하게 몰린 것 같았고.

- 제일 아쉬운 건 오디오야. 영상이야 둘째치고.

- 홀리쉿!

- 편곡이 절대 아마추어 수준이 아닌데 대체 누굴까? 저 기타리스트가 편곡한 걸까??

- 〈월광〉을 이렇게 편곡할 수도 있다니…… 진짜진짜진짜진찌잔.

- 묘하게 중독적이네, 밤샘 근무하며 계속 반복 재생하고 있는 중.

상황이 어쨌건 이하연이 우려했던 논란이 있는 건 아니었다. 아니, 논란이라면 논란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매우 긍정적인 논란 말이다.

- 인생곡이 〈월광〉인 사람인데 이 〈월광〉은 이 영상에서 처음 공개된 것 같음. 브이튜브나 구글신이나 하여간 어디를 뒤져도 이 〈월광〉의 곡조는 보이지 않음.

사람들은 영상 속의 기타리스트가 누군지 무척 궁금해 했다. 또 월광의 편곡자가 대체 누군지까지도. 이하연은 한동안 댓글을 쭉 살핀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

그러다가 조회수를 확인하고 화들짝 놀랐다.

‘배, 백만?!’

댓글도 댓글이지만 조회수가.

‘어어.’

이러면.

‘영상 수익이.’

이하연은 헤어지며 반 농담, 반 진담으로 영상 수익이 나면 다음에 엄청 비싸고 맛있는 걸 사겠다고 은후에게 말했다. 사실 그건 핑계에 가까웠다. 사실은 그냥 은후에게 평소에 진 신세를 보답하고 싶어서. 그리고 자연스레 만나기 위한 구실로 삼기 위해서.

그런데 이 정도 수익이면 그냥 식사로 퉁치기엔 무리가 있었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은후. 이럴 땐 딱 반으로 나누는 게 맞았다. 자고로 친구 사이에 돈 문제는 깔끔해야 한다는 게 이하연의 신조였다.

‘아직은 친구.’

앞에 두 글자가 붙으면 좋겠는데.

‘전화, 아니, 시간이 아직 이르니까 문자로 남겨 놓자.’

꼭 상의해야 할 일이 있으니 문자 보면 연락 달라고.

‘기왕이면 만나자고 할까?’

걸린 돈이 크니까.

응응, 그래.

사실은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니지만.

이하연은 애써 자기 합리화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 * *

이정수가 돌아가고 얼마 되지 않아, 수호령도 가야겠다고 아쉬운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다음에 또 오렴.”

예상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을 머물러서 다소 마음이 급했다. 물론 아직까지 별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다. 또 덕진 공원에 아이는 현재 아무도 없는 상황이라고 개구리가 전해 왔다.

‘그래도 해가 떴으니까.’

다행히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으니까.

‘아이가 오지는 않으려나?’

아쉬웠다.

좀 더 있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법. 또 이번이 마지막 방문은 아니라는 걸 수호령은 알았다. 수호령은 애써 자신의 감정을 갈무리한 뒤 도깨비 구미호 부부에게 활짝 웃었다.

“응! 또 놀러 올게!”

은후는 수호령을 비롯한 낙원의 주민과 한강으로 향한 뒤 개구리의 도움을 받아 다시 덕진 공원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개구리에게 선물이라며 도깨비 구미호 부부가 싸 준 음식들을 꺼냈다.

“특히 국밥이 진짜 맛있었어! 파전도 맛있었지만!”

“오오오오.”

수호령의 말에 개구리가 눈빛을 반짝였다.

“오, 오, 진짜 맛있다.”

“그치, 그치?”

사람 형상이 아닌 개구리 모습으로 식사하는 건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참 묘한 느낌이었다. 꽤 익숙해졌음에도 그랬다.

“아, 뜨뜨! 령이도 좀 먹을래?”

“나는 많이 먹고 왔어. 그나저나 조심히 먹어야지, 그러다가 혀 덴다?”

“이미 덴 것 같은데.”

“바보.”

아웅다웅하는 개구리와 수호령의 모습에 은후를 비롯한 낙원의 주민 모두가 피식 웃었다.

‘이거 안 싸 왔으면 큰일 났겠는데.’

은후가 피식 웃었다. 다행히 이정수에게 준 거 외에도 국통이 더 있어서 국밥도 싸 올 수 있었다.

‘응?’

그때 은후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짧게 끊어진 진동.

‘문자인가. 그런데 이 시간에 누가?’

스팸 문자이려나.

‘하연이?’

예상이 빗나갔다.

내용도 뜻밖이었다.

‘무슨 일이지?’

상의할 내용이라.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은후가 바로 답장했다.

- 무슨 일 있어?

- 일찍 일어났네?

- 어쩌다 보니.

- 전화로 해도 돼? 목소리 듣고 싶은데.

- 그래, 내가 할게.

은후가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 응, 여보세요.

“무슨 일이야?”

- 아니, 큰일이라면 큰일인데. 나쁜 일은 아니고.

“나쁜 일이 아니라니까 그래도 다행이네. 그러면 좋은 일?”

- 어어, 좋은 일이라면 좋은 일이지? 가능하다면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은데. 내려가도 돼?

은후가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

“오늘 쉬는 날이었지?”

- 응.

“그럼 이번엔 내가 올라갈게.”

- 내가 가도 되는데.

“다음에. 매번 네가 오면 내가 미안하지.”

- 으응.

“예상 도착 시각 문자 남길게. 이따 봐.”

- 응!

오늘은 월요일, 다행히 수업도 없었고.

‘딱히 있어도 상관은 없지만.’

낙제를 당하지 않을 성적만 받으면 되었다. 은후는 KTX를 탈까, 아니면 자동차를 끌고 갈까 잠시 고민했다.

‘개구리의 도움을 받는 게 편하긴 하겠지만.’

흔적은 남겨야 하니까. 대뜸 전주에 있던 사람이 순간 이동한 것처럼 용산에 나타난다면 문제가 될 소지가 있었다. 오늘 새벽처럼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아예 사람과 만나지 않을 생각이라면 모를까.

‘그 할아버지는 좀 예외고.’

은후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차를 끌고 가자.’

좀 번거롭기는 하겠지만.

‘아예 집을 짓는 것도 좋겠어.’

영맥이 흐르는 곳을 알아볼 겸, 차를 타고 가면서 마나를 넓게 퍼뜨려서 지형을 확인하자.

‘굳이 덕진 공원 근처를 고집할 필요는 없지.’

이동이 쉬우면 그만 아니겠나.

영맥이 흐르는 곳이라면 그게 가능했다. 여차하면 워프 게이트를 설치하면 그만이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오히려 도시가 아닌 곳이 나을 수도 있었다. CCTV나 블랙박스의 숫자가 확연히 적을 테니까. 또한 사람들도 그러하겠지. 집도 취향대로 지을 수 있을 터.

은후가 수호령을 비롯한 낙원의 주민에게 인사한 후 덕진 공원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자동차 시동을 걸며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했다.

* * *

은후와 통화한 후 이하연이 헤실거리며 웃었다.

‘얼굴 볼 수 있겠구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는 좀 부족했다.

‘뭐가?’

뭐가 부족할까.

이하연은 너울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무심결에 메일함에 들어갔다.

‘어?’

메일도 평소와 다르게 잔뜩 와 있는 상태였다. 상당수가 은후와 관련된 메일들이었다. 물론 쓸데없는 메일도 많았다.

‘저작권 등록은 했냐고?’

이따 물어봐야지.

‘그나저나 옷은 뭘 입을까.’

이하연이 메일을 확인하다 말고 옷장을 열었다.

‘메일 같은 건 미리 나가서 기다리면서 핸드폰으로 확인하면 되니까.’

아.

‘문자 왔다.’

네 시간 후에 집 근처에 도착할 것 같다고.

‘집?’

집까지 마중 온다는 걸까.

‘집까지는 안 와도 되는데.’

그나저나 무슨 옷을 입어야 더 예쁘게 보일까. 이하연이 저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