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화
수호령이 할아버지에게 말을 건 까닭은 눈동자에 어린 쓸쓸함 때문이었다. 무언가 찾고 있는 듯한 아련함에서 비롯되는 가냘픔. 언뜻 잔잔해 보이나 그 속에 있는 건 사무친 과거.
“그래요. 안녕하세요.”
“좋은 날씨죠?”
비가 거세게 내리는 밤이었다. 물론 비가 자아내는 소리는 경쾌했다. 또한 하늘에 뜬 달은 줄기찬 비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지만, 좋은 날씨라고 보기엔 별로인 것 같은데.
“허허.”
그래서 그냥 웃고 말았다. 굳이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그제야 이정수의 눈에 수호령의 이상함이 감지되었다. 따뜻한 목소리와 다르게 존재감이 흐릿했던 것이다.
‘어?’
게다가 한 청년의 얼굴이 낯이 익었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분명히 최근에.
‘아.’
TV에서, 뉴스에서 봤다.
분명히 이름이.
‘서…… 서 뭐시기였던 것 같은데.’
평범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정수가 수호령을 비롯한 낙원 주민들의 모습을 인식할 수 있었던 건 마나에 민감한 체질, 그리고 은후의 배려 덕분이었다.
구미호가 말하길 오랜만에 낙원의 주민 외에 다른 인간이 손님으로 올 것 같다고 했다. 그 손님은 눈앞의 할아버지를 뜻하는 것일 터. 그래서 약간의 마나를 이정수의 몸에 불어넣었다.
‘내 도움이 아니어도 주점 안으로 들어간다면 전부 볼 수 있었겠지만.’
수호령이 은근히 신경 쓰는 것 같았으니까.
“일단 다들 안으로 들어오실까요?”
“그러죠.”
구미호의 말에 은후가 맞장구치며 주점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 뒤를 서연후와 성호가 뒤따랐다. 이정수는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일이 꿈인가 싶어서 고개를 휘휘 저으며 손을 우산 밖으로 뻗었다.
“할아버지, 우리도 들어가요.”
“…….”
“할아버지?”
“허허, 꿈은 아닌 것 같은데.”
손에 떨어지는 차가운 빗방울의 감촉이, 귀에서 들리는 수호령의 목소리가 이정수에게 현실감을 부여했다. 그럼에도 꿈처럼 느껴지는 건 어째서일까.
“그래요. 들어갑시다.”
어차피 죽을 날이 머지않은 마당이었다. 꿈이건 현실이건 무에 문제랴.
* * *
이정수가 주점 안으로 들어가자, 도깨비의 호탕한 목소리가 반겨 주었다.
“어서옵셔!”
딱 봐도 도깨비였다.
도깨비.
‘정말로.’
아내와 함께 왔다면 더 좋았을 텐데.
“이쪽으로.”
구미호의 안내에 자연스레 은후와 합석하게 되었다. 수호령이 잠깐 이정수를 바라본 뒤 도깨비에게 외쳤다.
“삼촌! 나 배고파!”
“오야! 쪼매만 기둘려라!”
구미호가 입가를 가리며 쿡쿡 웃은 뒤 파전과 완두콩을 내왔다. 그리고 남편인 도깨비의 술병을 가져와서 은후에게 먼저 한 잔 따라 주며 말했다.
“그거 아시나요? 도깨비의 호리병이 보물이라 불리는 진짜 이유를.”
무한히 술이 쏟아져 나온다.
힘을 담으면 담을수록 맛도 양도 좋아진다.
“그 외에 또 하나 이유가 있답니다. 따르는 사람마다 술의 맛이 변하죠. 이게 진짜 이유죠.”
따르는 이의 가장 선호하는 맛을 낸다.
“저희 부부가 결혼식을 올릴 때 받은 귀한 술이 있어요. 원본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비슷한 맛이 날 거예요.”
“거, 그 술은 너무 밍밍하지 않으? 향이 엄청 좋기는 한디, 도수가 영 약혀.”
남편의 잔소리를 구미호가 자연스레 무시하며 수호령을 제외한 이들에게 모두 한 잔씩 따라 주며 말을 이었다.
“한 잔씩밖에 못 드려서 죄송해요.”
대체 무슨 술이기에.
“이모, 이모.”
“응?”
“나는?”
“호호.”
구미호가 입가를 가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솔직히 구미호는 수호령에게 술을 줘도 상관이 없다 여겼으나, 아무래도 은후의 눈치가 보였다.
“거! 임자! 거, 있잖수!”
도깨비의 참견에 구미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분위기라는 게 있는 법인데.
‘타이밍을 봐서 주려고 했건만.’
구미호는 속으로 한숨을 폭 내쉬며 수호령을 위해 준비해 둔 식혜를 내왔다.
“이건 우리 령이 거. 술은 은후 도령께서 안 된다고 하니까.”
“우움.”
“정말 신경 써서 만들었으니까 말이야. 그래서 양도 얼마 안 돼. 령이 외엔 주기 힘들 정도로 말이야.”
“정말?”
“그럼.”
수호령이 식혜를 마시고 크게 외쳤다.
“엄청 맛있어!”
수호령의 솔직함에 구미호가 뿌듯하게 웃었다. 만드느라 정말 힘들었으니까. 그렇기에 수호령의 반응에 보람을 느꼈다. 그리고 그런 수호령을 지켜보던 은후가 술잔을 들며 말했다.
“다들 건배할까요?”
낙원의 주민들이 술잔을 들었다.
“할아버지도요.”
이정수도 은후의 말에 술잔을 들었다. 그리고 서로 잔을 부딪쳤다.
“오.”
모두가 절로 감탄했다.
‘자랑할 만하네.’
무슨 술인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술이다.
그것만큼은 마시는 순간 모두가 알 수 있었다.
그때 도깨비가 외쳤다.
“자! 다들 국밥 한 뚝배기씩 하시구려!”
이정수는 술의 맛에 감탄하다가 눈을 일부러 몇 번이나 깜빡였다. 뚝배기가 허공을 날아서 각자의 앞에 내려앉았으니.
‘허.’
도깨비와 구미호가 운영하는 주점이라.
‘변장이 아니었구나.’
진짜로 도깨비와 구미호였어.
“여기는 대체…… 허허.”
“좋은 술이 있습니다. 맛있는 음식이 있죠. 완두콩이나 파전도 맛이 무척이나 좋은데, 주점에 그거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이정수가 은후의 말에 완두콩을 하나 입에 넣었다.
‘과연.’
그래, 주점에 좋은 술과 맛있는 음식이 있는데 무어가 중요하랴.
“은후 도령을 초대한다고 해 놓고 평범한 음식을 내놓을 수 없죠.”
구미호가 부드럽게 웃었다.
애써 힘껏 준비한 보람이 있었다.
“화와와, 후웁.”
순대국밥도 그러했다. 그래서 수호령과 서연후는 정신없이 국밥을 먹고 있었다. 성호의 경우엔 국밥을 몇 번 숟가락으로 떠먹더니 기타에 손을 뻗었다.
“노래도 있으면 더 좋겠죠.”
성호가 잠시 고민하다 이정수에게 물었다.
“혹시 신청곡 있으실까요?”
“나 말이요?”
“네, 오늘 아니면 뵙기 힘들 듯싶어서요.”
“그러시군요.”
아내가 좋아했던 곡, 판소리를 대체로 좋아했다.
콕 집자면 〈수궁가〉.
하나 이정수가 판단컨대 성호의 나이는 젊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판소리 연주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가능하다면 〈수궁가〉가 좋겠는데요.”
성호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허허, 아닙니다. 그렇다면 아무거나 좋습니다.”
그때 구미호가 말했다.
“불러 드릴까요, 수궁가. 오랜만에 오신 인간 손님……은 아니시네요. 은후 도령님이 있으니까요.”
구미호의 말에 이정수가 이때다 싶어 서연후를 바라보며 물었다.
“거기 옆 청년은 귀신이요?”
“저요?”
이정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서연후가 멋쩍게 웃으며 답했다.
“맞아요, 귀신.”
귀신이라.
“귀신이요?”
“저도 귀신입니다. 여기서 사람은 은후 씨뿐이죠?”
성호의 말에 이정수가 일부러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두려워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나쁜 귀신들은 아니거든요.”
그때 도깨비가 어디선가 북을 꺼내 왔다.
“오랜만에 한 소절 뽑아 볼까.”
“그래요.”
판소리는 한국의 전통 음악이자 연극으로서 소리꾼 한 명과 북을 치는 고수 한 명, 마지막으로 청중까지 총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진행된다.
“임자가 칠텨?”
“제가 부를래요.”
도깨비가 북을 칠 준비를 했다. 구미호가 어디선가 꺼낸 부채를 잡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구미호의 복장은 어느새 우리나라 전통 한복으로 변해 있었다.
“도깨비와 구미호가 부르는 판소리라. 어디 가서 말한다면 꿈을 꿨냐고 하겠어요.”
“가능하시다면 비밀로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만.”
“비밀이랄 게 있나요. 말해도 믿을 사람이 어디 있으려고. 그러니 말할 생각도 없습니다.”
“그러십니까.”
재밌는 시간은 빠르게 흘러간다고 했던가. 어지간한 명인 저리 가라 할 수준의 판소리 공연이 모두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좋네.’
판소리, 은후는 솔직히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실제로 판소리를 접하니 없던 관심도 절로 생겨날 것 같았다.
‘그나저나 달빛인가.’
〈수궁가〉.
병을 고치기 위해 토끼의 간이 필요한 용왕, 간을 구하러 떠난 별주부(자라), 별주부에게 속아 용궁에 붙들려 간 토끼가 기지를 발휘하여 탈출하는 이야기.
구미호가 말했다.
용왕의 병은 몸속의 조화가 깨져서 발생했다고. 토끼는 달의 기운을 먹고 사는 동물이니, 특히 간에 그 기운이 집중되었기에 용왕에게 그만한 약이 없다고 말이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 기반이 되어 만들어진 노래예요, 〈수궁가〉는.”
판소리 도중 쉬는 시간, 구미호가 설을 풀었다.
“인간들의 입맛에 맞추어 꽤 많이 바뀌기는 했지만요. 애초에 토끼도 보통 토끼가 아니라 실제로는 옥토끼였고요.”
달 속에 산다는 전설의 토끼.
“정말 실제 있었던 일인가요?”
“네, 직접 본 건 아니고 들은 이야기이긴 한데요.”
“누구에게요?”
“제 증조할머님께요.”
“그, 큼.”
은후가 구미호에게 나이를 물으려다 헛기침했다. 굳이 묻지 않아도 어차피 까마득하게 먼 과거의 이야기일 터이니. 꼭 필요한 게 아니라면 여성의 나이를 묻는 건 실례니.
‘그나저나 달빛인가.’
은후가 쉬는 시간이 끝난 후 다시 이어지는 판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조용히 일어났다. 그리고 창문 바깥에 시선을 던지며 하늘을 바라봤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달빛과 함께. 만월에 가까운 달이었다. 은후는 리어카에서 전신 거울을 꺼내어 창문 아래에 내려놓았다.
‘이사 때문에 리어카에 넣어 두었던 거울을 이렇게 써먹네.’
거울에 하늘이 비쳤다. 비가, 달이.
이것도 나름 운치가 있었다.
공연에 방해될까 싶어 다들 말을 하지 않았지만, 은후가 내려놓은 거울에 비친 풍경에 모두 미소 지었다.
* * *
판소리가 끝났다.
적당히 기분 좋게 취했다.
이제는 헤어질 시간.
“우으, 아쉽다.”
“다음에 또 오면 되지.”
구미호가 아쉬워하는 수호령을 달랬다. 이정수가 머뭇거리다가 구미호에게 물었다.
“혹시 순대국밥 하나 포장할 수 있습니까?”
이정수의 말에 구미호가 답했다.
“포장은 안 해서요.”
“어떻게든 부탁할 수 없겠습니까? 아내에게 가져다주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어느 때보다 간절함이 깃든 눈동자였다, 감정 또한.
은후의 마음이 그 감정에 움직였다.
“잠시만요.”
은후가 리어카에서 언젠가 사 놓았던 도시락 용기 중 국통을 꺼냈다.
“여기에다 포장해 주시죠.”
일회용 용기가 아닌 꽤 가격이 나갈 법한 스테인리스 국통이었다. 부담은 되지만 그래도 아내 때문에 망설이는 이정수에게 은후가 웃으며 권했다.
“다음에 오실 때 반납해 주세요.”
“다음에 또 올 수 있겠습니까.”
“비가 오는 날이라면요.”
“비가 오는 날이요?”
“네.”
이정수가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은후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아내의 유골함 앞에 순대국밥을 내려놓으며 오늘 밤 겪은 일을 털어놓았다.
‘집에 들여놓길 잘했지.’
처음에는 납골당에 보관했었다. 하지만 나이를 먹고 매번 찾아가기 힘들어져 집에 안치단, 그러니까 유골함을 보관하기 위한 틀을 집에 주문 제작해서 들여놓았다.
“여보, 오늘 그때 있잖아, 예전에 우리가 처음 만났던 주점 말이야. 거길 다시 갈 수 있었어. 그때 국밥이 참 맛있었다고 그랬지.”
그때 먹은 국밥은 돼지국밥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요. 매번 헷갈리기는.
아내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