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화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밤.
곧 죽을 날을 앞두고 있는 이정수는 혀를 가볍게 찼다.
“쯧.”
비가 오는 날이면 허리가 쑤셨다.
먼 과거,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모두가 아는 6월 25일에 일어났던 전쟁, 그 당시 수류탄이 근처에 떨어지며 온몸에 상처를 입었다. 그때 살아남은 건 기적이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그랬으며, 동료들도 의사도 모두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 상처는 전쟁 이후 평생 이정수를 괴롭혔다. 제대로 힘을 쓸라치면 몸에 통증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할 수도 없었다. 그 와중에 더 불행인 건 상이군경심의에서 탈락했다는 점이었다. 전쟁 당시 수류탄 때문에 다쳤다는 걸 증언해 줄 사람을 구하지 못해서.
‘그 의사 선생이라도 살아 있었다면.’
꼭 살 수 있을 거라며 자신보고 희망을 품으라던, 또 자신의 몸보다 환자를 생각했던 참된 의사. 하지만 전쟁 도중에 죽었다. 그때 사고 당시 근처에 있던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전쟁이 끝난 후 이정수가 인정받은 건 참전유공자 지위였다.
“임자, 보고 있수? 임자는 비가 오는 날을 참 좋아했지. 나는 싫어했지만.”
비가 내리는 날 당신을 처음 봤다며.
“난 기억도 잘 안 나는 날인데 말이여.”
이정수가 기억하는 첫 만남은 해가 쨍쨍한 날이었는데.
“왜 일찍 갔어, 일찍 가기를.”
전쟁 이후 어려운 삶 속에서 서로를 의지하면서 살았다. 하지만 아내는 몇 년 전 세상을 떠났다. 암이라고 했다. 다행히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보험을 들어 뒀던 게 빛을 발했다.
하지만 불행은 췌장암이라는 것. 암 중에서도 최악으로 불리는 췌장암은 결국 아내의 목숨을 앗아 갔다. 이후 나온 보험금은 살림살이를 확실히 낫게 했다.
보일러 교체 비용은 물론 소주나 담뱃값을 걱정하던 날은 사라졌으니.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아내의 죽음으로부터 비롯된 돈인데.
‘자식들도 그렇고.’
1년에 한 번 보기 힘든 자식들이 부쩍 자주 찾아오기 시작한 건 아내의 죽음 이후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뻔했다. 다 그놈의 돈 때문이지 않겠는가.
그래서 돈이 있음에도 이정수는 거의 쓰지 않고 통장에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또 이사도 하지 않고 용산 달동네에 계속 머물렀다. 아내가 남긴 돈을 자식들에게 줘야 할지도 솔직히 고민이었다.
‘아내라면 주라고 했으려나.’
이정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과거를 애써 꾸깃꾸깃 접어 기억 너머로 밀어 넣었다.
‘다시 한번 가 보고 싶네.’
비가 오는 날 아내와 처음 만났던 곳이 그리웠다. 자신은 술에 잔뜩 취해 잘 기억이 나지를 않지만, 장소 자체는 여전히 기억에 선명했다. 지금 누군가에게 말한다면 노망난 게 아니냐는 소리를 듣겠지만 말이다.
도깨비와 구미호 부부가 운영하는 술집.
현재 용산역 근처에 있는 곳.
“가 볼까.”
아내가 죽은 후 이따금 비가 오는 날이면 이정수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용산역 근처를 찾았다.
‘거기서 먹은 국밥이 그렇게 맛있었다니까요.’
추억을 더듬기 위해서.
* * *
도깨비 구미호 부부는 낙원의 주민이 되기로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용산역에 있는 자신의 가게에서 완전히 떠나기도 뭔가 아쉬웠다. 생존의 문제로 가게를 운영했지만 긴 세월 머문 곳.
가게를 짓는 것부터 어느 순간까지는 다양한 인간과 요괴와 어우러지며 이런저런 추억을 만들었다. 그렇다고 파리만 날린 지 오래된 가게에 머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타협했다.
낙원과 용산 가게를 왕복하자고. 지금은 용산 가게에 주로 있지만 차츰차츰 비중을 옮겨서. 그리고 그렇게 결정한 후에는 가게에 비축되었던 힘을 쓰기로 했다.
은후처럼 엄청나게 특별하지 않아도 가게를 사람들이 눈치챌 수 있게끔. 물론 거기엔 조건을 걸었다. 과거 한 번이라도 가게에 방문한 사람만 알아차릴 수 있도록 말이다.
“거, 그런데 손님이 오긴 오려나? 인간들은 너무 빨리 죽는단 말여.”
“그러니까요. 마지막으로 손님을 받았던 게 언제였죠?”
“50년은 되지 않았나?”
“50년까지는 아니고요. 40년?”
“끙.”
도깨비와 구미호는 긴 세월을 살아온 만큼 시간관념이 희박했다.
“은후 도령 말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좀 아쉽다니께.”
“새로운 손님을 받는 건 아무래도 위험 부담이 클 테니까요. 지금 한반도 상황이 그렇잖아요?”
진지하게 괴력난신을 믿는 이들은 거의 사라졌으니.
“예전과 다르게 단순히 소문만 퍼지는 게 아닐 수도 있으니까요.”
사진과 영상이 과거에 비해 부쩍 발달했다. 물론 일반적으로 사진이나 영상을 보고 코스프레를 했다고 여기기는 하겠지만.
“유명해지면 곤란한 건 우리예요.”
도깨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구미호에게 말했다.
“오늘도 공 친 것 같은데 은후 도령이나 부르자고. 앞으로 잘 보여야제.”
“그러죠.”
“그나저나 난 장사하고 싶은디.”
“은후 도령과 상담이라도 해 보자고요.”
예전처럼 눈치 보지 않고 다양한 인간을 가게에 불러다 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자신의 추억을 으스대며 자랑도 좀 하고, 맛있는 것도 함께 먹고 싶은데.
‘에잉.’
도깨비가 속으로 투덜거리며 음식을 준비했다. 구미호는 일전 은후에게 받은 핸드폰을 조작했다.
‘참 신기하단 말이야.’
요 조그마한 물건으로 엄청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이와 연락할 수 있다니.
“아아, 들리나요?”
* * *
방을 뺀 이후 은후는 덕진 공원에서 지내며 집을 찾았다. 낙원에 계속 머무는 것도 좋겠지만 대외적인 시선을 고려해서. 또 마법 연구는 낙원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 있는 게 낫다 싶어서.
‘그런데 마땅히 좋은 곳이 안 보이네.’
돈은 충분했다.
하지만 마땅한 곳이 보이질 않았다.
‘덕진 공원에서 그리 멀지 않으면서도 영맥이 지나가는 곳.’
좀 더 둘러봐야 하나.
‘아니면 영맥을 끌어와?’
정 못 찾으면 그것도 대안이 될 수 있겠지만.
“여보세요?”
그렇게 은후가 골똘히 생각하던 도중, 구미호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중요한 내용은 아니고 시간이 난다면 오늘 한번 놀러 오라는 용무였다.
비장의 국밥을 만들었다는 말에 은후는 호기심이 동했다. 그간 상황이 여의치 않아 대수롭지 않은 걸 만들다가 오랜만에 힘을 좀 썼다는 말과 함께 수호령도 같이 오면 좋겠다고.
“이모야?”
“응.”
옆에서 낙원의 주민들과 은후가 가져다준 보드게임을 하던 수호령이 은후에게 다가와 물었다.
“게임은?”
“으으, 내가 제일 먼저 파산했어.”
은후가 가져다준 건 블루마블,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의 풍경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국내에는 발음 그대로 바꾸어 부루마불이라고 출시해서 그렇게 알려졌다.
‘아류작이기는 한데.’
미국 보드게임 모노폴리의 데드카피.
‘하지만 그건 중요한 건 아니지.’
콘셉트가 다르며 룰 자체는 저작권에 저촉되지 않으니까. 은후 또한 어렸을 적 재밌게 즐겼었다. 낙원에서 딱히 할 게 없는 수호령과 다른 주민들을 위해 가져다주었는데, 재밌게 즐기는 모습에 은후도 만족스러웠다.
“그나저나 이모가 뭐래?”
“오늘 놀러 오라는데 같이 갈래?”
수호령이 미간을 찌푸린 뒤 끙끙거리며 고민했다.
“엄청 맛있는 국밥도 있대.”
“으으으으.”
마침 일기 예보는 물론 은후의 예상대로라면 아침까지 전국에 비가 내릴 터. 하지만 여전히 머뭇거리는 건 역시나 덕진 공원에서 혹시 발생할 수도 있는 사고의 가능성이었다.
“오래는 말고 잠깐만 어때? 그리고 개구리를 남겨 두는 거야.”
“개구리를?”
“응. 그리고 혹시 아이가 덕진 공원에 온다면 바로 넘어오면 되지.”
“그렇게 하는 것도…… 아!”
옆에서 은후와 수호령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개구리가 폴짝거리며 외쳤다.
“졌다!”
“휴우.”
게임이 결판 난 것 같았다. 개구리가 아쉬운 표정을 지은 채 수호령에게 다가와 말을 이었다.
“시간도 늦었고 날씨도 추워져서 이 시간에 오는 아이가 없는 거 알잖아.”
아예 방문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성인이었다.
“움.”
“게다가 천도복숭아 나무도 있잖아?”
은후가 이전과 다르게 굳이 권할 수 있었던 까닭은 천도복숭아 나무의 덕도 컸다. 수호령의 기반이 된 천도복숭아 나무는 본능적으로 아이를 소중히 여겼다.
며칠 전, 수호령이 나서기도 전에 넘어질 뻔한 아이를 천도복숭아 나무가 자연스레 도와주었다. 뿌리를 길게 뻗어 다치지 않게끔 한 것이다.
‘지금 천도복숭아 나무라면 아이가 호수 가운데 빠져도 최소한의 시간은 벌 수 있을 터.’
거기에 개구리까지 있으면.
‘다소 과하지.’
이세계도 아니고 아이가 다치거나 죽을 만한 일이 덕진 공원에서 일어날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럼에도 수호령이 이토록 고민하는 까닭은 생의 근본과 목적이 아이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바가 아니었기에 은후는 어디까지나 부드럽게 자신의 견해를 밝혔고 절대로 강요하지 않았다.
“좋아. 잠깐만이라면.”
수호령의 결심에 은후를 비롯한 모든 낙원의 주민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공원 안에 갇혀 있는 수호령이 안쓰럽기 그지없었기에. 그래서 용기를 내며 굳은 표정을 지은 수호령이 대견스러웠다. 귀엽기도 했고.
“갈까?”
“으응.”
은후가 수호령의 손을 붙잡고 호수로 향했다. 그리고 개구리가 한강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열었다.
* * *
한강에서 벗어나 용산으로 향하는 길. 수호령은 연신 주위를 둘러보며 눈빛을 반짝였다.
“건물이 엄청 높고 많아!”
지금까지 수호령이 봐 온 풍경은 덕진 공원과 그 주변이 전부. 그렇기에 비교적 고층 빌딩이 많은 한강 주위의 길거리는 새롭게 다가왔다.
“사람들이랑 자동차도 엄청 많구. 와와.”
은후가 바라보기엔 딱히 그렇지도 않은 것 같은데, 수호령에게 있어서는 아니었던 듯싶었다.
“여기는 오랜만이네요.”
“연후 씨에게는…….”
“잊었습니다. 아니요, 정확히는 잊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그렇게 배려해 주실 필요 없어요.”
서연후에게는 씁쓸한 기억이 가득한 서울. 하지만 서연후는 그런 티를 내지 않았다.
“그으, 이제는 우리가 있잖아?”
“그래.”
“응응.”
“주점으로 바로 갈까?”
그런 서연후에게 수호령이 쪼르르 달려가 손을 붙잡고 도깨비와 구미호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평소와 다르게 은후가 있음에도 자신의 손을 잡은 수호령을 보고 서연후는 미소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어?”
얼마 후, 용산역 근처 도깨비 구미호 부부의 주점 근처에 도착했을 때 근처를 서성이는 한 할아버지가 일행의 눈에 띄었다.
“분명히 본 것 같은데.”
이정수였다.
여느 때처럼 용산역 근처를 서성이며 산책했다. 솔직히 과거 아내와 함께 방문했던 주점을 찾을 수 있으리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습관이었다.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이면 아내를 그리워하며 근처를 서성였다. 그런데 오늘은 희미하게나마 과거에서 보았던 주점의 형상을 보게 되었다.
“헛것을 본 건가.”
이정수가 중얼거렸다.
“끙.”
주점 입구 앞에서 조용히 서 있던 구미호가 은후를 비롯한 낙원의 주민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네, 그런데 굳이 나오실 필요까지는 없었는데요.”
구미호가 입가를 가리며 웃으며 답했다.
“낙원의 주인을 기다리는 일인데요. 게다가 오랜만에 우리 낙원의 주민 외에 다른 인간 손님도 오실 것 같고요.”
구미호가 도깨비가 운영하는 주점의 손님이 되어 들어올 수 있는 조건은 크게 둘. 하나는 과거 주점에 와 본 적이 있어야 했으며, 두 번째는 문 입구까지 도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정수는 한참 서성인 끝에 주점의 문을 찾을 수 있었다.
“허?!”
그리고 깜짝 놀랐다. 문을 찾은 후 갑작스럽게 시야에 들어온 낙원의 주민들 때문에. 수호령이 이정수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은후의 눈치를 살폈다. 은후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수호령이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