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화
과거 이세계에 납치되기 전, 은후는 언젠가 취미로 악기를 배워 보려고 한 적이 있었다. 그건 삶이 너무 무료했기 때문이다.
‘뭐랄까.’
재미가 없었다.
회사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자신의 업무에 익숙해졌고, 동료들의 평가도 좋고, 다음 승진은 자네가 확정이 아니냐며 상사에게 덕담도 듣던 시기.
하지만 결혼 생활은 그러지 않았다. 짧은 신혼의 달콤함 이후에 찾아온 불화. 딱히 무언가 뚜렷한 이유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았다. 계기야 있었지만.
‘전부 지나간 일이지.’
그 무렵 삶에 변화를 주기 위해 억지로 시간을 내어 피아노를 1년 남짓 배웠다. 그때 은후가 반했던 곡 중 하나가 피아노 소나타 C# 단조, op. 27-2.
쉽게 말하자면 베토벤 소나타 〈월광〉.
죽기 전에 꼭 한 번쯤은 들어 봐야 할 클래식 중 순위권 안에 꼽히는 곡. 더불어 살아가면서 스치듯이라도 한 번은 듣게 되는 곡. 그래서 사람들에겐 퍽 익숙한 곡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 곡 하나만큼은 잘 치려고.’
그래서 건반을 두드렸다.
피아노 실력이 그리 좋지 않았음에도 한 곡에만 매진한 덕분일까, 그럭저럭 괜찮다는 평을 당시 피아노 강사에게 들을 수 있었다.
‘〈월광〉을 기타로.’
오래된 곡이었다.
그랬기에 피아노 외 다양한 버전으로 어레인지되었다. 기타 버전 또한 다양하게 존재했다. 은후는 언젠가 인터넷에서 감상했던 기타로 연주한 〈월광〉을 떠올리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기억을.’
하지만 굳이 당시 기억을 떠올릴 필요가 있을까. 억지로 떠올리자고 하면 못 할 것도 없지만. 그래서 은후는 희미한 기억만을 더듬으며 모자란 부분은 즉흥적으로 대처했다.
그래서 은후의 손가락에서 흘러나오는 곡조는 보통의 〈월광〉 템포와 달랐다. 원래라면 느린 악장으로 시작해서 바로 2악장으로 이어진다. 은후는 2악장을 다르게 연주했다.
1악장의 경우에 베토벤이 생전 언급했던 대로 최대한 섬세함을 살리라는 지시대로 정석을 연주를, 2악장 또한 그대로. 마치 호수 위의 관객에게 최면이라도 거는 듯 섬세하고 투명한 가냘픈 연주였다.
1악장과 마찬가지로 하늘에 구름이 부드럽게 흘러가며 가린 달빛을 불러오는 듯한 선율. 정석적인 아치 구조를 따라가지 않았기에 〈월광〉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조금 어색하게 들릴지도 모르는 음률.
그러나 고운 가락이 우리들의 귀에 걸쳐 평안함을 불러왔다. 이윽고 2악장의 피날레가 높은 하늘에 자아내는 말간 풍경에 너울거리며 슬픔을 떨어뜨렸다.
* * *
은후의 연주가 끝나자 주위는 고요함으로 휩싸였다. 들리는 소리라곤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 전동 오리배의 모터 소리 정도였다.
그런 고요함을 물리치며 은후의 손가락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2악장에서 멈추기엔 뭔가 좀 아쉬워서. 하지만 이내 피식 웃으며 연주를 멈췄다.
‘굳이 기타를 연주하지 않아도.’
널찍한 고요함이 마음에 들었다.
3악장의 경우엔 앞과 다르게 쉼 없이 정말 빠르게 손가락을 움직여야 했으니, 왠지 모르게 굳이 그렇게 바쁘게 손가락을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윽.”
이하연은 손에 들고 있던 캠코더가 너무 무거웠다. 방금 전까진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던 것 같은데, 정신을 차리고 나서 보니 무게가 장난 아니라고 느꼈다. 한참을 거의 흐트러짐 없이 캠코더를 들고 있었기에.
“계속 찍고 있었던 거야?”
“어어.”
이하연이 멍하게 답했다.
“와!”
수호령이 눈빛을 반짝이며 물개 박수를 쳤다. 옆에 있던 개구리도 덩달아. 성호의 경우엔 은후의 방금 연주에 무언가 영감을 느꼈는지 호수를 공책 삼아 음표를 그려 넣었다.
툭, 툭.
갑자기 떨어지기 시작한 비.
“일단 돌아갈까?”
이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덕진 공원 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차에 올라탔다. 아직은 비가 쏟아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빗방울이 방울방울 차 앞 유리에 맺혔다. 이윽고 해가 완전히 사라져 어둠이 찾아오고 비가 환영하듯 어지러이 하늘에 노닐기 시작했다.
“저녁은 아직 좀 이르려나.”
“응. 밥을 좀 늦게 먹었으니까.”
딱히 배가 고프지 않은 상황.
“집에는 언제 돌아가려고?”
“그러게. 딱히 생각은 안 하고 왔는데.”
막차를 타도 되고, 여차하면 그냥 적당히 모텔 잡아서 하룻밤 보낸 뒤 넘어가도 되니까.
‘그렇다고 은후와 모텔에 가는 건 아직 좀.’
이르지.
시대가 적잖이 바뀐 상황.
이하연은 원나이트라든가 사귀기 전에 몸을 겹치는 거에 관하여 색안경을 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르고 처한 상황이 다르니 그럴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건 너무 가볍지 않은가. 이하연은 소중한 사람이라면 관계를 갖는 거에 있어서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렇다고 뭐 혼전 순결주의를 주장하는 건 아니었다.
‘모텔에 간다고 전부 관계를 갖는 건 아니겠지만.’
그냥 순수하게 잠만 잘 수도 있겠지만, 막상 또 그런 상황이 펼쳐지면 뭔가 서운하지 않을까 싶었다. 게다가 아직 남자와 관계를 가진 적이 없어서 호기심도 컸으나 두려움도 적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하연은 잠깐 고민 후에 전주역 근처로 향하자고 했다.
“술이나 한잔해.”
“그럴까?”
“응. 그냥 가볍게 마시다가 막차 타고 올라갈게.”
“그래.”
“아, 맞다. 오늘 찍은 영상 말이야. 올려도 돼?”
은후가 차에 시동을 건 뒤 출발하기 전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만 안 나오게 해 줘.”
“알았어.”
비가 내리는 밤이었다.
* * *
이하연을 배웅한 뒤, 은후는 대리를 불러 덕진 공원으로 향하기로 마음먹었다. 마나로 체내의 알콜을 날려 버려도 상관없겠지만 적당히 취한 기분을 유지하고 싶어서.
하지만 비가 내리는 탓일까. 대리가 잘 잡히지 않았다. 좀 더 시간을 보내던 은후는 피식 웃은 후 체내의 알코올을 제거했다. 그리고 자신의 몸 상태를 다시 한번 체크한 후 차를 몰고 덕진 공원으로 향했다.
“음주 운전 아니에요?”
성호의 질문에 은후가 웃으며 답했다.
“체내 알코올을 전부 날렸으니까 음주 아닙니다.”
그건 중간에 음주 운전 단속을 하면서 증명되었다.
“가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은후는 비가 오는 날에 고생하는 경찰관들을 위해 근처 편의점을 들렀다. 그리고 편의점에서 이것저것 잔뜩 산 뒤 경찰관에게 전달했다.
“이런 걸 뭘, 다.”
“비 오는 날인데 엄청 고생이시잖아요.”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나저나 음주 단속 여기서 하는 거, 처음 보네요.”
음주 단속을 하는 구역은 대개 정해져 있었다. 물론 매번 같은 장소는 아니었다. 랜덤이니까. 하지만 무작위로 한다고 해도 애초에 큰 틀은 정해져 있었다. 그래서 단속 지점을 공유하는 건 예삿일이었으며, 훗날 아예 앱으로까지 나와 피해 가는 사람도 상당했다.
‘애초에 그런 앱을 깐다는 거 자체부터가 참.’
시대가 흘렀음에도 아직 술에 관대한 우리나라였다. 매해 음주로 인한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게 요새 여기에서 사고가 엄청 늘었거든요.”
“사고요?”
“네. 신기한 게 음주 운전자가 사고를 계속 내거든요. 사망자도 몇 나왔고요. 불행 중 다행인 점이라면 운전자만 죽었다는 건데요.”
술을 마시고 운전하는 사람만 다치거나 죽는다고. 그래서 요새 경찰관들 사이에 이런 소문까지 떠돌고 있다고 했다.
“근래에 음주 운전으로 일가족이 사망한 뒤 자살한 남자가 귀신이 된 거 아니냐고요.”
여름이 끝나갈 무렵, 한 가족이 나들이를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교통사고가 났는데 가해자가 음주 상태였더라. 그리고 안타깝게도 운전자를 제외한 아내와 아이들이 사망했다.
그리고 재판은 이례적으로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평범한 재판이어도 긴 시간이 걸린다는 걸 고려하면 보기 드문 일이었다. 결과 또한 그러했다.
집행 유예.
그 결과에 남자는 이렇게 외쳤다고.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법원이 마음대로……!”
이후 인터넷에 열심히 억울함을 알렸으나 실제 기사화되거나 뉴스에 나가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는 일이긴 한데, 뭐, 현실이 그렇죠. 소문에 따르면 진짜 돈 많은 집안이라고 하던데. 외가 쪽에 유명한 국회의원이 있다는 말도 있고.”
남자는 억울함을 알리고자 노력하다가 시원치 않자 사적 보복을 감행했다.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해자의 차량으로 돌진한 것. 자신의 차량을 몰고.
“남자는 안전벨트를 하지 않아서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그 개새…… 큼, 그 나쁜 놈은 안전벨트를 해서 살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 남자가 귀신이 되어 나타난다?”
“네, 실제로 귀신을 목격했다는 진술이 좀 있었거든요. 몽타주를 그렸더니 그 자살한 남자와 똑 닮게 나왔고요. 이게 말이 되나 싶긴 한데요.”
“그러니까요. 요즘 시대에 귀신이라니.”
“그렇죠? 근데 또 자살한 남자의 사연을 생각해 보면 그럴 만하다 싶기도 하죠.”
사실 쉬쉬하는 이야기였다. 경찰이 귀신 이야기를 하는 것도 그렇고. 그런데 은후에게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은 까닭은 단순했다. 은후가 마나를 통해 살짝 유도한 것.
‘근처에서 정령의 기운이 느껴진단 말이지.’
악령에 가까운.
그래서 경찰에게 물었더니 예기치 못한 사연을 듣게 되었다.
“그럼 전 가 보겠습니다.”
“네. 이번에도 안 그러셨지만 앞으로도 꼭 음주 운전은 하지 마시고요.”
은후가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인 후 차를 몰고 덕진 공원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주차를 끝마친 후 마나로 비를 비껴내며 기척을 감춘 채 하늘을 날았다.
‘저쪽인가.’
음주 단속이 있던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장소. 주의를 기울이고 살피니 정령의 형상이 어른거렸다. 아까 소문의 주인공이었다. 한이 맺혀 귀신이 된.
“안녕하세요.”
“크르르륵.”
은후의 인사에 돌아오는 건 짐승이 내뿜을 법한 울음소리였다. 은후는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귀신을 살폈다.
‘예상대로인가.’
덕진 공원에 심은 천도복숭아 나무, 몰려드는 마나. 그 여파로 덕진 공원 근처도 마나의 농도도 올랐다. 그래서 이런저런 조처를 했으나 완벽히 막을 수는 없었다.
‘귀신이 품은 성질이 천도복숭아 나무가 뿜는 마나와 닮아 있어.’
마나의 농도를 완벽하게 조절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차단하면 어떻게든 가능하겠지만 그건 또 그것대로 문제가 생겼다. 인위적으로 마나의 흐름을 단절시키면 자연재해가 일어날 수도 있었으니까.
‘그걸 이용해 전쟁에 이용하기도 했지.’
은후는 이세계에서의 추억을 잠깐 떠올린 후 다시 눈앞의 귀신에게 집중했다.
‘마나의 농도가 오르고.’
따라서 귀신이 발생하기도 쉬워졌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비교적이었다. 여전히 그 확률은 희박했다. 그런데 눈앞의 귀신은 그 확률을 뚫은 모양이었다.
원한.
그 방향은 음주 운전자.
이지를 상실한 이유는 원한이 크기는 했지만.
‘아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마법적으로 뭔가 판단하는 건 나중의 일이었다. 당장 고민하고 결정해야 할 건 눈앞의 귀신에 관한 것이었다. 가장 간단한 방법이라면 그냥 소멸시키면 그만이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네.’
아까 경찰이 말했던 소문이 사실이라면 말이다.
‘일단 정신을 차리게 할까.’
은후가 손을 뻗어 마나를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