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의 인생 룰루랄라-72화 (72/170)

제72화

BMW 5시리즈 M5 E60.

“디자인 초안은 다비데 아칸르리젤이 맡았고, 이후 크리스 레글 수석 디자이너가…….”

일전에 은후를 이창석의 집에 데리고 간 운전사가 가져온 차량에 관해 이런저런 설명을 늘어놓았다.

“……스포츠카보다는 눈에 덜 띄고 무난한 차량을 선호하실 거 같아서 준비하신 차량이라고 하셨습니다. 명의는 회사 법인으로 되어 있고 보험이나 각종 절차는 전부 끝내 놓으셨으니 편하게 타시면 됩니다.”

2005년부터 2008년까지 4년 연속 베스트셀링 카 선정. 그 덕분인지 국내에서도 적잖은 판매량을 기록했다. 그래서 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차량이었다.

“좋군요. 선물은 감사히 받겠다고 전해 주세요.”

운전사가 고개를 꾸벅 숙인 후 키를 은후에게 건넨 후 사라졌다. 은후는 자취방 건물을 쓱 살펴본 후 쓴웃음을 지었다.

‘참 어울리지 않는 차량이네.’

대학가 근처의 원룸 건물. 주차장이 있기는 했지만, 말이 주차장이지 구색만 겨우 갖췄다. 다행인 점이 있다면 건물에 주거하는 이들 대부분이 학생들이었기에 실질적으로 주차장을 이용하는 사람이 얼마 없다는 것일까.

‘누가 보면 카푸어로 알겠어.’

이사라도 가야 할까.

그렇지 않아도 적당한 집을 구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은 하고 있었다. 좁은 방이 요즘 들어 답답하게 여겨졌던 것. 휴식 공간과 연구실이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돈이 없다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은 것도 아니었으니.

‘아파트보다 주택이 낫겠지. 전세보다는 매매로.’

기왕이면 덕진 공원이랑 가까운 곳이 좋겠고, 그렇게 은후가 차 키를 만지작거리며 이사에 관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은후 학생?”

“아주머니.”

건물 주인 아주머니가 나타났다.

“어머, 어머. 이 차, 은후 학생 거야?”

“네.”

“아니, 집부터 살 생각을 해야지, 차부터 사면 좀 그렇지 않아? BMW면 진짜 비쌀 텐데. 유지비도 장난 아닐 테고.”

“선물 받은 거라서요.”

“서, 선물?”

“네.”

“대체 누가?”

은후는 그냥 웃으며 말을 돌렸다.

“그리고 방 빼려고요.”

“응? 계약 기간이 꽤 남았을 텐데.”

“2달치 월세, 미리 드릴게요.”

“으음.”

주인아주머니가 잠깐 고민했다. 지금이 10월 중순이었다. 2달치를 미리 받는다면 그리 손해 보는 것도 아니었다. 방 자체가 가격 대비 괜찮은 편이었기에 학생만이 찾는 것도 아니었으니. 그래서 일전 자살하고 비어 버린 방도 금세 나갔다.

‘소문이 퍼지기 전에 방이 나가서 다행이었지. 그러고 보니 사흘 전에 누가 방을 찾는다고 했다고 복덕방에서 연락이 왔었고.’

은후가 방을 빼고 당장 내일이라도 나간다면 이득이었다. 한 달 이내여도 이득, 두 달 이내면 본전. 그런 아주머니의 고민에 은후의 이어지는 말이 방점을 찍었다.

“그리고 보증금은 다음 세입자 구하시고 주셔도 괜찮아요.”

“그래요. 방은 언제 빼려고?”

“이번 월세 입금날 전까지 뺄게요.”

“은후 학생이 매달 말일이었던가?”

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건물 아주머니가 그럼 그렇게 알고 있겠다고 한 뒤에 자주 찾는 복덕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다도 떨고 방을 내놓는다는 말도 미리미리 전달해 둘 겸.

은후도 곧바로 자신의 자취방을 찾았다. 그리고 쓱 둘러보며 픽 웃음을 지었다. 이곳에서 오래 머물렀다. 딱히 인상 깊은 추억이 남는 곳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머무르셨나 봐요?”

“그건 아니고요.”

조용히 있던 성호가 은후에게 말을 걸었다.

“그럼 특별한 기억이라도?”

“그냥 예전에 들었던 말이 생각나서 그랬습니다.”

머문 세월 자체가 추억이 되기도 하는 법이라고.

“오, 멋진 말이네요.”

성호가 은후에게 굳이 말을 건 이유는 아련한 분위기인 데다, 아까 차를 선물로 받았을 때보다 더 감정의 변화가 일어나서. 서로 계약 관계였기에 성호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물론 가까이 있어야 했으며 온 신경을 은후에게 기울여야 했지만 말이다.

성호는 고개를 계속해서 끄덕이다가 주위를 서성이며 연신 입술을 달싹였다. 뭔가 영감이 떠오른 듯싶었다. 은후는 그 모습을 잠깐 바라본 후 리어카에 자취방 물건들을 전부 집어넣었다.

대개 사람이 한곳에서 살아가다 보면 물건이 점점 늘어가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은후는 아니었다. 최소한의 물건으로만, 그리고 그 생활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이유가 뭐였더라.’

미니멀라이즘에서 비롯된 미니멀 라이프. 미국의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에게서 유래되었다. 28살의 소로가 2년 넘게 한 호수의 오두막에서 자급자족한 삶을 담은 《월든》.

그런 소로를 열광적으로 지지했던 헨리 스티븐스 솔트가 주장한 간소화된 생활방식. 대학교에 입학하고 그에 감화되어. 은후는 그런 자신의 옛 과거를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그러기엔 이제 힘들지.’

마법 연구를 위해선 그 반대를 지향하여야 했으니.

‘낙원에 내 집을 만드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진득하게 연구하기엔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 겉으로 보기에 마땅한 주거지가 있는 게 좋았고.

‘한동안은 낙원이나 호텔에서 신세를 질까.’

건물 주인집 아주머니에겐 월세 날 전까지라고 말은 했지만, 굳이 여기에서 더 머물 이유는 없었다. 괜히 머물러 봐야 중간에 연구의 흐름이 끊기기나 할 터.

그건 자취방에서 은후가 하는 일이라곤 대부분 마법 연구였기 때문이다. 마법 연구는 은후의 본업인 동시에 취미이기도 했다. 이세계에서 전혀 다른 환경에서의 연구는 은후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으며 목표도 명확했다.

- 뭐 하고 있어? 아직도 바빠?

은후가 핸드폰을 확인했다. 친구 이하연으로부터의 연락이었다. 한동안 바쁘다는 이유로 연락을 주고받지 못했다. 미리 말을 해 두었으나 이하연은 꾸준히 은후에게 연락을 취했다. 은후는 다소 미안한 마음에 바로 답장을 했다.

- 이제 괜찮아.

- 정말?

- 응.

- 하던 일은?

- 얼추 끝냈어.

잠깐의 시간이 흐른 후, 휴대폰에서 진동이 길게 울렸다.

“여보세요?”

“하이.”

“갑자기 웬 전화야?”

“그냥 오랜만에 목소리 듣고 싶어서. 바쁜 일 끝났다고 했으니까, 혹시 방해한 건 아니지?”

“방해였다면 받지 않았겠지.”

은후의 답변에 이하연이 기분 좋게 웃었다. 언제나 그랬듯 은후는 솔직했다. 자신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주기 위하여, 혹은 어떻게든 친해지고자 하는 남자들과 다르게. 게임에서도 그랬고 실제로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오랜만에 그, 놀러 가도 될까?”

“안 바빠?”

“나야 뭐 바쁠 게 있나. 패턴이 고정되기도 했고. 그리고 놀러 가면 콘텐츠 하나 더 생기는 거니까.”

“콘텐츠?”

“브이로그 말이야.”

“아, 그것도 시작했구나.”

자신의 일상생활을 담아 인터넷에 올리는 것. 이는 은후가 이하연에게 추천한 콘텐츠이기도 했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이하연이란 한 사람의 스트리머 자체를 콘텐츠화하는 것이 방송에 있어서 훨씬 좋으니까.

그러기 위한 일환으로 은후는 이하연에게 브이로그를 추천했다. 그리고 결과도 꽤 좋다고 했다. 그저 소소한 일상생활을 담아 내는 것에 불과하지만 그런 콘텐츠가 현재 드물기 때문이었다.

스마트폰이 아직 일상화되지 않은 시대였다. 막 나온 스마트폰의 동영상 촬영 기능도 좋지 않았고. 그런 상황에서 개인이 영상을 찍어 편집하고 인터넷에 올리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이하연 또한 은후의 강력한 추천이 없었다면 생각지도 않았을 일이었다.

“생방송이 아니니까 부담도 훨씬 적더라고.”

“그거야 그렇지. 아니다 싶으면 편집하면 되니까.”

“그래서 놀러 가도 돼?”

“그래라. 언제 올 거야?”

“음, 오늘?”

이하연이 쑥스럽게 웃으며 조심스레 물었다.

“안 될까? 안 된다면 내일도 좋고.”

“오늘하고 내일 방송이 쉬는 날이었던가.”

이하연의 방송 스케줄은 이랬다. 수요일부터 일요일은 저녁부터 새벽까지 고정 방송, 월요일과 화요일은 쉬는 날, 오늘은 월요일이었다.

“응, 여차하면 휴방해도 돼.”

“가능하면 되도록 지켜야지. 하여간 마음대로 해.”

“그럼 지금 준비하고 바로 기차 탄다?”

“그래.”

이하연이 살짝 억지를 부린 이유는 은후를 조금이라도 더 빨리 보고 싶어서, 내일까지 기다리기 힘들어서, 그래서 그랬다.

* * *

오후 4시가 좀 안 되어서 이하연이 전주 기차역에 도착했다. 그보다 좀 더 일찍 은후가 역 대기실에 마중 나와 있었다.

‘은후다!’

적당히 대기실의 벽에 기대어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은후의 모습에 이하연의 눈빛이 반짝였다.

‘내 친구지만 참 잘생겼단 말이야.’

잘생기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생각도 깊고 배려도 충분했으며 학식도 박학했다.

‘정식으로 논문을 낸다고 했지.’

대충 들어 봐도 학부생의 수준으로 어림도 없는. 사촌 오빠에게 물어보니 최소한 석사, 그것도 아마 매우 힘들 거라며 믿기 어려워했다.

최근에는 마법 연구 때문에 소홀했으나 그 전까지 강장원 교수의 조언을 들어 은후는 논문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래서 논문도 완성 직전에 있었다.

논문은 게임에서 비롯되는 인정 욕구와 심리의 상관관계. 이하연에게 최근 바빠서 연락하지 못한 핑계였다. 이하연은 제목을 간신히 생각해 낸 뒤 은후의 뒤를 조심스레 다가가 깜짝 놀라게 하려고 폼을 잡았다. 그때 은후가 휙 돌며 이하연의 얼굴을 마주했다.

“왔으면 말을 하지.”

“어?!”

되레 놀란 이하연이 어버버거리며 당황하자, 은후가 픽 웃었다.

“온 거 진즉 알고 있었어.”

“그, 그래?”

“그럼. 오늘은 모자도 안 썼고, 머리도 잘랐네?”

“으응.”

“잘 어울리네. 귀걸이도 바꿨고.”

저번과 달리 바뀐 점. 사실 관심이 있다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별거 아니라면 별거 아니었고. 하지만 저번 만남으로부터 시간이 꽤 지났다. 더불어 세세하게 하나하나 집어서 설명했기에 충분히 별거가 되었다.

“야, 넌 좀 배워라.”

“뭘 또?”

“백번 양보해서 액세서리 바뀐 건 몰라도 머리 자른 건 알아봐야 할 거 아니야, 인간아. 남자 친구라면서 그것도 몰라봐?”

“아니, 그건 미안해.”

대기실을 지나치며 은후와 이하연의 대화를 들은 커플이 투덕거렸다.

“밥 안 먹었지?”

“어, 그렇지?”

“밥부터 먹자.”

“좋아.”

이하연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내 깜짝 놀랐다. 전주역 주차장에서 은후가 선물 받았다며 자신의 차량을 가리켰기에.

“산 게 아니라 선물?”

“어, 정확히는 회사 차야. 저번에 말했었지? 회사 하나 만든다고. 혼자 차리긴 어려워서 투자도 받았거든.”

은후가 잠깐 고민하다가 확실하게 에스코트하기 위해서 차량 문을 열었다. 그때 이하연이 아차, 하면서 매고 온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냈다.

“콘텐츠 찍어야 해.”

“방송인 다 됐네.”

“기차 탈 때부터 찍었어야 했는데 정신이 없어서 깜빡했어. 지금부터라도 찍어야지.”

“그럼 다시 역 대기실로?”

이하연이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나중에 집에 갈 때 찍어도 되니까. 여기 주차장하고 차도 같이 찍어도 될까?”

“상관없어.”

은후의 허락에 이하연이 희희낙락하며 캠코더를 꺼냈다. 나름 큰맘 먹고 장만한 기기였다.

‘그나저나 BMW라는 건 알겠는데.’

이하연이 전주역 주차장을 찍은 뒤 은후의 차를 찍으며 한참을 머뭇거리다 멘트를 쳤다.

“어, 이거 엄청 비싼 차 맞죠?”

은후가 피식 웃은 뒤 차량을 인수받으며 들었던 대로 보충 설명했다. 그에 이하연이 눈빛을 반짝이며 다시 한번 은후의 박학다식함에 감탄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