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1화
며칠 동안 바깥 구경을 하지 않았다. 수업도 빼먹었고 매일같이 방문하던 덕진 공원도 찾지 않았다. 그건 은후가 그동안 계속해 오던 연구의 성과가 가시적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은후는 현대로 돌아온 이래 참 다양하게 연구했다. 개중에 어느 순간부터 제일 우선순위로 둔 건 천도복숭아 나무. 천도복숭아 나무의 힘을 이용해 수호령을 성장시키는 방법.
‘이번 성장도 천도복숭아 나무 때문이지만.’
다시 한번 더, 충분히 이용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후우.”
은후의 생각이 어지러이 얽혔다. 그리고 마침내 결과를 낼 수 있었다. 이름을 지어 주고, 자신과 계약하면서. 그 과정에서 천도복숭아 나무를 끼얹으면.
‘이름은 어떻게 하지?’
연구도 연구지만, 그 또한 정말 중요한 일인데.
‘쯧.’
은후가 가볍게 속으로 혀를 차며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대충 마법으로 몸을 씻은 뒤 옷을 입었다. 그리고 덕진 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침인가.’
바람이 불고 햇빛은 부끄러워 얼굴을 구름 뒤로 숨겼다. 안개도 미약하지만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그래서 길은 흐렸다. 그 와중에 차가운 하늘에 달빛이 서렸다.
일무광(日無光)이다.
해에 빛이 없어서 달이 보이는 기상 현상으로 하늘을 자주 올려다보는 사람이라면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달빛. 눈썹처럼 가늘어진 초승달이 아침 인사를 건네왔다.
잠깐이라고 여겼던 연구 시간. 그런데 그 잠깐은 생각보다 긴 시간이었던 것 같다. 익숙하게만 느껴지던 길거리가 너무 오랜만인 것 같았다.
‘아.’
날아가던 참새 한 마리가 지쳤는지 전깃줄에서 휴식을 취하려다 아래로 추락하는 모습이 은후의 눈에 밟혔다. 은후는 빠르게 주위를 살핀 뒤 달려가 참새를 손바닥으로 받아 냈다. 마나까지 사용해서 살포시.
‘다쳤구나.’
어디서 어떻게 다쳤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몸에서 흘리는 피를 닦아 낸 뒤 드러난 상처를 보고 알았다. 다른 새에게 공격을 당해서 다쳤다는 걸.
짹짹.
참새가 울었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았다고, 어디로 가야 할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가야 한다고, 그게 세상의 끝이라도.
‘자식인가.’
상처 자체는 그리 크지 않았다. 문제는 피를 적잖이 흘린 것. 그래서 의식이 흐려 혼란스러운 것 같았다. 다만 의지는 명확했다. 은후는 이내 픽 웃고는 참새의 의식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이내 근처 건물의 높은 곳 한구석에 있는 둥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짹짹.
여기다.
사람의 발걸음으로 그리 머지않은, 참새의 날갯짓으로도 금방인 곳. 하나 다친 참새에겐 멀고 멀어서 아득했다. 아직 태어나지도 못한 알을 바라보며 참새가 계속해서 울었다.
“괜찮아.”
그대로 두면 죽었겠지만 다친 참새에게 있어서 은후와의 만남은 행운이었다. 피륙에 낸 상처 정도는 은후로서도 치료할 수 있었으니. 하지만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너무 많은 피를 흘렸기에 어찌 될지는 은후도 몰랐다.
‘방도가 없는 건 아니지만.’
은후가 잠깐 고민하다, 어차피 손을 쓴 김에 확실히 도움을 주기로 결심했다. 이세계에서 흑마법에 손을 대었을 때 인간부터 각종 동물이나 몬스터의 신체를 확인하고 질리도록 해부했기에 참새 정도야.
물론 그때는 복수를 위해 키메라를 만든다거나 좀 더 효율적으로 살생에 필요한 연구를 했었지만, 하나 그때의 경험이 지금 한 생명을 살리는 데 쓰이게 되었다.
짹짹.
그때 다른 참새가 날아왔다. 짝이 되는 참새로 보였다. 그 참새는 연신 은후의 주위를 선회했다. 은후는 그에 마나를 이용해 자신의 의지를 전달했다.
‘걱정하지 마. 도와주려는 거니까.’
짹짹.
‘이리 올래?’
남편 참새는 한참 주위를 더 맴돌다가 은후의 어깨에 자리 잡았다.
* * *
잠시 후, 쌕쌕 잠든 참새와 그 둥지를 들고 은후는 덕진 공원을 찾았다. 그 뒤를 남편 참새가 뒤따랐다. 덕진 공원에 도착하자, 평소와 다르게 개구리가 은후를 마중 나왔다.
“령이는?”
“은후 도령도 령이라 부르시는구려.”
“임시로. 아직 이름을 붙여 주진 않았으니까.”
“이름이라.”
개구리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러고 보니 항상 개구리라 불렀지.”
“나야 그거로 족하오.”
“그렇다면 상관없지만. 그래서 령이는?”
“자고 있다오. 요새 잠자는 시간이 많이 늘었어. 그래도 아이가 위험에 처하면 벌떡 일어나지만. 참고로 령이는 자신이 그렇게 불리는 걸 꽤 기꺼워하는 것 같더구려.”
“그놈의 옛 말투는 언제까지 쓸 거야?”
개구리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내킬 때까지?”
“말하는 걸 보아하니 나이를 먹어서 노망난 것 같진 않은데.”
“노망이라니!”
“하기야 노망이 날 거면 났어도 진즉 났겠지.”
은후의 짓궂은 농담에 개구리는 툴툴거리며 사람에서 개구리 형상으로 변했다. 그리고 폴짝폴짝 은후 주위를 뛰며 물었다.
“거기 참새는 뭐야?”
“그 말투는 그만두기로 했나 보네.”
“큼. 참새는 뭐요?”
“오다 주웠어.”
“오다 주워?”
“피를 흘리고 죽을 뻔했거든. 하필 눈앞에서.”
개구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명을 구하는 건 귀한 일이지.”
마땅하다면 마땅하나 실제로 실천하기 어려운, 설령 그게 작은 동물이더라도.
“낙원의 주민으로 받아들일 생각?”
“글쎄.”
은후가 어깨를 으쓱이며 벽진 폭포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서연후와 성호를 비롯한 낙원의 주민들과 인사한 후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우움.”
호랑이 카페트에서 몸을 뒤척이며 곤히 자고 있는 수호령의 모습에 은후가 픽 웃었다. 그리고 천도복숭아 나무에 들고 온 참새 둥지를 잘 올려 두었다. 기절해 있는 어미 참새도 그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고 보니 먹이를 구해 와야 할 것 같은데.’
낙원에는 참새의 먹이가 될 만한 곤충이나 벌레가 없으니까. 그래서 은후는 개구리에게 부탁했다. 참새 먹이 좀 구해서 가져다주라고. 개구리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쯤이야. 대신에 햄버거!”
“다음에 올 때.”
“다음? 이따가나 내일이 아니고?”
“오늘은 힘들 것 같아서.”
“혹시 또 한동안 안 오나?”
“바쁜 일은 끝났으니까 이번처럼 길게 안 오지는 않을 거야.”
다만 할 일이 있었다.
수호령이 겪는 성장통에 도움이 되는 포션을 만드는 것. 저번에 라면 먹을 때 짐작은 했다. 본디 정령의 성장은 계단식이었고, 그 계단을 올라가는 데 적잖은 시간이 걸리는 게 보통이었으니, 수호령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냥 지켜보기만 하려고 했다. 따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고서. 그런데 오늘 상태를 확인해 보니 포션 정도는 제조해서 먹이는 게 좋을 듯싶었다.
‘다행히 천도복숭아 나무에 관한 연구도 끝났고.’
그러지 않았다면 포션 제조는 생각지도 않았을 것이다. 천도복숭아 나무를 고려하지 않고 기존에 알고 있던 지식 그대로 포션을 사용하면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 몰랐으니까.
“저도 따라가도 될까요?”
은후가 낙원을 벗어나려고 할 때 성호가 말을 걸어 왔다.
“기타 연주할 시간이 없을 수도 있는데요?”
“그건 괜찮습니다. 그냥 낙원에만 머물자니 좀 지루해서요. 기존에 만들고 싶었던 곡도 다 만들었고. 연습도 열심히 했거든요.”
성호는 슬슬 사람들에게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며 평가를 받고 싶었다. 그렇다고 은후의 스케줄을 방해하면서 요청할 생각은 없었다. 그걸 확실히 말하며 덧붙였다.
“그리고 여기에 있는 것보다 은후 씨를 따라다니는 게 새로운 영감을 찾을 수 있는 확률이 높을 테니까요.”
그걸 확실히 말했기에 은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하다면 빠르게 시간을 내겠습니다.”
“그렇다면 저야 좋고요.”
성호도 결국 은후가 이름을 주어 계약한 존재이니, 성호의 바람을 들어주기 위해서 은후는 최대한 노력할 의무가 있었다.
‘배려인가.’
성호 또한 성장한 것 같았다.
정신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적절한 계기만 있으면 수호령처럼 계단을 오를 수 있겠는걸.’
당장에라도 은후가 마나를 공급한다면. 하지만 은후는 딱히 그럴 생각이 없었다. 이세계에 있을 때처럼 강대한 힘이 필요한 것도 아니니.
‘만약 성호가 한 계단 오르면 한층 더 주의해야겠어.’
지금 성호의 음악도 사람의 감정을 움직이지 않는가. 하지만 성장한다면 이후의 음악은 아예 감정을 움직이는 걸 넘어서 조종까지 할 수 있을 터였다. 만약 은후가 마음만 먹는다면 사이비 종교 하나쯤 간단하게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지금도 그게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은후가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며 피식 웃고선 핸드폰을 확인했다. 그동안 쌓인 연락이 꽤 되었다.
‘일단 어머니에게 전화부터 하자.’
하연이한테도 이따 전화할까. 서혁이에겐 문자 한 통이면 되겠고.
그런 생각을 이어 나가며 핸드폰을 확인하던 도중, 생각지도 못한 문자 하나가 은후의 눈에 밟혔다. 전주 유지인 이창석의 문자였다.
- 시간 나면 연락하시구려. 선물이 있소.
이창석의 주도 아래 백석 저수지에 건물을 구입하고 기본적인 전통주를 만들기 위한 설비를 갖춘 지 시간이 좀 지났다. 이후 은후는 종종 건물에 들러 술을 만들었다.
처음엔 정말 처음부터 손수 전통주를 빚어 보려고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알아야 할 지식도, 해야 할 일도 많았다. 그래서 적당히 마트에서 기성품으로 나온 술을 샀다.
그리고 그 술을 이용해 맛을 적당히 변형하거나 끌어 올린 후, 잠에 잘 드는 효과를 마법으로 부여했다. 그렇게 세상에 없는 새로운 술로 탈바꿈시켜 재포장했다. 흥미가 동했거나 재미라도 있었으면 직접 술을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았겠지만.
‘귀찮아.’
그래, 귀찮았다.
불법이라면 불법이겠으나 어차피 들킬 염려는 절대 없었다. 불법 침입을 위한 각종 마법진을 설치해 두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세계에서처럼 아예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정도의 강한 마법진은 아니었다.
건물에 왠지 모르게 꺼림칙함을 느끼게 하거나 아예 볼 수 없게끔 사람의 인식을 저해하는 마법진을 설치했다. 일반인이라면 로또에 당첨된 후 벼락 맞아 죽을 정도의 확률로 건물에 진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만약 진입한다면 건물에 불이 나는 마법진까지. 물론 그 화재는 일반적인 불이 아닌 마법으로 만들어진 불이었으며 거기에 사람을 해할 수 없도록 따로 조처까지 해 놓았다.
‘조금은 다칠 수도 있겠지만.’
그러니 문제가 될 건 아예 없었다.
‘그나저나 선물인가.’
하기야, 돈도 돈이지만 술 덕분에 이창석도 적잖은 이득을 보고 있을 터이니. 선물을 주는 건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무슨 선물일까 고민하며 은후가 이창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만 이창석은 현재 전주에 없다고 했다.
“이번에 얼굴이나 겸사겸사 볼까 했는데, 급한 일이 생겨서 지금 서울에 있다오.”
“그러십니까. 그럼 다음에 뵙죠.”
“선물은 내 사람을 통해 보내리다.”
“다음에 뵐 때 주셔도 괜찮은데요.”
“흐, 거참. 무슨 선물이든 관심이 없다는 말투구려.”
“뭐, 그렇죠.”
은후의 솔직함에 이창석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래서 선생이 좋아. 그래도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소. 못다 한 이야기는 다음에 합시다.”
이창석이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약 한 시간 후, 사람이 도착했다. 차 한 대를 끌고. 은후도 익히 아는 고급 브랜드의 외제 차였다.